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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淸 三梅
경남 산청군은 서쪽에 솟은 천왕봉(1,915m)을 시작으로 하는 지리산의 줄기가 남북으로 뻗어, 북으로는
백운산의 지봉인 황매산(1,108m)과 송의산(539m)이 있고, 중앙에는 웅석봉(1,099m)과 둔철산(812m)이
자리한다. 이들 산 사이를 남강의 지류가 흐르면서 계곡 양안에 좁은 평야를 이룬다.
문익점 선생의 목화시배지가 있고, 그를 모신 도천서원이 있다. 성철 스님의 생가가 있으며,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터와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전형적인 양반마을인 남사리문화예술촌은
지금도 옛 가옥의 모습으로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 몇백 년의 수령을 지니고 역사를 말 없이 지켜 본 산청 삼매(山淸三梅)가 있으니
원정공 하즙(元正公 河楫)이 살던 집에 심은 원정매(元正梅),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산천재에 심은 남명매(南冥梅),
통정공 강회백(通亭公 姜淮伯)이 단속사에 심은 정당매(政堂梅) 가 그것이다.
(1) 남사마을 원정매(元正梅)
남사마을의 원정매는 고려조 문신인 원정공 하즙河楫(1303~1380)이 심은 매화로
수령 670년 안팎으로 삼청삼매 중 가장 오래 됐다
늙은 나무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채 고사하여 등걸만 남았고
죽지 않은 뿌리가 새 순을, 살아 생전에 남긴 씨앗이 새 싹을 틔워 대를 이어가고 있다.
산청 삼매 중 꽃빛이 가장 아름답다.
원정공 영매시 元正公 詠梅詩
사북증재독수매 舍北曾栽獨樹梅 집 양지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납천방염위오개 臘天芳艶爲吾開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명창독이분향좌 明窓讀易焚香坐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미유진애일점래 未有塵埃一點來 한 점 티끌(번뇌)도 오는 것이 없어라
* 원정매(일명: 분양매) - 자료 ; 산청군청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은 약 500여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양식을 갖춘 고택이 여러 채 있고
오래된 마을답게 회나무의 고목이 여러 그루 솟아 있다. 이 마을에는 매화의 고목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이 마을의 고택 중 하나로 진양 하씨가 32대 째 살아온 ‘분양고가汾陽古家’가 있다. 이 집은
원정공(의를 행하여 백성을 기쁘게 함이 ‘元’이요, 정의로써 남을 복종케 함이 ‘正’이라는 뜻) 하즙河楫(1303~1380)이
살던 집이다. 그는 21세 때인 1324년에 진사를 거쳐 문과의 갑과에 3등급으로 급제하여 경주부윤과 문화찬성사를 거쳐
수충좌리공신중대광보국숭록대부진천부원군에 이르렀다.
분양고가(汾陽古家)는 동학란 때 소실되고 지금 있는 집은 31대손 하철이 지은 집이다.
나무가 있는 집의 당호인 분양고가(汾陽古家)를 따서 분양매(汾陽梅)라고도 하고,
심은 사람 하즙(河楫)의 시호(諡號)를 붙여 “원정매(元正梅)라고도 부른다.
분양고가(汾陽古家)의 열두 대문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동학란 때 소실되었지만,
석파 노인(石坡老人-대원군) 낙관이 뚜렷한 '원정구려(元正舊廬-원정공이 살던 옛집) 현판이
이 집의 권위를 대변하듯 걸려있다.
(2) 산천재 남명매 (南冥梅)
남명매는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두를 이루던 호남학파의 수장 남명 조식曺植(1501~1572)선생이
61세이던 1561년(명종 16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뜰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로
선생의 호를 따서 '남명매南冥梅'라 부른다. 수령은 450여 년
평생 벼슬과 담을 쌓았던 남명 선생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산청군 덕산에
산천재를 세우면서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고 벗을 삼았다
남명 선생은 명종과 선조에게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단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백성을 사랑하고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올바른 이야기를 할 정도로 강직했던
주인의 성품처럼, 남명매는 그 피어있는 모습 또한 심은 사람을 닮은 듯 강직해 보인다.
산천재에서 바라보이는 지리산 천왕봉
남명 선생은 하늘 한 모퉁이를 더받치고 어엿이 서있는 천왕봉을 사랑하셨고,
자신의 삶 또한 그러하기를 원하셨다. 천왕봉의 눈이 녹고 덕천 강물이 봄소식을 풀어낼 때쯤
남명매는 꽃망울을 연다.
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高聲讀帝堯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남명이 지은 '우연을 읊다(偶吟)'라는 시다. 매화를 심은 지 10여 년만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아마도 이 시를 지을 때는 매화나무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선생과 함께하던 매화나무는,
450년 세월을 묵묵히 천왕봉을 바라보며 산천재를 지키고 있다.
* 남명매 자료 - 산청군청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두를 이루던 호남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주역》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었다. 그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를
몹시 사랑했다. 매화나무에 붙였던 그의 애정을 다음 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설매雪梅- 조식曺植
세만견거난독립 歲晩見渠難獨立 엄동에 너를 보니 차마 뜰 수 없어
설침잔야도천명 雪侵殘夜到天明 눈 내린 남은 밤을 하얗게 새웠구나
유거구시고한심 儒家久是孤寒甚 선비 집 가난이야 오래된 일이지만
갱이귀래갱득청 更爾歸來更得淸 네 다시 찾아와 주어 다시 맑음 얻었네라
(3)단속사지 정당매(政堂梅)
단성면 운리의 단속사 절터에 뿌리를 내린 정당매政堂梅의 수령은 640여 년.
여말선초의 문신인 통정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 어릴 적 수학하던 단속사에 심었다고 전한다.
훗날 그의 벼슬이 정당에까지 오르자 붙인 이름이다.
정당매는 원래 4개의 줄기 였던 것이 3개의 줄기는 고사하고 1개의 줄기 밑둥치에서 나온 곁가지가
씩씩하게 자라 아쉬운대로 고매의 운치를 이어가고 있다. 경남도지정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신라의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는 단속사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왜적의 방화로 불탔다. 지금은 당간지주와 2기의 석탑만 남아 쓸쓸함을 더한다.
매화를 아끼고 사랑하며 매화가 상징하는 지조를 닮고 싶어했던 젊은 날의 강희백은,
고려 조정에서 종2품에 해당되는 높은 벼슬을 했고 고려가 망한 후 조선에서도 관직을 얻었다.
정당매는 남명이 살아생전에 이미 수령이 무려 200년 가까이 된다. 매화로서의 기품을 짐작할 수 있지만
강직한 남명에게는 나무를 심은 주인이 못마땅하였다. 강회백은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를 섬겼기 때문이다.
그는 우왕, 공양왕, 이태조 3명의 임금을 섬겼다. 지조를 잃은 인물이 매화를 심었으니
명과 실이 어긋나지 않는가. 그래서 남명은 이런 시를 남겼다.
단속사 정당매(斷俗寺政堂梅) -남명 조식-
寺破僧嬴山不古 절은 부서지고 중은 파리하고 뫼는 옛 산이 아니로다
前王自是未堪家 전 왕조는 왕가의 신하에게 절의를 단속하지 못하였는데
化工正誤寒梅事 조물주마저 한매(寒梅)의 지조를 그르쳤다네
昨日開花今日花 어제도 꽃이 피더니 오늘도 꽃이 피지 않는가
강회백(姜淮伯)의 문집인 [통정집(通亭集)] 권1에는
그가 젊은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때 손수 심은 매화를 찾아가 읊었다는
<단속사(斷俗寺)에서 손수 심은 매화를 보며>라는 7언 절구 2수가 실려 있다.
-1-
우연환방고산래 偶然還訪故山來 우연히 옛 동산에 다시 오르니
포원청향일수매 蒲院淸香一樹梅 뜰 가득 맑은 향기 한 그루 매화에서 나네.
물성야능지구의 物性也能知舊意 매화는 옛 사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은근경향설중매 慇懃更向雪中梅 은근히 바라보며 눈 속에 피어 있네.
-2-
일기순환왕복래 一氣循環往復來 천지기운 돌고돌아 오고 가나니
천심가견납전매 天心可見臘前梅 천심(天心)을 매화에게서 볼 수 있네.
자장은정조갱실 自將殷鼎調羹實 다만 솥을 가지고 매화 열매 조리할 것인데
만향산중낙우개 만向山中落又開 부질없이 산 속을 향해 지었다 또 피네.
* 정당매 - 자료 ; 산청군청-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줄기가 힘차께 뻗어 내려오다가 멈춘 옥녀봉 아래 남향으로 자리한
단속사 절터에는 동.서의 삼층석탑과 주춧돌이 어지러이 놓인 가운데 매화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매화나무로서는 수령이 가장 오래된 정당매(政堂梅)이다.
인재 강희안(1419~1464)의《양화소록(養花小錄에)》에 보면 우리 선조 통정공께서 소년시절에 지리산 단속사에서
글공부를 하실 때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뜰 앞에 심어놓고, 시 한 수를 읊었다고 씌여 있다.(위 2번째 詩)
여기서 인재가 말하는 선조는 고려 말기의 문신인 통정(通亭) 강회백(1357~1402)으로 우왕2년(137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점점 높아져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성과 문하성의 종2품 벼슬)겸 대사헌에 이르렀다.
공양왕 4년(1392) 정몽주가 살해된 뒤 진양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태조 7년(1398)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다. 그는 경남 산청 출신으로 강희안(姜希顔)의 조부이다,
그후 통정 강회백의 증손(曾孫)되는 강윤범(姜允範)이 문종 때 경상감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증조부가 심어 놓은 정당매를 찾아와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觀梅 追慕 那時栽 매화를 보고 심은 때를 헤아려 추모하도다
獨守 春光 任自開 홀로 봄 빛을 받아 스스로 피어 났네,
風雨 多年 無恙否 오랜 세월 비 바람 속에 평안이 있었구나
漢陽 千里 有人來 한양 천리 먼 길을 너를 보러 왔노라.
첫댓글 2009년에 작성하여 내블로그에 저장하였던 것을 옮겨와 내용을 수정보완하여 올림니다.
매화가 6년 전의 모습(사진)이라 요즘과는 얼마간 다를겝니다.
선생님! 글 감사합니다. 몸도 편치 않으신데.... 어째 어지러우시다면서 잘 내려가셨는지요? 늦게까지 글 올려주셔서 잘 읽고 갑니다. ...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채선후 합장^*^
채선후 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몸이 좋지않아 끝까지 있지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매화꽃 찾아 다니던 때가 그리워지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