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주의 화기
쇠라(1859-1891)
1859년에 사법관의 아들로 태어난 쇠라는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소년시절부터 소묘에 재능을 나타내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1878년에 에콜 드 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전통적인 방법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다.
당시에는 인상파 전시회가 관심을 끌면서 열리고 있었으므로 그도 관람을 하였다. 이 전시회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880년에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파리에 화실을 열고 그림을 그렸다.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빛의 이론도 공부하였다. 이후에는 빛의 이론을 그의 그림에 응용하였다.
그의 그림은 마치 움직이는 순간의 한 시점에서 정지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섬세한 붓질과 부드러운 색소로 전체적으로는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1885년에 발표한 ‘라 그랑트 자뜨 섬의 일요일 오후’는 엄청나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명성도 드높아졌다. 이후로 점묘법의 그림을 꾸준히 그리면서, 연구하고 탐색하였다.
1887년에는 시냑, 필레, 뤼스 등과 점묘기법을 특징으로 하는 ‘신인상주의 그룹’을 결성하였다. 이때 파리로 돌아와서 고호를 만났다. 고호는 쇠라의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한다. 앙데팡드 전에 참여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890년에는 연인인 마들렌느가 아들을 낳았다.(다른 사람에게는 속였다고 한다. 쇠라가 죽자 마들렌이 나타나서 자기의 아들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1891년에 전시회를 준비하던 중에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서 죽었다. 이후에 서양 미술사에서 그의 그림은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친구이자 신인상파 화가인 시냑이 그의 그림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아서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
오늘의 예술은 이전의 예술과 아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장르 구분이 애매하고, 지금까지의 예술적 효과와 전혀 다른 효과를 만드는 예술이 나타났다. ‘더욱이 일상의 사물과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작품이 나타났고, 기존의 작품을 차용한 것도 나타났다. 또한 특정한 사회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므로 포스터와 구분할 수 없는 작품도 나타났다. 오늘의 예술이 난해하여 이해 할 수 없다는 것도 이처럼 다양한 양식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술의 종말론에서 가장 많이 예를 들고 있는 것이 뒤샹의 ‘샘’이다. 일상 사물과 지각적으로 동일하게 생긴 대상이 예술작품이라는 명찰을 달고 나타났다. 이제는 지각걱인 성질 만으로는 예술의 가치성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워 졌다.
아서 단토는 오늘의 예술 상황을 ‘다원주의’라고 하면서 ‘예술의 종말’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하였다. 아서의 말에 의하면, 서구에서 에술의 개념이 출현한 이래로(그리스-로마 이래로 형성되어 온 예술 이론을 말한다.) 하나의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였다. (담론을 네러티브라고 하며, 예술이론이 형성되기 위해서 많은 예술이론의 나타나서 논쟁을 벌인 끝에 정착되는 것을 말한다.) 이제는 그와 같은 담론(형성된 예술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즉 담론이 종말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미학이론(담론)으로 예술적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종말에 이르렀다고 주장 하였다. 오늘의 예술을 지난 시대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역샂거으로 불연속선을 만들었다.
예로서 웬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예로 들었다.(단토는 팝 아트를 이론적으로 둣받침하기 위해서 종말론을 펼쳤다.) 브릴로 상자는 시각적으로는 수퍼 마켓에서 팔고 있는 브릴로 상자와 전혀 차이가 없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시각에 의한 지각적 측면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 단토는 ‘당신이 예술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면 감각 경험에서 사고로 방향을 바꾸어 한다.’고 하였다. ‘이제는 예술작품으로 보이도록 하는 특별한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브릴로 상자를 통해서 예술의 개념을 보면 각 시대마다 다른 예술의 개념, 또는 예술에 대한 특수한 믿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에 16-17세기에 브릴로 상자를 만들었다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지 못 하였을 것이다. 브릴리 상자를 예술 작품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분위기는 눈으로는 확일 할 수 없다. 그러나 에술작품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브릴로 상자가 예술작품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단토는 이것을 ‘예술계’라고 표현하였다. 예술계에서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이면 예술작품이 된다고 하였다.
서구에는 예술에 대한 고유한 믿음 체계(미학이론)가 있다. 믿음 체계가 변화(미학이론의 변천)하는 것이 예술사이다. 예술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각적으로 느끼는 것(감상으로 이해하면 된다.)으로는 아니 되고, 지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을 예술의 종말의 시대라고 하였다.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제는 과거의 방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단토는 이것을 불연속선(역사의 흐름에서)이라고 하였다.
지난 시대의 예술이론은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예술로 수용하기 보다는 예술의 자격을 박탈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종말 이후 시대에는 예술 이론에 구애받지 않는다. 다양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뒤샹의 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디메이드(ready-made) 개념을 알아야 한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이 그 기능에서 벗어나서(기능을 박탈 당하고) 새로운 개성적 실존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기존의 대상물을 자신의 작품으로 가져오는 방식에는 ‘발견된 오브제’라는 개념이 있다. 작가가 미적 특질을 가진 어떤 대상을 선택한다는 것이디.(콜라쥬나 몽타주) 선택하는 과정에 작가의 미적 체험이 작용한다. 그러나 레디메이드는 특징이 없는 대량 생산품 중의 하나일 뿐이다.
레디 메이드 기법이 팝 아트, 누보 레알리즘, 앗상블라즈 로 확대되었다. 아서 단토의 종말 이론은 1960년 대에 나타난 팝 아트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단토 이론에서 모순점은 누가 예술로 수용하느냐에서, 그는 예술계라고 말 하였다. 그렇다면 예술계란 무엇인가라고 할 때 다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죠지 디키는 예술제도론을 들고 나왔다. 예술작품이란 인공품으로서 예술계(Artworld)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사회제도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 인공품의 어느 측면에댜가 감상을 위한 후보의 자격을 수여해 놓은 것이다.(1974) 즉 예술이란 예술이 갖고 있는 내재적 성질(속성으로서, 예전의 미학이론에 부합하는 조건을 갖고 있어야 한다.)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을 둘러 싼 제도 및 관습과의 관계에서 추출된다.(디키는 속성보다는 분류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절차와 관계’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디키는 예술을 결정하는 다섯 가지 기본 개념을 주창하였다. 예술작품, 예술가, 예술관중, 예술계, 예술계의 체계 등이다.(1984)
디키의 예술이론에는 여전히 예술계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복잡하게 정의를 내렸다. 예술계란 에술을 둘러 싼 관행과 관습들, 과거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예술적 유산, 예술가의 의도, 비평가의 평론 등이 얽혀서 짜 놓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다. 그러나 이들을 구성하는 구성원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설명해야 했다. 디키는 예술계에서 구성원은 한 사람이라도 인공품에 대한 감상의 후보 자격이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면 다시 개인과 예술계의 관계 정립이 문제가 된다.
--이동민이 여기저기서 발췌-그러나 대부분은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미학대계 제 3권, 현대의 예술과 미학에서 뽑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