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산집 제10권 / 기(記) / 백동서당을 중건하고 쓴 기문〔柏洞書堂重建記〕
도산의 동쪽에 백지산(柏枝山)이 있다. 옛날에 관백(官柏)이 있었기 때문에 산의 이름을 이렇게 붙인 것이다. 이 산에 퇴계 선조의 비위(妣位)이신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묘와 산성 선조(山城先祖)의 묘가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10대조 첨정 부군(僉正府君)이 일찍이 이 산 아래에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지어 제향을 올리고 강학을 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일의 전말이 부군의 외손인 김경재(金敬齋) 공의 시와 서문에 상세히 실려 있다.
또 살펴보건대 정지헌(鄭芝軒) 공이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으로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집경전에 모셔진 태조의 수용(晬容)을 이 서당에 이봉하였고, 북애(北崖) 김공(金公)과 손엽(孫曄) 공이 모두 여기에서 번갈아 숙직하였다. 그리고 〈월천선생연보(月川先生年譜)〉에도 정유년(1597, 선조30)의 지환(祇還) 절차가 분명하게 실려 있다. 기이하도다. 부군께서 일찍이 집경전의 재랑(齋郞)을 지내셨는데, 태조의 수용이 잠시 부군께서 세운 서당에 봉안되었으니, 이는 백세(百世)의 풍운(風雲)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묵묵히 감응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백동서당이 창건되고 폐추(廢墜)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제향을 올렸다고 한 것이 만약 퇴계 선조의 비위인 권씨의 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퇴계 선조께서 당시까지 오히려 덕을 지니고 살아 계셨으니, 주자가 건양(建陽)의 당석산(唐石山) 대림곡(大林谷)에 유씨(劉氏)를 안장하고 그곳에 순녕암(順寧庵)을 지어 제사를 지냈던 사실이 《주자대전》에 실려 있는 것처럼 백동서원의 건립 전말이 퇴계 선조의 유집에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백동서당이 창건된 것은 아마 신미년(1571, 선조4)에 퇴계 선조를 예장(禮葬)한 뒤의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또 1세, 2세를 거쳐 임진왜란을 만나고도 오히려 폐추되지 않고 보존되었으니, 태평무사한 시절에 폐추된 것이 어찌 후손으로서 죄송스러워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제향을 올리는 것은 곧 영령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존모의 뜻을 펴는 것이고, 독서를 하는 것은 선친의 가르침을 받아 시례(詩禮)의 가학을 독실하게 계승하는 것임에랴. 첨정 부군의 유사(遺事) 가운데 이 한 가지 전말이 빠진 것이 어찌 후손이 뒷날에 한스러워할 바가 아니겠는가.
불초는 삼가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백동에 다시 서당을 세우고자 하였지만 옛터가 있던 자리를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백지산 서쪽에 서당골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곧 산후서당(山後書堂)의 옛터이고, 산후서당이 곧 백동서당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은 듯하였다. ‘산후’라는 이름은 퇴계 선조의 시어에 처음 나오는데, 그 서당이 만약 우리 가문에서 만든 것이라면 하필 ‘산후’라는 본명을 버리고 별도로 ‘백동’이라 명명하였겠는가.
또 산후서당 자리는 한쪽 기슭에 외떨어져 있어 묘소에서 먼 곳이고 보면 제향을 올린다는 말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연세 높은 어른께 듣건대 산후서당은 기곡(基谷 텃골) 박씨(朴氏) 집안에서 세운 것인데, 박씨들이 떠나고 난 뒤 서당 역시 폐추되었다고 한다. 정말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을 백동서당 자리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는 안 될 듯하다.
백지산의 중간에 번덕동(樊德洞)이라는 곳이 있다. 자리는 훤하고 형세는 험준하며, 마루는 평평하고 지대는 높직하여, 김경재 공의 시에서 ‘누대가 청량산을 마주 보고 있네.[樓對淸凉]’라고 묘사한 구절과 대략 흡사하였다. 이 때문에 여기에 2칸의 집을 지었으니, 남쪽은 방이고 북쪽은 당(堂)이다. 서쪽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장차 고조와 증조의 체천위(遞遷位) 신주를 봉안하려고 하였고, 산의 남쪽에는 임시로 선비(先妣)의 묘를 부장(祔葬)하였다.
서리와 눈이 내려 쌀쌀한 즈음에 산속에서 지내며 실낱같은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내 모습을 돌아보건대 만물을 생성해 주는 천지의 은혜가 아님이 없다. 나의 계책은 불보(不報)의 보답에 마음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로부터 세상사를 단념하고 출입을 단절하여 이른바 제향과 강학에 있어 바라건대 우리 부군의 처신을 본받아 여생을 마친다면 아마 이 일대의 모든 산천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시경》 〈방락(訪落)〉에 “뜨락에 오르내리며, 집안에 오르내림을 계승하는도다. 훌륭하신 황고여! 그를 본받아 나의 몸을 보전할지어다.[紹庭上下 陟降厥家 休矣皇考 以保明其身]”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만도가 오늘날 품은 뜻이다.
[주-D001] 퇴계 …… 안동 권씨(安東權氏) : 퇴계 이황의 계배(繼配)로 권질(權礩)의 딸이다. 21세에 맞은 허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1530년(중종25) 30세의 나이로 권씨 부인을 맞았다. 권질의 자는 사안(士安)이다. 기묘사화의 여파로 1521년 예안으로 유배를 왔다가 그 인연으로 이황의 장인이 되었다.[주-D002] 첨정 부군(僉正府君) : 이황의 맏아들 이준(李寯, 1523~1583)으로 자는 정수(廷秀)이다.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을 거쳐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69년(선조2) 연로한 어버이를 위해 향리에서 가까운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578년 군기시 첨정에 제수되었다.[주-D003] 백동서당(柏洞書堂) : 이준이 세운 서당이다. 이후 어느 때인가 무너진 것을 향산이 벼슬에서 물러나 중건하고, 이곳에서 자정(自靖)하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번덕골의 작은 골짜기에 있는 하계정(霞溪亭)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산중에 있다.[주-D004] 김경재(金敬齋) : 이준의 외손 김시정(金是楨, 1579~1623)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간(公幹), 경재는 호이다. 1609년(광해군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귀향하였다. 저서로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주-D005] 정지헌(鄭芝軒) …… 이봉하였고 : 정지헌은 이황의 제자 정사성(鄭士誠, 1545~1607)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명(子明), 지헌은 호이다. 와룡면 태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배웠으며, 뒤에 이황의 문인이 되었다. 저서로 《지헌집》이 있다. 1591년(선조24) 경주(慶州)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된 정사성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와 부산이 함락되고 왜적이 경주로 북상하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그린 영정(影幀)을 모시고 4월부터 7월까지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험준한 산간 지역을 골라 숨어 다녔다. 당시에 예안으로 왔을 때 백동서당에 어진을 모셨던 것이다.[주-D006] 북애(北崖) 김공(金公) : 김기(金圻, 1547~1603)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지숙(止叔), 북애는 호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도산서당 암서헌(巖栖軒)에서 수업을 받아 성리학을 탐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종제인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와 의병을 일으켰다. 저서로 《북애집》이 있다. 태조의 어진이 백동서당에 봉안되어 있을 때 정사성과 함께 수호하였다.[주-D007] 손엽(孫曄) : 1544~1600.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문백(文伯), 호는 청허재(淸虛齋)이다. 1558년(명종13) ‘신라옥적(新羅玉笛)’이란 제목으로, 경주에 특별히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실시한 시험에서 발탁되었다. 조호익(曺好益), 이정(李楨), 구봉령(具鳳齡) 등과 교유하였고, 태조의 어진(御眞)을 백동서당에 모시고 수호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문묘에 모신 성현의 위패를 금곡사(金谷寺)에 모셔 놓고 가족을 이끌고 죽장산(竹長山)에 들어갔다. 저서로 《청허재집》이 있다.[주-D008]
월천선생연보(月川先生年譜)에도 …… 있다 : 월천은 이황의 제자 조목(趙穆, 1524~1606)이다. 《월천집》 권1 〈연보〉 정유년(1597) 조에 “9월에 예안 지역의 인사들과 태조대왕의 어용(御容)에 숙배하였다. 당시에 태조의 어용이 왜란으로 인해 경주에서 예안현의 동쪽 백동서당에 옮겨 봉안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조정에서 예관을 파견하여 강릉으로 모셔 옮겨 갔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09] 백세(百世)의 …… 아니겠는가 : 태조와 이준은 수백 년 세월을 격한 군신간이지만, 이준이 집경전 참봉으로서 어진을 모신 적이 있기 때문에 저승에서도 암암리에 서로 감통하는 바가 있어 이런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풍운(風雲)은 풍운제회(風雲際會)의 준말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風從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10] 시례(詩禮)의 가학 : 아들 리(鯉)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자 공자가 “시를 읽었느냐?”라고 물으니 리가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하기에 공자가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라고 일러 주고, 또 “예를 배웠느냐?”라고 묻자 리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하기에 공자가 “예를 배우지 않으면 행동을 할 수 없다.[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曰學禮乎 對曰未也 不學禮 無以立]”라고 하였다. 《論語 季氏》[주-D011] 산후라는 …… 나오는데 : 이황이 “바위 벼랑에 꽃은 피고 봄빛은 적적하며, 시내 숲에 새는 우짖고 물은 졸졸 흐르네, 우연히 산 뒤편 서당에서 제자들을 대동하고, 한가로이 산 앞에서 고반을 찾아보네.[花發巖崖春寂寂 鳥鳴磵樹水潺潺 偶從山後携童冠 閒到前山看考槃]”라고 읊은 시를 가리킨다. 《退溪集 卷3 步自溪上踰山至書堂》[주-D012] 김경재 …… 흡사하였다 : 김시정의 시 〈백동서당(柏洞書堂)〉은 칠언율시인데 본문에 나오는 시구가 포함된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동서당이 푸른 산중에 있으니, 선인께서 심혈 기울여 창건하신 것일세. 길은 개울 따라 나 있어 물소리 부서지고, 누대는 청량산 마주하여 날아갈 듯하네.[柏洞書堂在翠微 先人創構費心機 路緣溪澗聲如碎 樓對淸凉勢欲飛]” 《敬齋遺稿 卷1 柏洞書堂》[주-D013] 만물을 …… 없었다 : ‘만물을 생성해 주는 천지의 은혜’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임금의 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문구이다. ‘불보(不報)의 보답’이란 갚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갚는다는 말이다. 《능엄경요해(楞嚴經要解)》에 “이 몸과 마음으로 티끌같이 무수한 세계를 받드는 것을 부처의 은혜를 갚는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주희가 이 구절을 인용하여 ‘불보지보(不報之報)’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살려 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음으로써 진정으로 보답하는 길’이라는 뜻으로 표현한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규필 (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