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399) - 칠순의 낭만과 순수
봄날같이 따뜻한 월요일(11월 30일) 오전, 시골처럼 한산한 효천역에서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일행은 강은수 천혜경로원장과 박영숙 씨 내외, 임복은 후원자, 우리 내외 등 5명으로 자주 국내외 여행을 함께 한 친지들이다. 하루 한 차례 운행하는 무궁화호는 광주 효천역에서 부산 부전역까지 여섯 시간 가까이 걸리는 저속열차, 호젓한 분위기와 차창으로 스치는 경관을 즐기러 일부러 탑승한 낭만열차다. 68석의 넓은 객실은 가까운 거리를 오가는 승객들 몇 사람 뿐, 순천에서 진주 가는 동안은 객실 전체를 전세 낸 듯 우리 일행만이기도. 화창한 날씨의 창밖 풍광이 내내 아름답고 삼랑진 지나 구포에 이르는 낙동강변의 기차 길이 가없이 펼쳐지는 한 폭의 그림이다.
출발에 앞서 효천역에서 포즈를 취하다
부전역에 내리니 오후 4시 반, 북적이는 시장 통을 지나 도시철도를 타고 해운대로 향하였다. 숙소는 해운대해수욕장 우체국수련원, 현지에서 합류한 임연자 후원자와 함께 여장을 풀었다. 멀리 광안대교가 시야에 들어오는 쾌적한 객실이 마음에 든 듯 모두 만족스런 표정이다. 점심은 기차에서 간편식으로 가름한 터, 이내 밖으로 나와 맛 집을 찾았다. 프런트의 직원이 일러준 곳은 인근의 대구탕 전문식당, 푸짐하면서도 깔끔한 저녁식탁이다. 맛있게 먹고 식당을 나서자 여러 차례 외국여행을 함께 한 허웅란 씨(임연자 후원자의 딸)가 해운대 야경을 안내하러 나타난다.
동백섬의 요트계류장에 이르니 휘황한 조명의 고층빌딩들이 멀리 찾은 나그네를 압도한다. 전속사진사라도 된 듯 이 모습 저 모습의 포즈를 취하게 하며 셔터를 눌러댄 안내의 인도로 밤바다를 돌아 본 후 숙소에서의 다음 차례는 윷놀이다. 강은수 원장이 빳빳한 천 원짜리를 여러 장 나눠주며 전원 참여를 독려한다. 제비 뽑아 3명씩 편을 갈라 박진감 넘치는 경기 끝에 3판양승의 첫날 경기를 이긴 팀은 의기양양, 진 팀은 약간 시무룩하네.
고층빌딩의 조명이 화려한 해운대 야경
단잠을 자고 일어난 일행들의 표정이 밝다. 숙소의 취사도구를 이용하여 마련한 아침을 맛있게 들고 커피 한 잔 들며 둘째 날의 일정을 논의한 결과 유엔공원과 국제시장을 돌아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부산의 친지가 여러 코스의 시내 관광 팸플릿을 준비하였으나 명승지는 대부분 둘러본 터, 유엔공원을 제안한 강은수 원장의 아이디어에 귀가 번쩍 틔었다. 지하철에서 옆자리의 청년에게 유엔공원 가는 길을 물으니 스마트폰을 짚어가며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 감사, 공원 입구에 부산박물관이 있어 더 반갑다.
먼저 들른 곳은 박물관, 마침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통신사와 부산'이라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걸었던 길을 되짚는 한일우정걷기에 여러 차례 참여한 바 있는 우리 내외에게는 일부러라도 와볼만한 특별한 기회다. 2층의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문물 등 일반전시실을 돌아본 후 1층에 마련된 기획전시실을 찬찬이 둘러보며 통신사 일행이 거쳐 간 행로, 조선후기 외교와 무역의 창구였던 왜관의 역할, 통신사의 행렬이 지날 때마다 화려하게 펼쳐진 문화교류의 실상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어 유익하였다. 현장의 봉사자에게 물으니 이번 전시에 일본 측의 자료제공과 협조가 특별하였다는 설명, 조선통신사 걷기에 참여한 이력을 들려주며 기행록을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말하였다. 이를 접한 봉사자의 답신, '보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과거 통신사의 현재의 재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사가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이어지는 바를 보여주는 글이었습니다. 귀한 글 저희 봉사자들 모두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박물관 뒷길로 유엔공원 쪽이 연결된다. 전날에 이어 화창한 날씨, 아름다운 꽃과 품위 있는 나무들로 잘 가꾸어진 공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산화한 4만 여명의 전사자 중 2300위의 유해가 봉안 되어 있다. 해마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겨레와 나라 위해 순절한 영령들을 추모하다가 불현듯 이역만리 먼 나라의 전쟁에 참여하여 귀한 생명을 바친 용사들의 고마움을 소홀히 여긴 것이 미안하고 죄송하였는데 함께 한 일행 모두 같은 마음인 듯. 추모명비에 새긴 이해인 수녀의 헌시가 이를 대변해 준다. '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성경말씀으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바친다. 유엔공원은 유엔에서 지정한 세계유일의 성지, 1951년 유엔군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한 것을 1955년 유엔이 영구히 관리하기로 총회에서 결의하였고 1974년부터 11개국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국제관리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음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4만 희생자 중 2300위가 안장된 유엔공원
오후탐방코스는 국제시장과 용두산 공원, 국제시장의 먹자골목을 찾아 노상의 점포에서 국수와 팥죽, 김밥 등으로 점심을 가름하고 영화 국제시장으로 유명해진 '꽃분이네'가게 등을 둘러본 후 용두산 공원에 올랐다. 용두산 공원은 강은수 원장 네 가족이 6.25 때 피란생활을 한 추억이 서린 곳, 용두산 엘레지 노래가사에는 194계단이 등장하는데 지금은 가장 많은 계단 쪽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예전보다 오르기 쉽다. 6.25 때 열 살 꼬마가 어느덧 70대 중반이 되어서도 판자 집에 살던 옛 시절을 잊지 못하네.
숙소에 돌아오니 광안대고 건너편으로 저무는 낙조가 일품이다. 모두들 뜻밖의 행운에 박수를 보낸다. 저녁에는 유람선 타고 해운대와 광안대교 일원을 돌아보았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풍경, 밤바람 맞으며 환상적인 야경을 스마트폰에 담아 지인들에게 보내니 탄성이 연달아 들어온다. 친지가 홍콩의 야경보다 멋지다고 말하는데 이를 들은 듯이 아들도 홍콩의 야경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오고. 숙소에 돌아와 케이크를 잘랐다. 다음날이 천혜경로원 박영숙 사무국장의 칠순생일, 황홀한 전야제를 치른 셈.
어항 쪽에서 바라본 해운대, 모래사장이 넓어지고 101층 아파트가 들어선다
셋째 날, 아침 식탁에서 간단히 예배를 드렸다. 지금까지 지내온 은혜 감사하며 앞으로도 강건한 날들이기를 기원하며. 미역국이 주 메뉴인 조촐한 생일식탁, 그러나 마음은 누구보다 행복하고 풍성하다. 산책길 달맞이고개에서 문정희 시인의 시, '겨울 사랑'을 폰에 담았기에 이를 축시로 낭송하기도.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일출 직전의 달맞이고개, 온갖 사랑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오전에 체크아웃을 하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사상터미널로 향하였다. 터미널에 이르니 11시 반, 2층의 식당가에서 초밥정식으로 점심을 들었다. 깜짝 이벤트, 몇 년 전 해운대에 함께 왔던 강현숙 제자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일정이 다채롭고 빡빡하네요. 내일 점심은 제가 살께요. 원장님 내외분이랑 함께 하시는 분들과 맛있는 점심 드세요. 꼭이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그 마음이 아름다워서 이를 따랐다. 전날의 유람선 티켓과 케이크는 허웅란 씨가 흔쾌하게 베풀었고. 예기치 않은 성원과 호의가 고맙다. 사랑하는 후진들이여, 건승하시라.
이틀간 화창하던 날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버스 타고 오는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초겨울의 문턱에 봄날을 선사한 자연이 고맙고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기는 칠순의 낭만과 순수가 아름답다. 수련원을 떠나며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다음에도 멋진 이곳에 올 수 있기를.
* 광주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후 4시, 20분 후에 도착하는 불가리아 선교사 내외를 맞아 이틀간 숙식을 함께 하였다. 서희범 선교사는 고등학교 적부터 출석하던 서울 모교회의 후배, 칠순이 되어서도 언어와 풍속이 다른 먼 나라에서 10년 넘게 수고하는 발걸음이 아름답다. 여러 날 함께 한 이들과 효천역 출발에 앞서, 수련원 휴게실에서, 아파트 거실에서 스마트폰 구령 따라 국민체조를 하며 건강을 다졌다. 칠순 전후의 노장들이여, 우리 모두 강건하여라.
즐거운 식사가 건강보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