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내가 움찔했다. 2월 정기산행으로 간 운탄고도 중간, 이제 막 백두대간의 산그리메가 펼쳐질 즈음에 일행은 가던 길 멈춰 경자년 시산제를 지내던 참이었다. 청산에 유수처럼 흐르던 희망과용기 형의 다음 대목에 턱 걸렸다.
“백운산 신령님께 섭섭한 것이 있습니다. 지난해 한라산 시산제 때 빌었던 북한의 산하를 밟지 못했습니다. 제발 올해는 북미관계, 남북관계가 잘 풀려 칠보산 묘향산 등 밟게 해주소서.” 명색이 신문사 평화연구소에서 밥벌이를 하는데 어찌 움찔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여튼 명불허전, 기량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내가 평가할 자격이 있나 싶지만 말이다.

지난 15일 까무룩히 어두운 새벽, 전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8번 출구를 걸어나오니 발을 동동 구르던 뜬구름이 보여 손을 번쩍 들었더니 왜 전화를 안 받냐고 성화를 부린다. 피닉스 이모 대장님도 눈을 홀긴다. “이제 27분인데요 뭘?” 뜬구름은 계속해서 자신의 시계는 29분을 가리킨다고 막 뭐라 한다.
이모 대장은 전날 전화 통화 도중 결례를 했다며 다시 한 번 사과한다고 했다. 간략히 얘기하면, 사람들을 다른 산악회에 떠넘기려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됐으니 양해해 달라고 얘기해야 하는데, 대장님이 조금 마음이 급했던지 말이 짧았던 것이다. 직접 얼굴을 보니 좋은 분 같았다. 미안하다며 몰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설기를 건넨다. 뜨겁다.
사당 역에서 내려 반더룽의 제로쿨 투어 버스를 찾아 올랐다. 꼬맹이가 손전화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가상이, 희망과용기 형이 올랐다. 양재 역 들러 회장님, 산바람, 정경환 형, 마포나루 형이 합류했다. 아톰 형과 어느덧 중추 회원으로 진입할 조짐을 보이는 꿈푸리는 남해 섬 여정과 겹쳐 빠진 게 못내 아쉬웠다.
모두들 잠든 사이 고속도로를 몇 번 갈아 타고 평택제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난 도대체 우리가 어떤 도로를 타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뜬구름이 정확히 알려줘 흠칫 놀랐다.
버스 안에서 아침을 준다고 큰소리 쳤는데 갑자기 반더룽으로 떠넘겨져 일인당 4000원씩 돌려받은 것으로 박달재 휴게소에서 벼락 치듯 라면과 우동 사먹었다. 지난해 11월 구순봉과 옥담봉 갈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최악의 라면을 경험했는데 이번에는 상당한 품질의 라면과 우동을 먹었다. 가성비도 좋았다.
배가 부르니 버스가 더 느려터진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조바심이 쳐졌다. 어느 순간 눈에 익은 강원랜드 카지노 앞 풍경이 펼쳐지고, 태백선수촌 올라가는 입간판 보고 오른쪽으로 꺾어 한참을 올랐는데도 만항재는 나오지 않다가 결국엔 나왔다. 함백산 오르는 10명 안팎은 조금 되돌아 내려가 왼쪽으로 접어들고 우리는 곧바로 오른쪽 널따란 길로 내려갔다. 나만 혼자 마음이 급했다. 시산제도 지내고 백운산 정상도 오르려면 빠듯할 것 같아서였다.
눈은 다 녹았다. 만항재는 해발 고도 1300m인데 길은 오히려 내리막이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활엽수림이 좌우로 펼쳐지고 풍력단지의 바람개비들이 이따금 굉음을 내며 돌아간다. 지난해 유럽의 풍력과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처음으로 석탄 발전량을 앞질렀다는 환경단체 보고서가 떠올랐다. 마음 급한 산행객들의 재잘거림만 없다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라 오히려 굉음이 인간적 요소로 다가올 수 있겠다 싶어 풉! 했다.
아이젠을 해야 하는 구간은 300m 남짓 뿐이었다. 유난히 들까부는 중년 여성 둘이 앞섰는데 콰당 넘어졌는데 창피해 하긴커녕 오히려 다들 아이젠하세요, 한다. 후훗. 마포나루 형이 버스에서 내려서야 등산화 다시 신는 것을 봤던 터라 앞선 챙기랴, 뒷선이 한참 뒤처질까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3㎞ 정도 걸으니 그제야 산그리메들이 나온다. 벌써 전망 좋은 길목에 퍼질러놓고 스테이크를 굽는 이들도 있다. 낮 12시였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고 피러 회장은 읊조린다. 일행은 몇 번 시산제 장소를 지목했다가 반대가 나오면 무르고 하다 마침내 한 지점에 멈췄다. 앞쪽 전망은 남쪽이라 오히려 오른쪽 굽히치는 길목을 바라보며 상을 꾸렸다.
일동 재배, 했다. 다치지 않는 산행을 기원했다. 그리고 북녘 땅을 밟아보길 기원했다. 난 개인적으로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중국 여행사가 모객하는 개별관광을 신청해볼 요량이라 더욱 분발심을 실어 절했다. 날이 너무 포근해 만사지당 형님이 준 비닐커버를 꺼낼 생각도 안했다. 뜬구름 총무가 배 둘, 사과 셋, 돼지머리고기, 막걸리를, 피러 회장이 모둠전과 떡을 준비했다. 막걸리 맛이 빼어나다며 앞다퉈 마신 뒤 뜬구름이 머리를 쥐어짜내고 84 황순현이 “형, 전 산에는 못 가고요. 이런 걸로라도 도와드려야죠 뭐” 하며 전날 을지로 4가 개찰구 건너 건넨 산악회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다시 짐을 꾸려 떠났는데 날이 그렇게 맑지 않았지만 산그리메를 어느 정도 즐기며 갔는데 초행 길이라 그런지 망설이고 헷갈리고 했다. 오프로드 차량 다섯 대가 우리 옆을 휑하니 지나갔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우리는 백운산 뒤쪽을 한참 돌아갔다가 다시 되짚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좋았다. 서설이 쌓여 소북한 길을 걸을 수 있어서였다. 그렇게 되짚어 나오니 전망대가 나왔다.
오후 3시 50분까지 마운틴 콘도(골프 리조트) 로비에 오라고 했는데 도착하니 5분 전이었다. 리조트 주차장에서 웬 승용차가 다가오길래 뭐지 했는데 가상이 부군 조창휘 군이어서 깜짝 놀랐다. 마침 근처에 볼 일이 있어 태우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조금 서운하게 헤어져 9명이 4시 조금 넘어 귀경 길에 올랐다. 그런데 다른 일행 네 분이 길을 잘못 들어 택시 타고 오느라고 늦어졌다고 했다. 내 옆에 있던 늙수그레한 인간이 술에 취했는지 온갖 쌍욕을 궁시렁거린다. 그렇다고 아주 큰 소리로 따지지도 않고 신경에 거슬리게만 굴었다.
그러더니 그 인간, 버스가 20분쯤 달렸을까 안절부절을 못한다. 왜 저러나 싶었는데, 산행 대장에 전화를 걸어 차를 세워달란다. 쉬한다고, 으이 저 인간, 아까 궁시렁거릴 때 화장실 다녀오지, 속으로 욕을 삼켰다. 한참을 가도 버스가 멈추지 않자 쪼르르 달려가 사정사정한다. 아마도 잠에 떨어져 많이 못 봤겠지만 난 다 봤다. 그 인간이 어떤 포즈로 용변 보느냐까지.
버스 탄 덕을 톡톡히 봤다. 사고도 몇 건 있었는데 버스는 전용차선을 시원시원 달려 거의 3시간 만에 우리를 양재 역에 내려줬다. 개인적으론 족히 30분은 벌어줬다고 생각한다. 길 건너 포차에 들러 신나게 뒤풀이를 했다. 사실 난 가장 먼저 튀어 이미 전철에 몸을 실었는데 회장님이 ‘화장실에 숨어있는가 본데 괜찮으니 나와라’고 문자 보낸 걸 보고 풉! 웃었다.
이날 간 운탄고도는 나중에 해가 가장 긴 날이나 아니면 들꽃 많이 피는 날, 제대로 속속들이 걸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트레일러닝해도 좋은 곳이다. 40㎞이고 특별한 고빗사위도 없어 4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첫댓글 두번의 엉덩방아...
너무 행복했던 산행...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산행기 잘 읽었어요
잘 읽었네. 애썼네. 카이로에서 읽으니 더 정감이 넘치는 산행 풍경으로 느껴지는군. 근데 뒤풀이 후 하직 인사도 안 하고 먼저 튄 까닭은?
너무 짧은 사이에 많이 본 얼굴이 있었습니다. ㅋ
잘읽었습니다 역시 글은 알대장님 따라갈 사람이 없군요. 가고 싶었는데 집안 결혼식있어 좋은 구경 놓쳐 무척 아쉬웠습니다. 기를 듬뿍 받아 오신 분들의 일년이 상사롭겠습니다.
새로운 어휘
들까불다:몹시 가볍고 조심성이 없게 행동하다
중년의 여성이 조심성없게 행동했군요 ㅎㅎ
산그리메가 산그림자이군요,
그릴 이름인줄 알았쥬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네, 산행기를 산에서 읽으니 더 재미지네, 시산제를 빠져서 섭섭했네, 다음 달 산행이 코로나 영향을 안 받아야 할텐데ㅠ
지도 위 얼레지 군락지, 박새 군락지가 확 땡깁니다. 산에 못가니 야생화도 못 보고...ㅠ
쓰느라 수고했다. 내가 사당에서 탔다고? 나는 양재역에서 탔어. 장열도 양재. 그 뜨끈한 백설기가 그렇게 나온 거군. ㅋㅋ 그래도 집에 튈 땐 잘 갔다고 뒤에라도 알려라.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