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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개입한 중공군과 한국군 제6사단의 궤멸
가끔씩 내가 쓴 글 보면서 중공군이 약하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가는 양반들이 있는데 그건 일단 전혀 아님. 중공군은 한국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고, 그것을 극복하는데에는 미군의 훈련 전수와 물자지원은 막대하게 소요했음.
우선 한국전 초기 개입한 중공군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야할 것임. 1950년 7월 기준으로 중공군은 약 5,138,756명으로 집계되었고 이들은 250여 개의 사단에 소속된 거대한 군대였음.
2개의 집단군과 4개의 야전군으로 구성된 중공군은 실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이 절반 정도였다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전력임.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전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준비하던 제3야전군 예하 72개 사단을 한국에 투입할 준비를 했음. 사실 빼올 만한 병력도 여기 밖에 없었는데, 제1야전군 예하 34개 사단은 신장 위구르 일대를 평정하고, 제2야전군의 49개 사단은 티베트 침공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
거기에 제4야전군은 중국 남해안에서 59개 사단을 거느리고 국민당군 게릴라들을 상대하느라 실질적으로 뺄 수 있는 병력이 대만 침공을 위해 아껴두던 제3야전군 예하 72개 사단들이었던 셈임.
7월 13일 중공은 개입을 준비하며 제38군, 제39군, 제40군, 제42군 예하 25만의 병력을 선정했고 7월 말까지 이들은 중국의 북동부로 이동을 완료했음.
물론 중공군이라고 모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던 것은 아님. 겉모습은 거대하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정예병들로 가득한 것으로 보였으나, 장비와 훈련도 부족 문제에 대해서 중공군 사령부는 큰 우려를 나타냄.
가장 큰 문제는 각 부대마다 전투력이 상이했다는 점임. 각 부대가 보유한 장비가 일제인지 미제인지 파악도 잘 안됬고, 한국전 개입즈음에는 표준화된 조직을 기반으로 한 군수보급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챔.
이 때문에 중공군 각 군들은 전투력 평준화를 위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교환했는데, 한 예시로 제38군이 가진 미제 장비들을 제40군이 가진 일제 장비들과 교체하는 방식이 이루어짐.
탄약과 장비 부족 역시 중공군을 괴롭혔는데, 개입 당시 14,100톤의 탄약이 필요하지만 중공군이 생산 가능한 탄약은 1,500톤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잇따랐고, 전투병력에 비해 지원병력이 턱없이 모자란 것 역시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음.
특히 군수지원 분야에 있어서 중공군의 약점은 여실없이 드러났음. 인력이 장기인 중공군은 지원병력 구성에서는 인력난에 시달렸는데 최초 약 1,000여 명의 차량운전병 및 의료진을 필요로 했으나, 이 숫자는 점점 늘어났음.
전쟁 개입 당시 중공군 군수사령관인 Hong Xuezhi는 군수지원을 위해 필요한 인력의 54%가 아직도 편제되지 못했다고 했고, 그 숫자는 관리 장교 1,560명이라는 상당한 것이었음. 군수지원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중공군 내에서도 제대로 개념 정립이 안됬을 가능성이 큼.
그럼에도 중공군의 초기 공세는 연합군에게 엄청난 비극을 안겨주는데 충분했음. 한 예시로 한국군 제6사단의 궤멸은 중공군의 정예부대가 극단적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보여줌.
마오는 중공군에게 비교적 빈약한 한국군을 집중 타격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온정에서 50년 10월 28일, 6사단 전연부대인 제7연대를 중공군이 완전히 포위했음. 당시만 해도 6사단은 나름 정예병력들이 잘 온존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던 부대여서 어느정도 견뎌낼거라고 판단하기도 했고.
하지만 예상을 깨고 단 하루만에 6사단은 예하 7개 보병대대를 상실하며 완전히 부대 편제가 파괴 직전까지 몰렸음. 7연대와 함께 19연대도 치명타를 입었고, 사단 예비였던 2연대만이 1개 대대 전력을 온존해서 철수하는데 성공함.
미군은 6사단이 10월 28일 기준으로 단 1개 대대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했으며, 7연대는 연대 총원 3,552명 중 2,677명의 손실을 입었다고 기록을 남길 정도로 6사단은 철저하게 파괴당함.
그나마 피해를 억제할 수 있던 것은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덕분이었는데, 6사단이 중공군에게 맹공을 당할 무렵 밀번 제1군단장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투부대들을 내보내려했음.
불행 중 다행으로 이를 막은 것이 당시 한국군 1사단장이던 백선엽이었음. 그는 중공군이 1군단을 낚아채기 위해 거대한 함정을 파두었다며 구출 작전을 재고하자고 했고, 결국 1군단이 이를 포기함으로서 그나마 피해가 덜할 수 있었음.
1군단이 이를 무시하고 만약 6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중공군의 포위망 안으로 걸려들었다면 정말 끔찍한 손실을 봤을 가능성이 높을 정도로 예상치 못한 기동성과 전투능력을 갖췄던 것이 당대의 중공군이었음.
대만 침공을 위해 아낀 정예부대들이 한국전으로 파견을 온 셈이니. 참고로 6사단은 청천강 철수 작전 때 와해당한 부대를 어찌저찌 집결시키기는 했는데, 집중 타격을 받은 7연대는 1,900명만이 재집결에 성공할 정도였다고 언급됨.
중공군의 1차 공세 당시 연합군은 하루에 1개 연대씩 소멸당하고 있다며 비명을 질렀고, 엄청난 물자를 손실하며 완전히 밀렸음.
11월 30일부터 12월 1일까지 단 2일 동안 미8군이 상실한 병력이 11,000명에 달했고, 미 제2사단은 6,380여명의 인명손실을 냈고, 터키 여단은 총 5,000여 명의 병력 중 1,000여 명을 잃었다고 보고됬으니.
미8군과 제10군단이 한국에 배치한 병력이 총 11만명 정도였으니 10% 이상의 손실을 단 2일만에 발생했으니 말 다한 것.
물론 중공군의 손실도 상당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북한 전역을 20만 연합군 상대로 쫓아낸 것에 비하면 감당 가능한 손실 수치였고.
이는 중공군에 대한 연합군의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으로까지 이어졌으니 이들의 전투력은 정말 강했다, 라고 볼 수 밖에 없었음. 대만 침공을 위해 준비한 제3야전군의 정예병들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전력도 아니었고.
이를 극복하게 된 것은 51년 5월 이후에나 가능했음. 화력전을 위시로 중공군이 감당 가능한 손실 수치를 넘어서는 계산서를 받도록 강요하고, 수적 주력인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다달은 한국군을 재조직하여 중공군의 제파에 맞설 수 있는 카운터를 육성하는 것.
이것이 중공군에게 맞서는 연합군의 방책이었다고 보면 됨. 분대 구성에서도 미군은 중공군과 맞붙어본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을 정도로 충격 자체는 엄청났고. 2대전 직후에 9인 분대로 줄였다가 한국전 교훈 따라서 12인 분대로 늘어났다는거 보면.
이렇듯 중공군은 결코 무시할 수도, 무시해서도 안되는 존재였던 셈임. 25만의 정예병으로 비슷한 수의 연합군을 단시간 내로 쫓아낸 것 자체는 상당한 전과였으니까.
그래서 중공군에 제대로 맞서기 시작했던 한국군의 전력 강화가 중요했던 것임. 특히 중공군 내에서도 정예부대로 손꼽히는 제38군과 정면대결해서 이겨낸 백마고지의 제9보병사단이 엄청났던 것이고.
출처
Chinese intervention in the Korean War, Harry Martin Crocker
GREAT EXPECTATIONS: THE U.S. ARMY X CORPS IN KOREA, SEPTEMBER-NOVEMBER 1950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50-1951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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