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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교토 여행14 - 대덕사에서 고토인과 일본 다도의 산실 고호안을 구경하다!
교토 여행 3일째인 2024년 11월 21일 단풍이 좋다는 타카미네 겐코안 (鷹峯源光庵) 은
미루고 다이도쿠지(大德寺) 부터 먼저 보는데..... 일본 선종 임제종의 절로
센노 리큐등 일본 다도의 탄생지이자 황윤길등 조선통신사가 3차례나 묵었던 절입니다.
다이도쿠지는 교토역에서 101번이나 205번, 206번 버스를 타고 다이도쿠지마에(大德寺前) 정류소
에서 내리면 되는데.... 다이도쿠지 (大徳寺, 대덕사 ) 절은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니,
가마쿠라 막부인 1315년에 세워졌으며 23개의 탑두사찰 (부속사찰) 을 거느리고 있는 큰 절 입니다.
먼저 료겐인(龍源院 용원원) 에 들러는데 여기 방장 전원은 ‘가레산스이(枯山水)’ 식으로 유명하며 절에는
“다네가시마(種子島銃)” 라는 화승총이 2자루가 있고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대국을 했다는 바둑판이 있으니 바둑알 통에도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인 접시꽃 3잎이 세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전인 1590년에 황윤길과 김성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위해 이
절 료겐인(龍源院 용원원) 에 머물렀고, 1607년에는 경섬(慶暹) 그리고 1624년
에는 강홍중(姜弘重) 등 통신사가 묵었는데..... 원래 머문 곳은 덴즈이지(天瑞寺)
였으나 막부 말기에 저 덴즈이지(天瑞寺) 가 여기 료겐인(龍源院 용원원) 에 합쳐졌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옆에 료겐인 보다 더 큰 탑두(암자, 부속사찰)인 오바이인(황매원)을 잠시 보고는 이제
고토인과 고호암을 보기 위해 걸어가는데 도중에 고우린인(興林院) 앞에는 말쑥한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가 앞을 가로막는데.... 아마도 이 절 안에 높은 사람이 지금 머물고 있나 봅니다.
그라고는 센노 릿큐가 중수한 후에 그의 동상이 안치된 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서
할복자결한 산몬(三門)을 지나 서쪽으로 계속 걸어서 저멀리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하자
히데요시가 그의 시신을 암장한 다이센인 (大仙院) 을 바라보는데 봄에 벚꽃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윽고 우리 부부는 고토인((高桐院) 고동원)에 도착했는데... 여긴 23개 탑두(부속 사찰) 가운데 상시 개방
하는 4개 사찰에 속한다고 들었지만 오늘은 문이 들어갈수 없다고 적혀 있어 사진만 몇장을 찍습니다.
고토인(高桐院) 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와 기리시탄이었던 부인 타마코 가라샤의 묘소가 있는데...
호소카와타다오키의 무덤으로 쓰이는 석등은 조선의 것으로 센노 리큐가 제자인 그에게 준
것이라고 하며, 그 외에 가토 기요마사가 한국에서 가져왔다는 물건들이 여럿 소장되어 있답니다.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 1582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죽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신을 다이토쿠지 다이센인에 모신후 오토모, 미요시, 호소카와, 마에다, 아사노, 구로다 등 쟁쟁한
가문들이 탑두(부속 사찰) 을 세워 자신들의 조상을 모셨는데, 고토인은 호소카와씨의 보리사인 셈 입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 細川忠興(세천충흥) 는 아버지인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같이
교양인으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다도의 스승 리큐 칠철(利休七哲)
으로도 꼽힌다고 하는데, 다도의 유파인 산사이류(三斎流) 의 개조로 일컫습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당시의 유력 인물
들을 받들고 에도 시대 쇼군 3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를 섬긴 사실상 막부의 원로
로서 지금까지 계속되는 히고노쿠니(肥後國, 구마모토현) 호소카와 가의 기초를 다진 인물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 후지타카가 위태 위태한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다보니 신변
의 위협을 염려하여 아버지와 떨어져 숨어살았다는데..... 아버지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면서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 휘하를 거쳐 아버지 동료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단에 속했습니다.
성격이 격하여 전투에서는 선두에 서서 활약했고 노부나가는 이런 호소카와 타다오키를 마음에 들어했으니
타다오키도 노부나가를 존경하여 부친 대까지 쓰던 가문을 바꾸었고,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부친 후지타카와 함께 머리를 깎고 노부나가를 죽인 장인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게다가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죽을 때까지 노부나가의 기일을 챙겼다는데..... 이름인 '타다오키' 도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의 '타다(忠)' 를 따온 것이며, 타다오키의 매부로 호소카와
가문과 함께 단고를 통치한 잇시키 요시사다는 아케치 미츠히데 편에 가담했기 때문에
멸망했는데, 이 과정에서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한을 품은 여동생에게 전후 살해당할 뻔 했습니다.
정실인 타마코(세례명은 가라샤) 를 향한 애정은 깊어서 그녀의 아버지인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죽인 모반인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을 때에도 이혼하지 않고 유폐시켜 화가 미치는 것을
피했지만 두 사람은 당대 제일의 미남 미녀 부부로 일컬어졌지만 그 실체는 콩가루였다고 합니다.
히데요시의 크리스트교 금지령 발표 직후에 가라샤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격노하여, 그녀 시녀
의 코를 베거나 유곽으로 팔아넘겨 협박하면서까지 가라샤에게 개종을 강요했다고 하며....
또 가라샤의 아름다움에 반한 정원사를 베어 죽였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동안에는 몇통의 편지를 썼으니, 그 내용은 히데요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호소카와씨는 부인을 절에 유폐한후 장인 미쓰나리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편에 섰는데..... 임진왜란
중에는 사쓰마의 시마즈씨나 히젠의 나베시마씨처럼 조선의 도공(陶工) 을 끌고가 자신의 영지에서
도자기를 만들게 했으니 일본 서부에 집중된 도자기 명산지는 끌려간 도공들이 기반을 이룬 것 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인들을 잡아가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한건 다이묘들의 공통된
행태였고 호소카와 타다오키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데.... 1차 진주 대첩 당시 일본군
주장으로 참여했지만 김시민과 곽재우 등 조선 관군과 의병의 맹활약으로 인해 패배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했는지 장례를 가톨릭 예식으로 치렀고 영지에서 예수교도에 대한 탄압이 적었다는데....
아내가 죽은 원인이 서군의 핵심 인물이던 장인 이시다 미츠나리 여서 그랬는지 장인의 기대를
저버리고는 동군에 제일 빨리 참가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해 심하게 말하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반발하여 다투기도 했다고 하니...... 기독교를 통해 생전의 아내를 투영했다고 보는 게 옳은듯 합니다.
1600년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을 지지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과 야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동군 20만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거성 타나베성은 아버지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지키고 있었는데 1만 5천명의 서군이 쳐들어왔으며..... 부인 가라샤는 서군
미쓰나리에 의해 인질로 잡히자 2번이나 남편을 곤란하게 만들기 싫어 집에 불을 지르고 죽습니다!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제자이었던 하치죠노미야 토시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이 양군에 가서
설득하지만 실패하고 친형인 당시 덴노 고요제이 천황에게 상소문을 올려서 그가
죽을 것을 염려했던 덴노가 산죠니 사네에다(三条西実条), 나카노인 미치카즈
(中院通勝), 카라스마루 미츠히로(烏丸光広)를 시켜 양군에게 칙명을 내리자 성에서 물러났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왜 끝까지 싸우지 않았냐고 아버지를 책망했다고 하는 데.....
그럼에도 역시 아버지를 위기에 빠뜨린 것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 이후 타나베
성을 공격했던 서군 소속 오노기 시게카츠(小野木重勝) 를 후에 자결하게 강요합니다.
장남 호소카와 타다타카(細川忠隆) 는 어머니 가라샤가 자결할 당시 친정인 마에다 가로 도망친
처 치요를 감싸다가 폐적 당했고 차남 호소카와 오키아키(細川興秋)는 자기 대신
3남 타다토시가 가독을 물려 받은데다가 자신은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 도망쳤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부인 가라샤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자결을 할수 없어 집에 불을 지르고 경호원에게 목을 쳐달라고 부탁했는데, 역시
임진왜란 제1 선봉으로 십자가 군기를 휘날리며 조선을 침략햇던 고니시 유키나가
도 무사의 명예인 할복을 거부하고 참수되는 바람에 무사들로 부터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선전에 참전했다거 죽으면 천국에 가듯.... 일본 무가 사회에서도 전쟁에 패했을 때
할복자결을 하면 무사의 명에를 지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죽어서 불국토에 들어간다는 믿음이
있었으니..... 그걸 마다하고 참수당하면 지오긍로 떨어지는 것이라 무사들이 측은해 했던 것입니다?
15년 후에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오사카( 도요토미 히데요리) 측으로 참전했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혔지만 교토에 있는 동림원(東林院) 에서 할복했는데.... 그래서 인질 시절
막부와 안면이 있던 3남 타다토시(細川忠利)가 가독을 상속받았다고 하지만 먼저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장남인 호소카와 미츠나오(細川光尚)가 당주 자리를 이어 받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동군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전후 구마모토번을
지켜 아들에게 물려주었으나 아들이 잘못을 저질러 번을 뺏기자
구마모토번은 호소카와씨가 차지해 성주가 되면서 멋진 공원까지 조영하게 됩니다.
호소카와씨의 문장은 아홉개 원인 구요의 문장인데... 어린 시절 타다오키가 오다 노부나가의 소도에 새겨진
구요 문장을 보고 대단히 마음에 들어하자, 노부나가는 이를 기억해 뒀다가 이후 타다오키가 평생의
연인 크리스찬인 가라샤와 결혼했을 때 그 구요의 문장을 하사하여 가문의 문장으로 쓰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소카와 타다오키로서는 평생 기억할 만한 선물인 구요 문장이 168년 후에 사고의 원인이
되었으니, 큰 원 하나를 작은 원 8개가 둘러싸고 있는게 호소카와 가의 문장인데 이 문장
때문에 후손인 호소카와 무네타카(細川宗孝)가 비명횡사하고 개역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사건인즉슨 7,000석짜리 하타모토(旗本)인 이타쿠라 카츠카네(板倉勝該) 라는 자가 정신 착란을
일으켜 본가인 안나카 번주인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勝清)가 자신을 폐하려 한다는
피해 망상에 빠져 이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데..... 이타쿠라 카츠카네는 기행이
잦고 심약하면서도 광폭한 성질이라 가족들도 슬금슬금 피하는 위험 인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쯧쯧 저러다가 언젠가 폐적을 당할거다' 라는 소문이 주위에 도는 것을 듣고 그만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니.... 그런데 뜬금없이 엔쿄(延享) 4년( 1747년) 8월 15일
이타쿠라 카츠키요가 아닌 호소카와 무네타카를 에도성 내의 혼마루에서 참살해
버린 것이었으니 범인인 이타쿠라 카츠카네는 바로 체포되어 며칠 후인 8월 23일에 할복합니다.
이타쿠라 가문의 문장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과 디자인 자체는 같지만 원의 모양이 다른 구요 토모에
(九曜巴) 란 문장을 쓰고 있었는데 혼미한 와중에 실루엣이 똑같은 호소카와
가의 문장을 보고 이타쿠라 본가 당주인 이타쿠라 카츠키요로 착각하고 칼질을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메이지시대에 만들어진 유학자 오오야키 쥰도(大谷木醇堂) 저서 쥰도소로쿠(醇堂叢稿) 에 따르면 카츠카네
의 저택은 쿠마모토 번의 에도야시키의 아래쪽에 있었는데, 비가 내릴 때마다 에도야시키로
부터 온갖 오물이 섞인 흙탕물이 카츠카네의 집을 향해 흘러 내렸으니 착각을 해서 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참살당한 당시 호소카와 무네타카는 아직 31살의 젊은 나이라 후사가 없었고 비명횡사에
대비한 양자를 세워 놓지도 않아 대가 끊기게 되었고, 에도성 혼마루에서의 칼부림
이 일어난 아코 사건 이후로 비슷한 사례에는 양쪽에게 모두 책임을 적용했기
때문에 개역당하게 될 가능성이 커서 구마모토 번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에 놓였습니다.
구마모토번의 무사들이 대량으로 실업자가 될 위기의 순간 등장한 것이 마침, 혼마루 근처를
지나고 있던 다테 마사무네의 증손자 다테 무네무라(伊達宗村, 센다이번
6대 번주,)였으니.... 증조부를 닮아 재치가 있었던 그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어서 저택으로 옮겨 치료하라' 고 한마디 해준 것이 구마모토 번을 살린 한마디가 됐습니다.
그 말에 따라 얼른 시신을 호소카와 저택으로 옮기고, 무네타카의 동생 나가오카 노리오
(長岡紀雄) 를 양자로 삼은 후에 이튿날 결국 숨을 거뒀다며 한 편의 연극을
펼쳐 개역을 막았던 것이니 이 과정에서 다테 무네무라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만약 호소카와 가의 무사들 중 하나가 그런 아이디어를 내서 연기를 하려고 해도 뻔한 송장을 두고 속아줄
사람도 없고 들이닥칠 막부 관리들을 납득시킬 수도 없었겠지만, 도쿠가와가와 그 방계 일파들을
제외하면 다테가는 첫손에 꼽히는 거대 번주인 데다가 에도에서 소비하는 쌀의 절반이 센다이산이었습니다.
입지가 거대한 다테가 인물이 즉석에서 두둔해주는데 거기에 감히 딴지 걸 사람은 없던 것이었으니
그리고 쿠마모토 번도 센다이만큼은 아닐지언정 규모가 컸던 터라 무작정 개역시켰다간
실업자 대량 양산의 부작용을 낳을게 뻔한지라 막부 수뇌부가 알면서도 묵인해 줬을수도 있습니다.
이 참사 후에도 호소카와 가문은 구요성의 문장을 버리진 않았지만 원의 크기를 줄여 실루엣
을 다르게 했다는 후문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에서 호소카와 가를 도와준
다테 무네무라의 가문인 다테 가의 문장 중 하나도 구요문으로 그것도
다테 무네무라의 선조인 시조 다테 마사무네가 호소카와 타다오키 본인에게서 받은 것이랍니다.
호소카와씨는 편지 쓰기를 좋아해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많이 있는데.... 내용이 다른 무장들 이야기라서 전국
무장들의 일화를 알려주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니, '마사무네 공이 이러이러한 미친 짓을 했다는데
안 믿기겠지만 무네시게 공이 말했으니까 진짜인 듯' 식으로. 앞서 언급된 다테 마사무네나 타치바나
무네시게와는 친밀한 사이였던 듯 하며 쿠로다 나가마사 와는 이런 저런 일들로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후 일본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이 사람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저 사람
은 지한파로 한국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진 총리인데 회고하기를 할아버지가
19세기말에 조선의 호남평야에 대 지주로 조선에 나갈때는 배 안에서 호떡을
구워 군산에 내려서는 길가에 앞그린 수백명의 조선인 소자농에게 나워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서쪽으로 걸어서 대나무 울타리를 지나 고호안(孤蓬庵 고봉암) 으로
찾아가니..... 여긴 오래전부터 일반인에게는 개방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다이도쿠지는 선종(禪宗) 사원으로 알려져서인지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이 절에 딸린
암자(부속사찰) 가 여기 저기 만들어져 있는데..... 중국 송나라 그림에 나타난
자연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절 앞 마당에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선(禪)이나 다도(茶道) 에 관심 많았던 암자에 많으니.... 사람은 자연 속에서 평안함을 느끼고 아름답게
여기는데.... 산이 있고 골짜기 사이로 물이 흐르고, 물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시간에
따라서 밝음과 어둠이 바뀌는 자연이야말로 우주 변화의 원리와 이치를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선(禪)이 추구하는 마음의 평정, 차를 마시면서 차 맛 속에 깃들이 삶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깨달음입니다. 가레이산스이 정원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바위와 흰모래 혹은 이끼와 나무 사이에서 선(禪)이나 다도(茶道) 의 진리를 찾는 곳입니다.
여기 고호안(孤蓬庵 고봉암) 이 그런한 암자 (부속 사찰) 인데 이곳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인 "센노 릿큐" 의 자취가 남아있으며 또 조선의
막사발이 소장되어 있으니이도다완(井戶茶阮) 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본 다도는 중국과 한국에서 다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토착화했는데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는 센노 리큐가 이를 완성시켰다는데.... 당시 다도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차노유(茶の湯) 으로 귀족이나 고급 무사들의 유희였습니다.
그런데 센노 리큐는 다도를 그윽한 문화적 향취가 나는 도(道)로 발전시켰으니 와비차
( 侘び茶) 이니.... 일본 미(美) 의 본질은 부족하다는 뜻의 와바(侘び) 와 쓸쓸하다
또는 담담하다는 뜻인 사비(寂び)를 합한 말이니 형식과 내용에서 독창적이라 할 것입니다?
센노 리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었으니 대단한 권세를 누렸는
데...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히데요시는 센노 리큐가 소박한 막사발을 높이 평가하자
아니꼬와 했으며 또 센노 리큐가 임진왜란 침략전쟁을 반대하자 꼭지가 돌아버려
그에게 할복을 명한 것이라 보는데 NHK 사극 “군사 칸베에” 에서 임종을 당해 후회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