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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독교 변증 방법론
최경환(천안대 기독신대원)
1. 서론 : 신앙과 이성의 관계 2. 본론 2.1. 20세기 무신론의 공격 : 분석철학의 공격 2.1.1. 버트런드 러셀 2.1.2. 앤토니 플류 2.1.3. 매키 2.2. 유신론의 세가지 방어 전략 2.2.1. 전략 세우기 2.2.2. 신앙주의 2.2.3. 개혁주의 인식론 2.2.4. 유신론적 증거주의(복음주의 변증학, 리차드 스윈번) 3. 결론 : 신앙과 이성의 조화
1. 서론 : 신앙과 이성의 관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신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리고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계획과 섭리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 분이 일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사고와 상식을 뛰어 넘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보통 이성보다 신앙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인데, 이들은 신앙에 대한 논리적 사고와 합리성보다는 종교적 경험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종교적 경험이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적 사건이나 비이성적인 체험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개념과 신념들을 포함하고 있다.[1] 우리들이 경험하고 체험하는 그 신앙이 누구에 대한 경험이며, 어떤 것인지를 말해야만 한다면 분명 우리들은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종교적 믿음 체계는 어느 정도 인지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이성의 사용을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골로새서 2:8)고 말했던 사도 바울도 세상적인 지혜에 대해서 경계를 하라는 말이지, 이성의 사용 자체에 대해서 부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바울은 당시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고도로 발달된 수사학 체계를 이용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물었던 테르툴리아누스 역시 철학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철학적인 훈련을 받고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할 때 그것을 활용하였다. 마찬가지로 파스칼도 어떤 종류의 추론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지만, 그가 일생에 걸쳐서 이루어 놓은 업적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옹호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이성과 신앙이 양립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이성이 신앙의 영역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어떤 관계로 이 둘을 설명할 수 있느냐는 물음일 것이다.[2] 이성은 종교적인 믿음 체계들의 정당성을 입증할 때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만약 우리가 신앙을 이해할 때 이성을 사용해도 좋다면,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 그 신앙을 입증할 타당한 근거들을 가져야만 하는가?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오늘날의 모든 논의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각기 다른 대답에서 시작한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오던 전통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이며, 오늘날까지 기독교 변증학자들과 철학자들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다. 전통적으로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신앙을 앞세우고 이성이 뒤따라오는 구조를 취하거나, 이성의 기준으로 신앙의 내용을 가늠하는 구조를 취하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분석철학의 강력한 도전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기독교 변증학 분야에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큰 변화를 일으켰고 그 유형에 있어서도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오늘날 현대 인식론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합리성”과 “정당화”라는 큰 주제가 기독교 변증학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분석철학을 사용해 기독교를 공격한 철학자들의 논의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은 기독교 변증학의 최근의 논의들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 변증학은 이들의 공격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지형도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오늘날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다양하게 설정하고 있는 최근의 논의들을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학자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그 입장을 분류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신앙과 이성의 적절한 자리매김을 통해 오늘날 기독교변증학자들이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1. 20세기 무신론의 공격
19세기 말 영국에서 형이상학은 짙은 안개 속에 쌓여 있었다. 칸트와 헤겔의 영향 아래 있었던 브래들리(F. H. Bradley)와 맥타가트(J. M. E. McTaggart) 같은 철학자들은 실재는 하나이며, 나뉘지 않는 전체라고 말하고, 모든 다원성의 표현은 환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절대적으로 진리이거나 거짓인 것은 어느 것도 없으며 오직 조금 더 진리에 가깝거나 거짓에 가깝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3] 그들은 시간과 물질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을 뒤이어 등장한 캠브릿지의 젊은 두 철학자 무어(G.
2.1.1. 버트런드 러셀
러셀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면서도 1950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대중적인 문필가이기도 했다. 1957년에 저술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5]에서 그는 기독교에 대한 대중적인 비판을 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종교에 대한 러셀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진실성의 문제인데,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 종교의 각종 주장들을 입증할 수 있는 과학적, 논리적인 증명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인용해서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사용한 제일 원인론, 자연 법칙론, 목적론, 도덕론 등의 논리를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판을 통해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적인 퇴보이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유용성의 문제, 즉, '종교가 문명에 무엇을 공헌하였는가'하는 것인데, 러셀은 종교가 인류와 문명을 위해 공헌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종교란 것이 본질적으로 아득한 옛날 한 번 계시된 불변의 진리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반동적인 세속권력과 쉽게 결탁하여 세계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서 비롯된다고 그는 진단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종교가 인간의 두려움, 특히 영원한 심판에 관한 두려움을 이용하고 있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러셀의 철학적 논지는 책의 말미에 실린, BBC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예수회 신부이자 철학자인 F. C. 코플스턴과 주고받은 논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결국 러셀의 기독교 비판은 합리성과 논리적 증명의 결여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기독교를 믿을만한 어떠한 합리적 논증과 증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셀의 비판이 다소 피상적이었는데 반해, 기독교의 합리성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세련된 철학적 공격은 앤토니 플류에 의해서 시작된다.
2.1.2. 앤토니 플류
키일대학의 철학교수를 역임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과 에버딘 대학 등에서 강의한 앤토니 플류(Antony Flew)는 최근까지 기독교철학을 분석철학의 도구를 사용해 공격한 가장 강력한 비판가이다.[6] 흄에 대한 철학에 관심이 많고, 영미 근대철학의 권위 있는 연구가로 많은 연구 저서들을 남긴 플류는 특별히 철학적 신학에 관한 수많은 논문들과 관련 저술들로 유명하다.[7] 플류는 “반증가능성의 원리” 형태로 유신론에 대한 논리 실증주의적인 도전을 표현했다. 이 원리는 인지적 의미에 대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기본적인 관점을 세련되게 하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결과이다. 플류는 종교인들이 그들의 주장이 반증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계속 그 주장을 수정하고 조건을 첨가함으로써 어떠한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는 『무신론의 전제』(The presumption of atheism)에서 만약에 필요한 논증들과 증거들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념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신론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무신론보다 더 나은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요구이다. 이를 통해 무신론의 전제가 정당화된다. 하나님이 계심을 입증할 수 있다면, 사실이 그러하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우리에게 충분히 있다. 그러한 근거가 나올 때까지 또는 그러한 근거가 나오지 않는 한, 우리가 그렇게 믿어야 할 이유가 말 그대로 전혀 없다.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타당한 태도는 소극적 무신론자의 태도이거나 불가지론자의 태도 밖에 없어야 한다.”[8]
플류는 이렇게 철저히 증거주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증명의 부담은 항상 유신론자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유신론자들은 이러한 증명의 부담을 극복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합리적인 논증을 제시해야만 한다. 만약 그 증명이 타당하다고 판단되기 전에는 기독교가 무신론과의 대결에서 어떠한 진리 주장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증거 없이 유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게임의 룰에 어긋나는 것이고, 이는 이미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다.
2.1.3. 매키
무신론에 관한 20세기의 또 한명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는 바로 매키(J. L. Mackie, 1917~1981)이다. 그는 플류와 마찬가지로 유신론은 합리성(rationality)을 얻기 위해서 증거의 지지(evidential support)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매키의 대표적인 유신론 공격서인 『유신론의 기적』(The Miracle of Theism)[9]은 말 그대로 증거가 없이 유신론을 믿는 것은 기적임을 보여준다. 이 책은 스윈번(Richard Swinburne)의 『유신론의 정합성』(The Coherence of Theism)[10]이라는 책과 함께 신에 대한 20세기 종교철학의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꼽히고 있다. 이 책에서 매키는 분석철학을 사용해 현대의 설득력 있는 기독교철학자들의 유신논증들을 아주 철저하고도 사려 깊게 공격하고 있다. 매키는 만약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유신론의 핵심 명제가 문자적으로 의미가 있은 진술이 되려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검증 가능한 합리적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11] 매키는 지금까지 논의되어져 온 다양한 유신논증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나서, 모든 유신논증은 그 논리적 개연성에 있어 균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더 이상 그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다양한 유신논증들이 서로 상충된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12] 매키처럼 계몽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사상가들에 의하면, 모든 신념이 다 이성의 예리한 비판에 노출 되어야만 한다. 이때 종교적 신념은 이성이란 말로써 명제적 증거나 논증들을 뒷받침해 내야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13] 즉, 종교의 모든 신념들은 마치 우리들의 일상적 언어가 어법에 맞아야 하듯이 문법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를 보여주는 데에 실패했고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 되고 말았다고 맥키는 판단한다.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는 플류나 매키와 같은 분석철학자들 이러한 주장을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념에 대한 증거주의의 반론”(Evidentialist Objection to Belief in God)[14]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충분한 증거가 없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명제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기독교가 참으로 그 진리를 주장할 수 있으려면 합리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증거가 충분할 때 비로소 그 논리적 구조를 인정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러한 증거주의자들의 반론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유신논증을 효과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가? 이러한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대해서 오늘날 기독교 변증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2.2.1. 전략세우기
앞에서 살펴본 현대의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대해서 최근에 많은 종교 철학자들은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라는 고전적인 종교철학의 주제로 다시 회귀하는 현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최근에 등장한 개혁주의 인식론으로 인해 종교철학은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기독교 안에서 단순하게 신앙과 이성 가운데 어느 한쪽에 우위를 두는 방식으로 자신의 변증학적 입장을 제시했으나, 최근에는 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 둘의 관계를 매우 복합하고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이성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느냐는 저마다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여러 학자들이 현대의 논의를 다양하게 분류한『변증학의 다섯 가지 견해』(Five Views on Apologetics)[15]에서는 오늘날의 변증학을 고전적(Classical) 변증학, 증거주의(Evidentialism) 변증학, 누적 사례(Cumulative Case) 변증학, 전제주의(Presuppositional) 변증학, 개혁주의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으로 분류한다. 이들은 모두 이성을 신앙의 영역에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를 소개해 준다. 그러나 이 분류들은 사실 모호하고 그 경계가 뚜렷하지 못하다. 프레임(John M. Frame) 같은 경우 앞의 세 가지 방법론이 모두 증거와 합리성에 대해 어느 정도 공통적인 입장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별반 차이가 없다고 지적한다.[16] 이보다 단순하게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정리한 클락(Kelly James Clack)은 현대의 변증학을 신앙지상주의, 유신론적 증거주의, 개혁주의 인식론으로 구분한다.[17] 피터슨은 클락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신앙주의, 강한 합리주의, 비판적 합리주의로 구분하면서 다시 비판적 합리주의를 유신론적 증거주의와 개혁주의 인식론으로 나누기도 한다.[18] 윌리엄 아브라함(William J. Abraham)과 스테판 에반스(C. Stephen Evans)와 같은 학자들도 모두 이와 비슷한 분류를 제공하고 있다.[19]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변증학의 다양한 모델들과 그들이 소개하고 있는 해당 학자들은 모두 저자의 주관적인 성향과 신학적 입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각각의 입장들을 예리하고 선명하게 구분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클락의 분류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 신앙주의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이해를 수정하여 제시하도록 하겠다. 또한 최근 종교철학계에서 크게 이슈화된 개혁주의 인식론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도 클락과는 다른 평가를 제시할 것이다. 이는 합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궁극적으로 신앙지상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클락이 제시하는 유신론의 세가지 대안에 대해서 살펴보자. 클락은 어떤 유신론자는 증거주의적 전통 안에 머물면서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그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가질 때에야 비로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참으로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을 “유신론적 증거주의”(theistic evidentialism)라고 부를 수 있다. 유신론적 증거주의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신념에 대한 좋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언제나 강한 형태의 증명으로 증거를 구성하는 것은 않지만 보통 계몽주의적 이성 개념을 전심으로 받아들인다. 둘째로 클락은 “신앙지상주의”(fideism)에서 대해서 설명한다. 이 입장은 합리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반해서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믿음 체계들이 합리적인 잣대로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신앙은 오로지 신앙의 영역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입장은 증거주의에 대한 계몽주의적 가정을 거부하고서 근본적으로 다른 합리성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이 입장을 흔히 “개혁주의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이라고 한다. 이 입장을 옹호하는 자들은 증거나 논의의 지지가 없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증거주의적 반론의 첫째 원칙을 거부한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합리성의 개념에 대한 온전한 재사유를 요구한다. 이제 각각의 입장들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해 보도록 하겠다. 우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신앙주의로부터 시작해보자.
2.2.2. 신앙주의(Fideism)
신앙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성에 의해서 평가 받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의 신념은 오로지 믿음에만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적인 믿음의 체계들은 그 자체가 합리적인 평가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신론의 하나님은 참으로 역설적이라고 말한 키에르케고어(Kierkegaard)는 신앙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자연신학이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과정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으로 반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의 사용은 오로지 개념적 진리 내지 동어반복적 진리만을 다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20] 키에르케고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험이 없이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신앙은 개인의 내향성이 갖는 끝없는 열정과 객관적이 불확실성 사이의 모순이다. 내가 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어야만 한다.”[21]
그는 만일 우리가 신의 존재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은 합리적 추론이 아니라 ‘의지의 표현’이라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론짓는 일이 아니라 결단을 내리는 일’이며, 의심을 배제하는 자발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사실이 아닌 것에 자신을 던질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은 지식과 구별되는 것이다.[22] 이렇게 키에르케고어는 파스칼의 확률에 의한 논증이나, 제임스의 경험적 신앙과 마찬가지로 신념을 의지의 문제로 만든다. 그러나 키에르케고어가 이들과 다른 점은 그가 이러한 신념을 왜 선호하는지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근거를 제시하려거나 논증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to) 논증은 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견해로부터의(from) 논증을 시도할 뿐이다. 그의 주된 목적은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3]
그러나 최근에 몇몇 학자들(Piety, Evans, Westphal 등)은 키에르케고어의 전반적인 입장이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신앙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를 허용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에반스(C. Stephen Evans)는 흔히 신앙주의가 비합리주의라는 용어와 쉽게 연결 지어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 신앙주의에 대해서 비판을 하거나 방어하기에 앞서 이 용어에 대한 보다 더 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24] 그러면서 그는 칼빈과 키에르케고어와 같은 사상가들이 보여준 신앙주의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보이고자 한다. 그래서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Faith Beyond Reason: A Kierkegaardian Account에서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면서 그러한 제한된 이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신앙에 기초해야 하는가를 탐구하고 있다.[25] 그는 신앙주의를 비합리주의의 오명에서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신앙주의가 어떻게 자기 비판적인(self-critical) 성격을 지닐 수 있는지를 논증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이성에 근거하지 않는 종교적 진리를 주장할 수 있고, 증거에 기초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신념을 세울 수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키에르케고어를 새롭게 해석하는 이들이 전제주의 변증학과 비슷한 노선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제주의 변증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을 통해 얻으려고 해서는 안되고,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 들이고 나서 논증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인지구조에 미친 죄의 영향력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구와 같은 전제주의 신학자는 키에르케고어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제주의 변증학의 대표적 인물인 반틸(Cornelius Van Til)이 신앙적 동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해 두면서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키에르케고어를 상당히 합리적인 철학자로 재해석한다.[26] 실제로 신앙주의자들조차도 자신의 믿음이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기존의 사실들과 상충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27] 대개 그들은 자기네의 믿음들이 언뜻 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이 보여도 좀더 심층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모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앙주의자들은 자기네 믿음들과 상충되는 사실들에 근거한 도전을 받으면, 그 사실들의 세속적인 출처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다. 이는 반틸의 성경적 합리성과 연결 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다음에 살펴볼 개혁주의 인식론에서 말하는 새로운 합리성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2.3. 개혁주의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
다음으로 유신론자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증거주의에 대한 계몽주의적 가정을 거부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합리성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종교 철학 분야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매우 중요한 발전 가운데 하나는 단호하게 증거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근대적 정초론(foundationalism)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종교적인 믿음을 위하여 논증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즉, 자신의 믿음을 위한 논증이 없어도 그것을 믿기 위한 적합한 근거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신앙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궁극적인 믿음들이 합리적인 평가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적인 믿음들을 지지해 주는 증거가 없더라도 그 믿음들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충실하게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28] 이러한 관점을 ‘개혁주의 인식론’ (Reformed Epistemology)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 관점이 개신교의 개혁파, 또는 칼빈(John Calvin)의 사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29] 20세기 종교철학계의 분수령을 이룬 플란팅가의 『신과 타자의 정신들』God and Other Minds[30]은 그 동안 기독교에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증명하는 방식들이 모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자연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오늘날의 모든 논증들은 이제 현대의 분석철학적 방법론에 의해 그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자연반신학 역시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플란팅가는 유비논증을 통해 타자의 마음을 유추해 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이를 하나님에게 적용해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이후 플란팅가를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인식론’은 최근 20년 동안 미국 종교철학계의 최대 모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신앙과 이성 문제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칼빈 대학 프로젝트에서 생산된 『신앙과 합리성』Faith and Rationality: Reason and Belief in God은 현대 기독교철학의 획을 긋는 중요한 저서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책은 새로운 합리성에 대한 ‘개혁주의 인식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으로 노틀 댐 대학교의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 예일 대학교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olas Wolterstorff), 씨라큐스 대학의 윌리엄 알스톤(William Alston), 그리고 미쉬간 대학교의 죠지 매브러즈(George Mavrodes) 같은 현대 종교철학자들이 대거 참여 하였다. 여기서 플란팅가는 증거주의적 무신론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한다. 하나는 증거주의가 근거해 있는 정초론(foundationalism)을 비판함으로써 증거주의도 자동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믿음이 별도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종류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이다.[31] 플란팅가가 비판하고 있는 고전적 정초론에서는 종교적 신념들을 근본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종교적 신념들이 합리적으로 주장되려면 증거, 증명, 논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전적 기초주의는 필연적으로 증거주의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32] 그러나 개혁주의 인식론자들에 따르면 고전적 기초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을 기초적 명제들에서 이끌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33] 기초주의 이론 자체가 참으로 근본적인 것의 중요한 판단 기준을 정당화할 수 없으므로, 기초주의는 스스로의 입장을 파괴하는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34] 증거주의의 반론에 대한 플란팅가의 방어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유신논증에 필요한 어떤 적극적인 근거들은 무엇인가? 플란팅가는 이어서 외적인 세계와 다른 정신들을 믿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신념 역시 기본적으로 타당한 신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플란팅가는 칼빈이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다룬 방식을 채용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신 의식”(sensus divinitatis), 즉 하나님을 믿으려는 자연적 성향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증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신념을 가지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말해 완전히 정당하다고 타당하다고 플란팅가는 주장한다. 신자들이 어떤 논증이나 증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인식론적 권리(epistemic rights)에 해당하는 것이다.[35] 이러한 플란팅가의 논의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매브러즈와 같은 학자는 플란팅가의 소극적 변증학에 대한 다소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매브러즈는 플란팅가의 논의가 기독교를 믿지 않을 하나의 가능한 이유는 제거해 주지만,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는 지적한다. 그래서 매브러즈는 왜 플란팅가가 소극적 변증의 타당성은 받아들이면서도, 적극적 변증의 가치를 부인하는가를 질문한다.[36] 매브러즈의 논의를 이어서 플랑팅가와 같은 대학(노틀 댐)의 동료 교수인 필립 퀸(Philip Quinn)은 이 문제를 더욱 구체화시킨다. 퀸은 플란팅가의 논의가 현대를 살아가는 지성인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에 대한 합리성을 제공하기에 정당한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37] 퀸은 만약 플란팅가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이 합리적이려면 어떤 종류의 자연신학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퀸은 그의 소극적 변증이 일반인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특별히 악의 문제에 대한 그의 논의는 실질적으로 유신논증에 전혀 도움이 되질 못한다.[38] 이럴 경우, 플란팅가는 자신이 수행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성은 사실 논리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게 되고, 실질적으로 자신이 신념을 가지게 되는 경위는 심리적이고, 욕구에 의한 개인적 성향의 선택이 될 수 있다. 결국 개혁주의 인식론은 한낱 심리적 프로젝트(Psychological Projection)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소극적 변증학을 한 이후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지극히 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또 다른 분석철학적 근거로 작용할 수 있고, 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해스커(William Hasker)는 결국 이러한 플란팅가의 입장이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39]
2.2.4. 유신론적 증거주의
전통적으로 기독교 변증가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기획은 중세 때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를 흔히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즉, 자연신학은 자연계의 사실들로부터나 특별계시에 의해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플란팅가는 이러한 전형적인 자연 신학자들의 프로젝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자연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유신론의 핵심적인 신념 중 일부가 자명하거나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들이거나 또는 명백하게 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들로부터 연역적으로 또는 귀납적으로 도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신학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어떤 핵심적인 종교적 신념들이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40]
전통적으로 이러한 자연신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 존재 증명으로는 우주론적 논증, 존재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유신논증은 최근에 다시 새로운 부활을 꿈꾸고 있는데 윌리엄 크레이크(William Craig)의 칼람 우주론적 논증(Kalam Cosmological Argument), 윌리엄 팔리(William Paley)의 목적론적 논증과 뎀스키(William A. Demski)에 의해 새롭게 개선된 지적설계 논증(Intelligent Design Argument), 루이스(C. S. Lewis)의 대중적인 저술을 통해 다시 소개된 도덕적 논변, 옥스퍼드의 철학자인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에 의한 개연적 접근(Probability approach) 등은 새롭고도 흥미로운 다양한 유신논증들이다. 이 입장에서 유신론을 변증하는 이들은 계몽주의적 이성 개념을 받아들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믿는다. 예전에 무신론자였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변호하는 대중적인 글을 썼던 루이스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대표작인 『순전한 기독교』와 『고통의 문제』와 같은 책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합리적으로 기독교의 신념들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노먼 가이슬러(Norman L. Geisler)는 오늘날 전통적인 기독교 변증학의 입장을 고수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종교철학개론』에서 고전적인 유신논증들이 논리적으로 오늘날에도 타당한 이유를 밝히고, 최근에 자신이 편집한 『기독교 변증학 백과사전』에서도 고전적 변증학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가르쳤던 미첼(Basil Michell)은 종교적인 발언들이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기준에 따라 인지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확신한 철학자이다. 그는 종교인이 자신의 종교적인 언명들을 반증 때문에 포기하는 결정적인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믿음은 물리학자들의 가설처럼 사건들의 변화에 따라 폐기되거나 수정되는 잠정적인 가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변증학자들은 이러한 유신론적 증거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하고 보다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러한 유신론적 증거주의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영국의 과학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인 리차드 스윈번의 견해를 살펴봄으로 그 타당성을 평가하도록 하겠다.
2.2.4.2. 복음주의 변증학
『고전적 변증학』(Classical Apologetics)[41]의 저자인 린슬레이(Arthur Lindsley), 스프라울(R. C. Sproul), 거스트너(John Gerstner)와 같은 복음주의 사상가들은 증거주의야 말로 그들의 형태에서 가장 잘 처리된다고 믿으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이들은 이것만이 기독교적 신념을 비합리주의로부터 구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하면서 이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하려고 한다. 이들은 고전적인 유신론적 증명들이 단순히 개연성 있는 것이 아니라, 증명적이라고 주장한다.[42]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것이 합리적으로 주장되기 위해서는 전통적 증명에 근거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적 신념이 합리적이라고 하거나 지적으로 존중할만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증명으로서의 기능은 철저하게 증명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증거들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논증으로 믿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의지적으로 그것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만 한다.”[43] 클락은 그들이 자신의 증명들을 평가하는데 사용된 언어가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한번에 해결 줄 수 있다고 믿는 낙관주의를 시사한다고 꼬집에서 말한다.[44] 그러나 우리는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증명이 없이도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많은 합리적 신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신념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수만이 아주 강한 의미에서 증명된 신념들이기 때문이다. 유신론적 증거주의에 대한 개혁주의 인식론자의 매우 강력한 비판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한 것이다. 복음주의 증거주의의 실패는 결국 계몽주의적 증거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헌신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판단 기준에 스스로 발목을 잡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전적 자연 신학에 대한 헌신과 계몽주의적 증거주의에 대한 가정에서 현대 사상과 부당하게 결합하고 있는 자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45] 클락은 그들이 유신론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증명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고서는, 그들 자신이 변변한 증명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계몽주의적 증거주의에 대한 헌신은 고전적 변증학의 종국을 의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2.2.4.1. 리차드 스윈번
플란팅가가 증거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 새로운 합리성을 제시함으로 다시 도전을 했다고 한다면, 스윈번은 그들의 도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한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와 증명의 부담을 기꺼이 지려고 하다.[46] 『유신론의 정합성』(The Coherence of Theism)에서 스윈번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완전한 존재가 있으며, 그 분은 전능하시고 영원한 영적인 실체이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명제가 문법적으로 정당하며 의미가 있는 문장임을 증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임을 밝힌다.[47] 인간의 정신 작용은 충분히 신이 존재한다는 합리적인 논증을 구성할 수 있으며, 이를 충분히 정당화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철학적 작업이다. 그는 현대 과학철학의 발전이 이전의 철학자들이 미쳐 발견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어주었고 사고의 폭을 확장시켜 주었다고 말한다.[48] 이는 경험세계 이면의 심층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해 주었으며, 종교적 이론들과 과학적 이론들이 매우 유사함을 자신의 확증이론(confirmation theory)이라고 불리우는 귀납논증을 통해 증명한다. 이어서 스윈번은 세상의 존재와 설계, 종교적 경험들, 도덕성과 인간의 의식, 악, 그리고 이적들을 설명되어야 할 현상으로 여기고서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최고의 설명이라고 논의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의 논의는 축적적인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증거들을 함께 취하여서 그것을 유신론의 가정으로 연관시키는 것이다. 클락은 스윈번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렇게 복잡한 우주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존재하게 함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전적으로 선하고 전능하신 인격적인 존재가 있다는 가정은 우리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같은 세상을 기대하도록 한다(유신론 가정은 세상의 존재의 개연성을 상당히 높이는 것이다). 각기 다른 현상들 전체가 유신론 가정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49]
스윈번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아주 개연성이 있으며, 이 세상은 우연한 과정에 의해서 존재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연성을 따져 보면 유신론적 가정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며 충분히 옹호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윈번의 이러한 설명 이면에는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이해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신이 스스로 모순됨이 없는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50]
3. 결론: 신앙과 이성의 조화
이상으로 우리는 현대 기독교철학자들이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둘의 관계는 서로 협조적이기도 했지만 적대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마치 중세의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하나님의 이성과 의지의 문제로 팽팽하게 대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결단과 믿음을 강조하는 신앙주의에 쉽게 매력을 느낀다. 오직 믿음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에 이른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플란팅가의 하나님에 대한 신념이 신앙지장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플란팅가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변증하면서 그것은 논증이나 증거에 근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윌리암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플란팅가가 신앙지상주의자라고 비판한다.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플란팅가의 근자의 사상을 일종의 신앙지상주의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첫째로, 그의 중심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이기 위해서 이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대부분의 신앙지상주의자들이 근본적으로 믿고 있는 바이다. 둘째로, 플란팅가는 주도적 신앙지상주의의 주제를 분명히 시사하는 용어들을 아주 쉽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플란팅가는 아주 뛰어난 신앙지상주의의 유능한 설명자들을 가지고 있는 칼빈주의적 전통과 자신을 행복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플란팅가는 그 자신이 신앙지상주의적 분위기에 있을 때는 바빙크나 바르트나 칼빈에게 대해 전혀 적대적이지 않다. 아마도 그는 근자에 나타난 최고의 신앙지상주의자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사실 플란팅가는 우리가 증거나 논증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증거나 논증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51]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주의와 플란팅가에 의해서 주도된 개혁주의 인식론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인간의 인지 구조과 자연적 이성의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 추론 기능의 산물이 아니라는 데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주의자들은 이성이 우리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데 전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적어도 이성이 우리들을 잘못 인도해 가서 신앙에 반대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앙과 이성의 대립은 용기 있고 단호하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때에 해결되는 것이다.[52] 그러나 개혁주의 인식론자들은 새로운 합리성을 통해 온전한 사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정말로 정당하고 옳은 이성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바른 이성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플란팅가에 의해서 발전된 유신론적 인식론은 합리적 믿음의 구조에 대한 우리의 통찰을 더 정확히 이해하여 반영한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거듭난 이성을 통해서만 온전한 인식론적 사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틸과 플란팅가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 둘은 모두 성공적인 인식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드러내는 논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올바른 인식 구조에 의하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53] 그러나 이들은 모두 유신론자와 비유신론자들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이들은 이성이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유신론자와 비유신론자가 동의한 후에, 유신론자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서 먼저 이성이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서부터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54] 그렇다면 이성에 대한 이렇게 서로 다른 개념은 과연 어떤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과연 바른 것인가? 그 둘 사이의 대화는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현재 개혁주의 인식론자들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가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스윈번과 같은 증거주의 유신론자는 인간의 인지 작용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 유신론자와 비유신론자들 사이에 날카로운 구분을 두지 않는다. 스윈번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인간의 합리적 인지 구조에 대한 낙관적 긍정과 확신 가운데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스윈번을 중심으로 현대 기독교 유신론자들은 전통적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취해오던 연역적 증명보다는 귀납적 모델을 더 선호한다. 유신론적 논변들의 연역적 형식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표현하는 반면에 귀납적 형식들은 신이 존재할 확률을 확보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근거들과 증명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이 세상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욱 개연성이 높고 합리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이 신앙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 계시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서 인간의 일반적인 이성의 자리에까지 포괄하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 아마 스윈번은 반대할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인 이성은 사물의 진리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충분한 증거와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 사고와 논리적 전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될 수 있으며 이를 비유신론자들에게도 떳떳이 제공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의 질서와 창조의 원리를 지금도 유지하고 계시며 붙잡고 계신다. 때로는 스스로 자신이 그 논리와 법칙에 종속되는 것 같이 이 세상에 드러내실 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분이 전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논리적 법칙에 자신을 맞추어 조정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인자하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맘대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깨트리면서 위반하신다면 인간은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인격적인 반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적어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처음과 끝이 동일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 기분에 따라 세상을 움직이시는 폭군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으로 그 분의 뜻을 발견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성을 사용해서 신앙을 증명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의미 있는 작업이며 앞으로 기독교철학자들이 추구해야 할 방향인 것이다.
-참고문헌-
마이클 피터슨, 윌리엄 해스커, 브루스 라이헨바하, 데이비드 배싱어, 『종교의 철학적 의미』3판, 하종호 역(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켈리 제임스 클락, 『이성에로의 복귀』, 이승구 역(서울: 여수론, 1998).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사회평론, 1999). 패트릭 가디너, 『키에르케고르』, 임규정 역(서울: 시공사, 2001). 로날드 내쉬, 『신앙과 이성』, 이경직 역(서울: 살림, 2003).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종교의 한계 내에서의 이성』, 문석호 역(서울: 성광문화사, 1991). 이승구, “코넬리우스 반틸,” 한국기독교철학회,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IVP, 2005). 하종호, “종교 인식론을 통해서 본 기독교 철학의 정체,” 『백석저널』, 2호(2002, 가을). Keith M. Parsons, God and The Burden of Proof(New York: Prometheus Books, 1989). Alvin Plantinga, God and Other Minds(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67). Alvin Plantinga, “Reason and Belief in God,” in Alvin Plantinga and Nicholas Wolterstorff, eds., Faith and Rationality(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3). Nicholas Wolterstorff, “Introduction,” in Faith and Rationality. George Mavrodes, “ J. L. Mackie, The Miracle of Theism(Oxford University Press, 1982). R. C. Sproul, John Gerstner, and Arthur Lindsley, Classical Apologetics(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4). C. Stephen Evans, Faith Beyond Reason: A Kierkegaardian Account (Eerdmans: Grand Rapids, 1998).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Oxford: Clarendon Press, 1979). Richard Swinburne, The Coherence of Theism(Oxford: Clarendon Press, 1977). Richard Swinburne, Is There a God?(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Richard Swinburne, Seteven B. Cowan, eds., Five Views on Apologetics( John M. Frame, “A Presuppositionalist’s Response,” in Five Views on Apologetics. Kierkegaard,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rans. David F. Swens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1), 182. Michael Peterson, William Hasker, Bruce Reihenbach, and David Basinger, Philosophy of Religion: Selected William Hasker, “The Case of the Intellectually Sophisticated Theist,” in Philosophy of Religion: Selected James Anderson, “If Knowledge Then God: The Epistemological Theistic Arguments of Alvin Plantinga and Cornelius Van Till,”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40/1(April 2005).
[1] 마이클 피터슨, 윌리엄 해스커, 브루스 라이헨바하, 데이비드 배싱어, 『종교의 철학적 의미』3판, 하종호 역(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71. [2] Ibid., 72. [3] Keith M. Parsons, God and The Burden of Proof(New York: Prometheus Books, 1989), 11. [4] Ibid., 13. [5]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사회평론, 1999). [6] 그러나 최근에 그는 자신의 무신론적 입장을 번복하고 유신론자로 돌아서는 사건으로 철학계에 큰 이슈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유신론자로 돌아서게 된 결정적 원인은 고전적인 설계논증의 현대적 설명을 통해서이다. [7] 플류의 주요 저서로는 Hume’s Philosophy of Belief , 1961, David Hume: Philosopher of Moral Science, 1986, The presumption of atheism and other philosophical essays on God, freedom, and immortality, 1976, God, Freedom, and Immortality: A Critical Analysis, 1984, Does God Exist: The Craig-Flew Debate, 2003, Merely Mortal?: Can You Survive Your Own Death?, 2001, Atheistic Humanism (The Prometheus Lectures), 1993, Resurrected?: An Atheist And Theist Dialogue, 2005, God and Philosophy, 2005 등이 있다. [8] Antony Flew, The presumption of atheism(London : Pemberton, 1976), 14. 로날드 내쉬, 『신앙과 이성』, 이경직 역(서울: 살림, 2003), 21에서 재인용. [9] [10] [11] J. L. Mackie, The Miracle of Theism(Oxford University Press, 1982), 4. [12] Ibid., 253. [13] 켈리 제임스 클락, 『이성에로의 복귀』, 이승구 역(서울: 여수론, 1998), 18. [14] Alvin Plantinga, “Reason and Belief in God,” in Alvin Plantinga and Nicholas Wolterstorff, eds., Faith and Rationality(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3), 17. [15] Seteven B. Cowan, eds., Five Views on Apologetics( [16] John M. Frame, “A Presuppositionalist’s Response,” in Five Views on Apologetics. 132. [17] 클락, 『이성에로의 복귀』, “제1장 신존재 증명: 문제와 전망.” 29-86. [18] 피터슨 외 3인 공저, 『종교의 철학적 의미』, “3장 신앙과 이성,” 69-95. [19] William J. Abraham,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Religion(Englewood Cliffs: Prentice-Hall, 1985), chaps. 7, 8, 9, 10; C. Stephen Evans, Philosophy of Religion: Thinking about Faith(Downews Grove: InterVarsity Press, 1985), chap. 1. [20] 패트릭 가디너, 『키에르케고르』, 임규정 역(서울: 시공사, 2001), 122. [21] Kierkegaard,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rans. David F. Swens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41), 182. Michael Peterson, William Hasker, Bruce Reihenbach, and David Basinger, Philosophy of Religion: Selected [22] 패트릭 가디너, 『키에르케고르』, 124. [23] Mackie, The Miracle of Theism, 213. [24] C. Stephen Evans, Faith Beyond Reason: A Kierkegaardian Account (Eerdmans: Grand Rapids, 1998), 13. [25] Ibid., 14. [26] 이승구, “코넬리우스 반틸,” 한국기독교철학회,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IVP, 2005), 3장. [27] 마이클 피터슨, 『종교의 철학적 의미』, 85. [28] Ibid., 172. [29] 월터스토프는 그의 관점이 대륙의 개혁파 전통과 어떤 친근성을 가지고 있는 점을 이점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견해를 “칼빈주의 인식론”(Calvinist epistemology)이라고 묘사한다. Nicholas Wolterstorff, “Introduction,” in Faith and Rationality, 7. [30] Alvin Plantinga, God and Other Minds(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67). [31] 하종호, “종교 인식론을 통해서 본 기독교 철학의 정체,” 『백석저널』, 2호(2002, 가을), 254. [32] Alvin Plantinga, “Reason and Belief in God,” in Faith and Rationality, 48. [33]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종교의 한계 내에서의 이성』, 문석호 역(서울: 성광문화사, 1991), 71. [34] Alvin Plantinga, “Reason and Belief in God,” 59. [35] Ibid., 72. [36] George Mavrodes, “ [37] William Hasker, “The Case of the Intellectually Sophisticated Theist,” in Philosophy of Religion: Selected [38] 어떤 이들에게는 악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변증과 함께 이유가 제시되어야 하며, 왜 악이 존재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9] William Hasker, “The Case of the Intellectually Sophisticated Theist,” 352. [40] Alvin Plantinga, God and Other Minds, 3. [41] R. C. Sproul, John Gerstner, and Arthur Lindsley, Classical Apologetics(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4). [42] Ibid., 100. [43] Ibid., 122-123. [44] 클락, 『이성에로의 복귀』, 78. [45] Ibid., 84. [46] Keith M. Parsons, God and The Burden of Proof, 31. [47] Richard Swinburne, The Coherence of Theism, 2-3. [48]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Oxford: Clarendon Press, 1979), 2. [49] 클락, 『이성에로의 복귀』, 61. [50] 스윈번의 신 이해에 대해서는 Richard Swinburne, Is There a God?(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Richard Swinburne, Providence and the Problem of Evil(Oxford: Clarendon Press, 1998)을 참고하라. [51] Plantinga, “Reason and Belief in God,” 30. [52] 클락, 『이성에로의 복귀』, 228. [53] 최근에 반틸과 플란팅가를 비교한 글을 쓴 앤더슨(James Anderson)이 이 부분을 잘 지적했다. James Anderson, “If Knowledge Then God: The Epistemological Theistic Arguments of Alvin Plantinga and Cornelius Van Till,”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40/1(April 2005). [54] Plantinga, “Reason and Belief in God,” 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