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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신 다대첨사 421주기 향사봉행
21발의 예포가 울려 퍼지고 제례악 최초로 해군 군악대가 편곡한 보태평 영신 희문곡(保太平迎新熙文)이 애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神을 맞이하는 강신례(降神禮) 를 시작으로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 다대성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윤흥신 다대첨사 421주기 향사가 윤공단에서 엄숙히 봉행 되었다. 윤공단은 잘 가꾸어진 소나무숲속 중앙에 윤공흥신순절비라 전면에 쓰여 있고 뒷면에는 한자 12행으로 공의 전력을 기재 하였으며 양측에는 의사 윤흥제(흥신공의 아우)비와 순란사민비가 세워져있다. 단비 앞엔 사하구청에서 정성스럽게 진설한 제수를 가운데 두고 해군과 부산종친회, 사하구청에서 보내 진열된 조화 앞으로 우측엔 삼헌(초헌 사하 구청장, 아헌 구의회의장)과 집사자들이 좌측엔 해군 작전사령관(해군중장)을 비롯한 해군장성이 자리 잡고 뒤편엔 종친대표와 행사 관계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순절 421주기 향사는 다대문화 연구회 한건 회장의 집례로 초헌례에서 신을 보내는 송신 흥안지악(送神興安之樂) 사신례까지 홀기 순서에 따라 군악대의 제례악이 연주되어 향사의 의미를 한층 더 깊고 높게 하였으며 다대팔경의 구절을 개사한 사하구청 장미합창단의 추모곡은 참사자의 가슴속까지 파고들어 뭉클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 한참을 추슬러야 했다.
임란 첫 승을 거둔 윤흥신 첨사
임란 첫날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2시간 만에 함락 시킨 후 다대 진을 공격해왔다. 첨사는 두성 산을 가로질러 안산 앞을 접근하는 수백 명의 왜적의 수를 파악하고 병사들을 매복시켜 기습으로 공격을 하고 달아나는 적은 정면에선 진로를 차단, 수없는 적을 사살하여 첫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적이 성 밑에서 사닥다리로 기어오르자 첨사는 칼을 높이 들고 공격신호를 내린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화살, 기름과 불길에 왜적은 근접공격을 포기하고 원거리에서 조총으로 거리를 좁혀온다. 조총을 이겨내려면 거리를 두지 말고 맞붙어 싸워야한다. 놀란 병사들이 진영을 빠져나가고 사방이 포위되자 동생 흥제가 내가 앞을 막을 터이니 형님은 객사지붕 위 로 오르라고 소리친다. 흥제와 군관이 기왓장을 뜯어 기어오르는 왜병을 막는다. 이때 밑에서 첨사를 조준한 왜병이 쏜 총성과 함께 첨사가 쓰러진다. 첨사를 끌어안은 흥제에게 또 한발의 총성이 울린다. 두 형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치열한 혈전을 벌이다 고립무원의 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명문에서 태어난 윤흥신 조부 윤여필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이고 아버지 윤임은 수군절도사와 찬성을 지냈으며 장경왕후가 고모였다 어머니는 여흥 이씨로 8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난 공은 여섯 살 되던 1545년 을사사화로 아버지와 형 세분이 대역죄로 사사당하고 관노로 전락한다.그러나 조부 윤여필이 공신이며 80고령이라 가벼운 부처(付處 3등 이하의 죄인은 가까운 곳으로 보내며 관리는 지방 관찰사가 한다. 가족정도는 만날 수 있음)로 5년의 형을 받아 풀려난 후 16세까지 도움을 받아 희망과 용기로 관노 생활에서 살아남는다. 1567년 명종 에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을사사화 때 화를 입었지만 살아남은 노수신, 유희춘 등에게 사면복관을 취하였고 이후 노수신이 영의정이 되어 1577년 12월 윤임이 신원복관 되면서 윤흥신도 32년간의 종살이서 풀려난다.선조23년 10월 어전회의에서 다대진을 첨사영으로 승격시키고 첨사를 누구를 보내야할지 선조의 의견에 우의정 유성룡은 “전하, 무인으로서 장재가 있고 품계가 절충에 이른 사람은 윤흥신 밖에 없습니다. 정국공신 윤여필의 손자라 충정 또한 믿을 수 있어 말씀 드린 것입니다. 선조는 우의정 유성룡의 추천을 승낙한다. “윤흥신을 당상관 절충장군으로 하여 다대첨사에 명하노라.” 윤흥신은 막내 동생 흥제와 다대포를 떠나면서 부인 신 씨에게 아들을 신신 당부한다. 38살에 노역에서 풀려나 마흔이 넘어 혼인하고 마흔둘에 아들 성을 얻었다. 더욱이 집안이 화를 입어 8형제 중 유일하게 대를 이을 후손인 10살배기 아들 성을 두고 천리밖 땅 끝 왜구들이 날뛰는 위험한 임지로 향한다.
윤공단이 세워지기 까지 풍양 조씨 3대에 걸친 공훈사 임진왜란 첫 승전을 거두고서도 사액사우인 충렬사에 배향되지 못하였고 단비조차 없었던 다대첨사를 위해 동래부사 조엄의 3대가 84년에 걸친 노력으로 1772년(영조48) 3월 25일 순절 180여년 만에 충렬사에 위패가 봉안하고 1841년 조엄의 아들 조진관이 지은 비문을 손자 영의정 조인영 대감이 명을 하여 동래부사 홍종웅이 249여년 만에 다대포에 순절비 윤공단을 세운다.
명문 풍양조씨 3대가 84년에 걸쳐 왜 이토록 윤흥신 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을까? 조엄의 아들 조진관이 지은 윤공단의 순절 비문을 보면 “임란중 그 충절이 크게 나타난 사람은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 첨사 정발 그리고 다대포 쪽에는 윤흥신 공이 있으니 이들 세 사람을 동래 순절신이라 부르고 동래부 사람들은 충렬사를 지어 송· 정 두 분을 제사 지내 왔으며 윤흥신 공은 집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라고 하였고 “팔곡 구사맹 공이 조망록에 상세히 기록해둔 점과 선친 조엄이 조선 통신정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와 공의 순절 내용을 상세히 알게 되어 이런 사실을 밝혀 조정에 공에 대한 일을 시행 하게 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아버지 조엄은 39세에 정3품 동래부사 직에 오르고 이후 경상감사, 6조참의, 참판, 판서 및 금부도사, 암행어사를 지낸 청렴결백한 관리이며 백성을 위한 대표적 목민관으로 영조 39년 조선통신사로 가던 중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춘궁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위해 고구마 한 한 자루를 구하여 먼저 본국에 보내 재배토록 하였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튿날 충렬사를 참배 하면서 충신 윤흥신 첨사가 위패도 제사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3대에 걸쳐 윤공단을 세우게 된다. 아들 조진관은 홍국영과의 마찰로 김해로 귀양 간 아버지 조엄으로부터 네가 평생보고 들어서 알겠지만 다대포첨사 윤흥신 공의 일을 다 마치지 못했으니 다대포에 그를 기리는 단을 만들어 비석을 세워주라는 마지막 유언을 받는다. 그 후 이조판서에 임명된 조진관은 아버지 조엄이 윤양후의 술책에 넘어가 인사를 잘못한 사실을 들어 2번에 걸쳐 판서직을 고사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다대포를 방문한다.
병조판서를 지낸 조진관은 이해문 첨사가 세웠다는 윤공단을 찾았으나 단만 만들고 비석을 갖추지 못한 체 제사를 지내고 다대를 떠난 후 후임첨사가 단마저 헐어버린 사실에 낙담한다. 다시 이조판서에 오른 그는 생의 마지막 관직이 될 것을 알고 아들 조인영을 불러 이제 이조판서를 끝으로 6조 판서를 다 해보는 마지막 벼슬에 올랐어도 윤공 단을 세우라는 네 조부의 유지를 실천 못했으니 참담 하다고 하자 23살의 나이로 출사 전 이었지만 순조19년 장원급제할 만큼 총명했던 조인영은 “언젠가 실행할 날이 오겠지요” 라고 답한다. 이에 윤 첨사를 위해 지은 순절비문을 아들 조인영에게 맡기고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1841년(헌종7) 4월 영의정에 오른 조인영 대감은 동래부사 홍종응을 불러 명령이나 다름없는 지시를 내린다. 지금부터 84년 전 나의 조부께서 시작한 일로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을 영의정이 된 내가 마무리할 시점이라 시에 능하고 명필인 홍공을 동래 부사직을 맡겼으니 일을 잘 마무리 해 달라는 부탁을 하며 충렬사에 윤흥신공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게 한 사람이 나의 조부이며 선친께서는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윤흥신 첨사가 전사한 다대진 첨사영 연못자리에 충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려 하였으나 다대첨사들의 비협조로 세우지 못하고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비문을 33년간 보관해오다 이제야 조부와 선친의 뜻을 받들 수 있는 기회라며 비문을 전한다. 이에 동래부사 홍종응은 첨사가 돌아가신 4월안에 순절비를 세우고자 밤낮으로 작업을 진행하여 정해진 기일에 비석제작을 완료하고 다대포 첨사영 연못자리에 단을 짓고 비석을 세워 윤공단 제를 올리게 된다.
이제 후손과 종친회가 나서야 한다. 윤공단은 원래 윤흥신 공이 순절한 장소인 다대객관의 동쪽(현 부산유아교육진흥원)에 세워졌으나 1970년 12월5일 현재 위치인 다대동 1234번지로 옮겨졌으며, 1972년 6월26일 부산시 지방문화재기념물 제9호로 지정됐다.사하구는 매년 윤흥신 공의 순절일(음력 4월14일)에 향사 봉행으로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421주기 향사는 해군작전사령부의 기수단 및 군악대와 함께 집례관을 맡고 있는 다대문화연구회 한건 회장의 개회선언을 시작으로 행장 소개, 비문낭독, 독축 및 헌관분향과 헌화 순서로 진행되었다. 금년 향사는 부산종친회 한표 회장의 노력으로 종친 분향과 행장소개를 할 수 있었으며 정기총회 시 다대첨사를 주제로 특강을 해준 한건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뿌리 내리며 세거해온 청주한씨 문중의 한건 회장은 선대에 이어 2대째 윤공단 관리와 제향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을 뿐 아니라 고희를 넘긴 연세임에도 집례관으로 제례와 의전을 지휘하고 있다. 이 향사를 보면서 정작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을 관과 지역 주민이 힘을 모으고 있음을 볼 때 죄송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었다. 내년 향사부터는 후손과 우리 종친 단체에서 힘을 모아 그 분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젠 우리 윤문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부산광역시 종친회 상임부회장 再九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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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잡안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당상관 절충장군에 오르고 병조참의에 추증된 윤흥신공의 일대기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것 같습니다. 84년에 걸쳐 충렬사 배향과 윤공단을 수립한 풍양조씨 3代의 노력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또한 오늘이 있기까지 향사를 주관한 사하 구청과 한건 회장을 비롯한 다대 주민들의 노력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다음 향사 부터는 우리 윤문이 적극 나서야할 때인것 같습니다. 많은 관심과 협조가 있기를 기원 합니다.
耕南 尹再九족장님 우리 윤문의 위상을 높이기위해 노력하시는 님의 숭조경종 정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컴퓨터도 열심히 배워서 on line 상에서 자주만납시다.건강하십시요.
재구 부회장님의 투철한 숭조경종정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먼저 풍양조씨와 청주한씨 두 문중과 기관 및 관계자여러분에게 참 고맙게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우리 윤문에서 많은 관심과 협조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첨사공의 후손들에게도 수소문하여 함께 참여할수 있도록 부산종친회측의 더많은 관심을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흥신공께서 순직하신 날자도 임진왜란 첫날이 아닌 둘째날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분야도 고증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끝으로 재구부회장님의 건승하심과 부산종친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립니다.
좋은 자료 올리셨네요 부산종친회의 활동에 감사를 드립니다
옳은 얘기지요 후손들이 해야 하는데
요즘 애들은 부모 제사도 안 지내려고 하는판에~
아멘 이면 된다는그 말에 울화통이 화가 분통이.어쩝니까 말세가 된 세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