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지(裵松之)의 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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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의 <삼국지>는 모든 역사적 사실이 포함되어 있는것은 아니다. 집필할 당시에 제외해버린 사료중에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힘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 기록은 점차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지고 소멸되었는데 실제로 많은것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다행스러운것은 그중 어떤것은 진수의 <삼국지>에 붙은 주(註)에 채록되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삼국지>에 주를 붙인 이는, 진수보다 150년정도 늦게 태어난 배송지(裵松之, 372-451)이다. 그의 아들 배인이 사마천의 <사기>에 주석을 달고(사기집해), 증손자인 배자야가 남조 송나라때 역사서인 <송략>을 짓는 등 대대로 역사가 집안을 형성했다.
배송지는 200여종의 문헌에서 <삼국지>에 관한 기사(記事)를 모아 진수의 책에 주를 달았다. 그 중에는 어태의 <위략>처럼 진수가 많이 참고한 것도 있고, 적국인 위나라의 조조를 폄하하기 위해 오나라 사람이 지은 <조만전(曹瞞傳)> 같은것도 있다. 조조의 어릴때 이름은 아만(阿瞞) 이었는데, 여기서 '만'은 '거짓말쟁이', '속이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밖에도 당시에 수많은 별전(別傳), 이전(異傳)류가 지어져 개인의 전기를 남겼는데, 이들은 배송지의 주에 일부나마 남겨져 후세에 전해졌고, 나아가 소설 <삼국지연의>를 낳은, 말하자면 효모같은 역할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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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는 어떤 소설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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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의 작자는 나관중(羅貫中)이다. 그에 대해서는 원말(14세기)에 활약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삼국지연의> 외에도 <수당양조사전>, <잔당오대사연의>, <평요전> 등의 작품도 남겼고 <수호전> 제작에도 관계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는 14세기에 이르러 갑작스레 성립된것이 아니고 성립에 이르기까지는 기나긴 전사(前史)를 가진다.
나관중은 희곡작가이기도 했는데, 원대(元代)는 중국 희곡사에서 보자면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고 중국 희곡의 초창기였다. 원나라 때의 희곡을 '원곡(元曲)'이라 부르는데, '원곡'에는 역사에서 제재를 따온 작품들이 많고 그 중에는 삼국시대에서 취한것도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연환계(連環計)>, <격장투지(隔江鬪智)> 등이 있고, 표제만 남아있는 것으로는 <관대왕 단도회(關大王單刀會)>, <칠성단 공명 제풍(七星壇孔明祭風)> 등이 있다. 또한 이들 <삼국지>류의 표제 중에는 <제갈량 박망소둔(諸葛亮博望小屯)>, <제갈량추풍오장원(諸葛亮秋風五丈原)>, <관운장 천리 독행(關雲長千里獨行)> 등 <삼국지연의>의 회(回) 제목과 같은것도 있다. 원곡의 표제와 <삼국지연의>의 회의 제목이 같다는것은 <삼국지연의>가 원곡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시대에서 제재를 취한 소설로서 <삼국지연의>보다 오래된 것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인데, 이것이 소설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 역시 원나라 때인 지치(至治) 연간(1321-1323)에 간행되었다. '전상'이란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 책은 모두 상하 2단으로 나누어져 상단에는 그림, 하단에는 글자라를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 '평화'란 이야기 책으로, 강담(講談)의 일종이다. 이야기꾼이 그 스승으로부터 구전되어 온 것을 문자로 옮겨 쓰고 삽화를 넣어 출간했을 것이다. 그래서 문자에는 음만 빌려서 대상을 나타내는 차자(借字)가 많고 속어도 섞여 있어서 대단히 읽기 힘들다. 원나라 초기에는 오대사평화(五代史平話)도 출판된 거슬 보면 이것은 일종의 유행이었던 듯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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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評話), 원곡(元曲) & 삼국지연의와 전상삼국지평화의 다른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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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삼국지평화>는 후한 말부터 공명의 죽음까지가 중심이고, 진(晋)나라에 의한 통일이 덧붙여져 있어서 <삼국지연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삼국지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유명한 장면이 대체로 수록되어 있지만, 양으로 따지자면 <전상삼국지평화>는 <삼국지연의>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두가지 매우 상이한 점이 있다.
첫번째는 발단 부분이다. <전상삼국지평화>에서는 사마중상이라는 이가 나와, 꿈속에서 저승에 가 재판을 한다. 원고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신하이자 한 건국후 황후 여씨에게서 미움을 받아 비명에 죽은 한신, 팽월, 영포이고, 피고는 물론 유방의 여후이다. 그리고 재판 결과 한신은 조조, 팽월은 유비, 영포는 손권, 유방은 헌제, 여후는 복황후로 각각 변신하게 되고 조조 즉 한신등이 천하를 나눠 가지는 것이다. 또한 사마중상도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소송을 해결한 공로로 사마의(사마중달)로 다시 태어난다는 줄거리로 되어있다.
두번째는 결말 부분이다. 촉이 망한 뒤 후후 유선의 외손인 유연이 북쪽으로 도주, 병사를 일으켜 사마씨의 진나라를 멸하고 한나라의 원수를 무찌른다는 부분이 하나 덧붙여져 있다. 서진이 4세기에 들어서서 영가의 난에 의해 멸망하는 것, 그리고 흉노인 유연이 전조를 세우는 것 등은 사실이지만 유연이 유선의 외손이라는 것은 실로 '이야기꾼의 말 같은 거짓말'인 것이다.
이처럼 역사 사실과는 다르지만 여기서 든 두가지점은 복수사상과 인과응보, 전생이라는 불교적 사상으로 <전상삼국지평화>가 성립될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전상삼국지평화>와 '원곡'의 관계는 어떠한가? 원곡의 내용은 대체로 <전상삼국지평화>와 같고 인명의 차자 같은 세부적인 것까지도 양자가 일치하고 있으므로 <전상삼국지평화> 이외에 다른것을 원곡의 원전으로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전상삼국지평화>는 <삼국지연의>의 원래 모습이고 그 <전상삼국지평화>는 이야기꾼이 바탕으로 삼은 책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인데, 그 잔영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삼국지연의>가 '제47회, 감택은 은밀히 거짓 항복서를 바치고, 방통은 교묘하게 연환계를 전달하다', '제48회, 장강에서 연회를 연 조조는 시까지 읊으며 전함을 이어 북군, 무위를 떨치다', '제49회, 칠성단에서 제갈공명은 바람을 기원하고, 삼강구에서 주유는 불을 놓다'라고 되어 있듯이 횟수를 헤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한 단원씩 끊어서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지연의>의 각 회는 반드시 '과연 주유의 목숨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다음회에 듣기 바란다'라는 식으로 끝난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삼국지연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즉 <삼국지연의>는 산문으로 씌어졌지만 군데군데 시(詩)나 사(詞)가 끼워져 있다. 전쟁의 양상을 서술하거나 대장이 씩씩하게 등장하거나 미녀가 나타날때에 시나 사를 끼워넣는 수법을 취하고 있다.
동탁이 초선의 고운 얼굴에 눈길을 멈추고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왕윤은 '가희 초선이라 하옵니다'라고 답했다. 동탁이 '노래를 부를수 있다고? 어디 보자'라고 말해서 왕윤은 명을 내려 박자목(拍子木)을 치게하며 초선의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빨간점을 찍은 앵두같은 입술이여, 노래와 박자가 어우러져 봄빛을 뿜는구나. 향기로운 혀끝은 강철 같은 칼을 토해 나라 망치는 간신을 한칼에 베려 하네.
동탁은 초선의 노래를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에 빛깔을 집어넣기 위해 시나 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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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설화의 유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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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강담(講談)은 언제부터 성행하고 강담속에서 '삼국지' 이야기는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중국에서는 당(唐) 말, 8-9세기경부터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상업의 형태도 변화했다. 그때까지는 특정구역에서 정해진 날에 시장이 열렸지만, 점차로 자유로운 무역이 등장하고 지방에도 상업도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시장에는 서민을 위한 오락센터도 출현하게 된다.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의 번화한 모습을 적은 맹원로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와자(瓦子)라는 연예쟁이들이 모인 곳이 있어서 인형극, 곡예, 씨름, 그림자놀이 등등 여러가지 예능이 행해지고 인기높은 유행가 가수 등도 나왔다고 씌어있다. 이 예능중에 '설화'라는 것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것은 현재의 강담에 해당되는 것으로, 설화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은 '설화인'이라 불렀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능숙하게 다루는 이러저러한 레퍼토리들이 있었는데, <설삼분(說三分)>, <설오대사(說五代史)> 같은 명칭이 예거되고 있다. 그리고 <설삼분>이야말로 천하삼분의 시대를 제재로 한 것으로 <전상삼국지평화>의 뿌리격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면 <설삼분>이란 어떤 이야깃거리를 도마에 올린 것이었을까? 구체적으로 알기 힘들다. 그러나 소동파가 지은 <동파지림(東坡志林)>을 보면, 지인인 왕팽당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저잣거리에서는 어린애가 칭얼거려 집안 사람이 곤란해지면 돈을 주어 이야기를 들으러 가게한다. 삼국시대 이야기에 이르러 유현덕이 패하는 것을 들으면 자꾸만 눈을 찡그리며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고, 조조가 지는 것을 들으면 좋아서 쾌재를 부르기도 한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군자와 소인의 자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라 하고 있다.
소동파는 11세기 후반 사람이므로 이즈음에는 떼쓰는 어린애까지도 유비를 동정하고 조조를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유비는 착한 사람이고 조조는 나쁜놈이라는 <삼국지연의>와 같은 유형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글 속에서도 유비는 유현덕으로 불리고 있는데 조조는 조조라고 본명 그대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이들 둘을 얼마나 다른 감정으로 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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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류는 당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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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의 '설화' 등 대중 예능의 원류는 당대 현종때(8세기)부터 불교사원에서 행해진 설교의 한 형식인 '경변(經變)'에 있다고 한다. 불교 경전의 내용을 일반 신자가 알기 쉽도록 설명하려고 고안해 낸것으로 그림을 그려서 그 그림을 통해 설명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상삼국지평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경변'이 경전을 떠나 역사나 고사를 다루게 되자 '속강(俗講)'이 되고 이것을 문장으로 옮긴것이 '변문(變文)'인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돈황에서 당대의 변문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변문중에는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흉노에게 넘겨진 비운의 여성 왕소군(王昭君)의 이야기 등은 있지만 삼국지를 원재료로 한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당대에는 따로 소설도 있었지만, 여기서도 역시 삼국지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지적되었듯이 9세기에는 <삼국지연의>의 원류로 생각되는 두가지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단성식이 지은 <유양잡조(酉陽雜俎)> 속에 있는 것으로, 태화 말년(835년경) 그의 동생 생일에 잡희(雜戱: 대중 예능)를 보았고, 이 잡희 속에 시중의 소설이 끼여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소설이란 설화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삼국지류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른 하나는, 당말의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이 자신의 아이를 노래한 <교아시(驕兒詩)>이다. 그런데 이 시의 일절에는 '장비의 수염에 깔깔대고 등애의 말더듬음에 깔깔대는구나'라고 되어 있다. 장비와 등애가 모두 <삼국지>의 영웅호걸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등애가 말더듬이였다는 것은 정사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반면 장비가 털북숭이였다는 것은 정사에는 보이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비의 용모를 '제비턱에 호랑이 수염'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비가 털북숭이라는 이야기는 적어도 9세기에 정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