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박.석.김의 성씨가 번갈아가며 왕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신라 건국 이후, 거의 400년 가까이 지속되었습니다. 고구려는 1세기 태조왕 때, 백제는 3세기 고이왕 때, 고대 국가로 도약하였지만 신라는 이들보다 수 백년 늦게 즉, 내물마립간대에 와서야 고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라가 내물마립간때부터 고대 국가로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사서의 신뢰 문제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사실, 박.석.김의 연맹 왕국 신라의 역사는 100%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래서도 언급하였습니다만, 신라의 건국 연대가 기원전 57년으로 더 당겼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다른 기록도 조작.변질되지 않았다고 믿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이 밖에 다른 신라 초기의 기록 역시 신라사 정리 때에 많이 미화(여기에는 신성화도 포함됩니다.)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김씨계 내물마립간계의 세습이 확립되면서 신라사의 기록은 한층 더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내물마립간의 즉위년도가 조작되지 않았음을 이전에 비해 더 믿을 수 있습니다. 박혁거세 같은 경우는 갑자(60간지의 맨 처음)를 즉위년으로 잡아 그의 신성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내물마립간의 경우에는 즉위년을 조작하였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의 즉위년이 병진년으로 굳이 '처음'이라는 의미를 강조라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내물마립간은 다른 나라들의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임금입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에 보면 '신라매금'이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매금'은 마립간을 고구려가 얕잡아 부른 명칭입니다. 즉, 내물마립간과 광개토태왕의 즉위 시기가 동시대였음을 고구려 기록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서 내물마립간이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군사를 요청한 사실이 고구려 광개토태왕비에도 고스란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신라 내물마립간의 현존 인물 여부는 충분히 증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신라사 연구에서는 이 내물마립간의 시기를 최초로 믿을 수 있는 신라사의 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댓글그러고 보니 신라의 기원은 부족연맹시절이 포함되어있고 고구려 사는 주몽이 소노부를 제치고 부족연맹을 통합한 후에 시작하는군요.어떻게 보면 이중 잣대네요. 기원전 3세기경 구려국이라는 부족연맹체가 고구려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고구려는 이걸 없에고 신라는 갖다붙이고. 김부식의 신라중심사관에 영향일까요?
첫댓글 그러고 보니 신라의 기원은 부족연맹시절이 포함되어있고 고구려 사는 주몽이 소노부를 제치고 부족연맹을 통합한 후에 시작하는군요.어떻게 보면 이중 잣대네요. 기원전 3세기경 구려국이라는 부족연맹체가 고구려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고구려는 이걸 없에고 신라는 갖다붙이고. 김부식의 신라중심사관에 영향일까요?
(사대사관과는 다른 것입니다.) 공정하게 적용하자면 고구려 건국 연도를 올리든지 신라 건국연도를 내물마립간부터로 내리든지 하는 것이 공정할 듯 하네요. 정말 탁견이십니다.
동감입니다. 신라 초기사에는 사실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신라의 진정한 건국 년도는 한참 뒤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내물 마립간 이전에는 제대로 된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요?
조조님과 서동공님 저의 의견을 오해하셨군요. 건국 연대가 내물마립간 때부터라는 말이 아니고, 신화나 설화적 요소가 배제된 기록이 내물마립간 시대부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님에 의견을 토대로 다른 주장을 하겠습니다. 연맹국가의 시작을 건국 년도로 잡는다면 고구려는 주몽이전 구려국 에 기원을 두어 기원전 3게기 건국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요? 신라를 낮추는 것보다 고구려를 올려주는 것이 윈-윈일듯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