[제7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부문 당선작] 김준현
■ 김준현「꼴찌」 외 4편
꼴찌
되감기를 누르고 싶은 하루 되감기를 누르면
아이들이 뒤로 달리기 시작해! 결승선에서 출발선까지 제일 늦게 출발한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출발선
엄마와 아이들은 입에서 오물오물 방울토마토를 꺼내고 김밥을 꺼내고 도시락 통 위로 하나하나 껴내 놓은 음식들 입으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친구도 있어! 마술을 부리고 있는 아이들
이대로 계속 되감으면 짝궁이 그리는 그림도 쓱싹쓱싹 붓질 끝에 백지가 되겠지 우리 모두 책도 거꾸로 넘겨 읽고 해는 동쪽으로 지고 서쪽에서 뜨겠지
운동회 날 내리던 비가 하늘로 돌아가고 웅덩이에 빨대라도 꽂은 것처럼 뽁뽁, 하늘이 물을 다 빨아 먹겠지
내가 맛있게 먹고 있는 치킨이 언젠가 닭이 되고 병아리가 되고 따뜻한 알 속으로 들어갈지도 몰라 엄마 닭은 이 아이를 엄마나 열심히 품었을까 생각할 때까지 비디오를 되감는 것처럼 생각도 되감아 보고 싶은 하루.
책가방
1 무당벌레는 날개를 짊어지고 다닌단다. 무겁냐고? 생각해 보렴. 무당벌레의 얇디얇은 다리를.
땅에서 납작하게 엎드려 다니는 게 힘이 드는지 무당벌레는 늘 높은 곳을 찾아다닌단다.
아슬아슬한 나뭇가지 위나 옥상의 난간 모서리 내 새끼손가락의 손톱 끝으로도 올라가지 뭐니.
그래도 무거운 날개를 활짝 펴는 순간 지금껏 무당벌레가 걸었던 모든 길이 활주로가 되는 순간 그 녀석 기분은 얼마나 좋았겠니?
2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등에 맨 책가방이 오늘따라 가벼워진 거 같다.
내 이름
수업 시간에 묵음을 배웠습니다. “묵음은 있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말이랍니다.”
선생님 말씀을 받아 적어요. 모든 펜이 더듬이처럼 일제히 곤두섰어요.
종이 긁는 소리가 귓속을 간질일수록
밑줄만 점점 길어지는 나의 그림자.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내 이름도 묵음일까요?
달팽이관
할머니가 사는 곳은 저 높은 파도 소리도 고등어 파는 청년의 목소리도 잘 안 들리는 곳
바다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목청이 깊은 만큼 귓속도 깊은 걸까요?
사람 귓속에만 있다는 달팽이관 요 속에 숨어 있을 요놈의 달팽이는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귀 모양의 ?를 달고
할머니? 부르면 바로 옆에서도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들 뒤에 붙어 있는 할머니의 귀가 ?가 되어 가요
아무리 가까워도 너무 먼 할머니 귀.
짧은 만남
빨간색 신호등이 꺼지고 초록색 신호등이 켜지면
사람들은 초록색 신호등을 향해 두근거리는 심장을 향해 걸어오고 달려오고 유모차를 끌고 와
자길 향해 오는 줄 알고 초록색 신호등이 깜박깜박 눈빛을 보내지만 모두들 초록색 신호등을 지나쳐서 자기 갈 길로 가 버리지
서운해서 눈 감아 버린 초록색 신호등.
김준현 1987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영남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