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사진관 사랑방 뒤편에 설치한 천연당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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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0. 20:57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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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사진관
사랑방 뒤편에 설치한 천연당 사진관
요약 1907년경 최초로 색조 띤 사진을 다루는 천연당 사진관 개업 광고가 <대한매일신보>에 실림.
사진사는 김규진·박위진. 위치는 지금의 소공동인 석정동, 김규진의 한옥 사랑 뒤편에 설치.
주 고객은 왕실 인사와 부유층, 외국인. 한 달 사이에 1천여 명이 사진을 찍으러 옴.
중판의 경우 1원 이상을 받음. 사진 재료가 모두 수입품,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비싼 편.
1907년 8월 20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사진 개업 천연당'이라는 이색적인 광고가 실려 있다.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개업했다는 광고다. 지금의 소공동인 석정동에 '사진관을 건설'하고 '대중소 불변색 각양 사진'을 염가로 촬영해주겠으니 이용해달라는 문구가 보인다. 광고문 끝에는 '천연당 사진사 김규진·박위진 고백'이라고 되어 있다.
이 광고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개업한 사진관이 색조 띤 사진을 다루었던 천연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광고가 나올 무렵만 해도 사진관이니, 사진사니 하는 용어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것은 모두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서울엔 이미 수년 전에 일본인이 개업한 사진관이 있었다.
그런데 천연당 출현 이전에 한국인이 만든 실내 촬영장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용원과 지운영이 만들어 촬영국(撮影局)이라 불려졌던 곳이 있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실험적인 목적으로 개설한 것이었다.
최초의 사진관은 업주 겸 사진사 김규진의 한옥 사랑 뒤편에 설치되었다. 당시 실내촬영은 자연광선에 의존해야만 했기 때문에 채광을 고려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초기 사진사들에게 사진관 건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직 인공광을 이용한 촬영술이 개발되지 않았을 때라 자연광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건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옥보다 채광이 좋은 일본식 건물을 택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김규진의 한옥 사랑 뒤편에 '건설'했다는 천연당 사진관은 창문의 위치와 크기가 다양하게 설계되어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김규진은 고종의 시종 출신으로 유명한 서화가였으며, 천연당을 개업할 당시 나이는 40세였다. 서화가들이 사진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운영 역시 당대의 서화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들은 서양의 신문물인 사진의 도입을 개화의 한 수단으로 여긴 것이다. 이런 단계에서 영업 사진관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개업을 했지만, 그것이 김규진의 본업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연당은 개업하자마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주고객은 왕실 인사와 부유층, 그리고 외국인들이었다. 개업 이듬해 설날을 전후한 한 달 사이에만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여자들도 있었는데, 주로 기생들이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감히 천연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개업 3년쯤 후부터 여자 전용 촬영장을 따로 두고 여자 사진사를 양성하여 촬영했다. 그리고 장소도 좁고 채광도 안 좋아 종로2가 양식건물로 이전했다.
여자 고객들을 따로 촬영한 방법은 좋은 아이디어로 보였던 모양이다. 일본인 사진사들이 견학을 오더니 곧 일본에서도 그 방법을 채택해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사진값은 중판의 경우 1원 이상을 받았는데, 당시 중품 쌀 한 가마 값이 4원 정도 한 것에 비하면 매우 비싼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진 재료가 모두 수입품이고, 고가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외상은 무엇보다 큰 골칫거리였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는 김규진이 <대한매일신보>에 낸 다음의 광고를 보면 알 수 있다.
"사회 각 방면과 학교,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우리 동포형제께서 본 사진관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하거니와, 사진 대금을 마치 술값 외상진 것처럼 여겨 해가 바뀌어도 갚지 않는 곳이 수백 군데에 이르러 수습할 길이 없고, 수입처에서 재료값을 달라고 독촉이 심해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즉, 간절히 광고하오니 진심으로 애호하시는 여러분께서는 이 사정을 가엾게 여기시고 빨리 대금을 보내주시기를 바라오며, 앞으로는 우리 동포들에게 사진 대금을 선금으로, 또는 절반 이상을 먼저 받고 영수증을 교부한 다음 촬영해주겠으니 그리 아시오."
한문투를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인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외상값 좀 갚으라는 것이었다. 김규진은 결국엔 서화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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