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26
7월22일[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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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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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m2Ky1rSdSE
[살레시오회 최성규 레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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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깊이, 그리고 극진히,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생기게 되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와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연결되며, 일상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그의 슬픔이 내 눈물이 됩니다.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그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됩니다.
일곱 마귀의 횡포로 인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걸어갔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런 진한 사랑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 인생이 이쯤에서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삶에서 그런 사랑, 그런 축복이라곤 꿈도 꾸지 못했는데, 그분의 등장으로 인해 뜻밖의 기적이 찾아온 것입니다.
한때 일곱 마귀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이상 고통스러울수 없는 큰 고통과 병고의 표현이 일곱입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더 이상 부서질 것 없는 폐허가 곧 일곱입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봤었는데, 더이상 부드러울 수 없는 세상 자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미시며 나를 죽음의 구렁에서 빼내주셨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삭막하고 혹독한 겨울 같은 인생이었는데, 그분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화사한 봄날로 급변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요 기쁨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열두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여사도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새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너무나 힘겨운 고통에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고 있다가도 내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금 힘을 얻고 일어서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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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담 대학교 대학원 영성 상담 심리 전공, 웃음 치료 및 레크리에이션 전문가로 순례자들을 기쁨과 감동의 순례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신청: 041-675-7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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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_EW3ER_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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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기도할 때 언제쯤 끝마치는 게 좋을까?>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들었지만, 예수님에 의해 깨끗해진 여인입니다. 그 다음에 얼마나 발전했던지 예수님은 그녀에게 당신 부활의 모습을 처음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바로 드러내시지는 않고 순차적으로 드러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 무덤에서 천사들을 목격하고 그다음에는 무덤 밖에서 동산지기로 보이는 예수님을 만나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그녀를 기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은 우리가 기도할 때 거치게 되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어떤 과정을 거치며 나아가야 하는지 길을 제시합니다.
기도는 누가 할까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가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기도할 수 있었겠으나 그리스도의 무덤 곁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아니면 세상에서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세상도 어차피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겐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을 줄 분이 아직은 부활을 믿지 못하여도 여전히 자신에게 자유를 선사한 그리스도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필요에 의한 ‘머무름’입니다.
머무르다 보면 무언가 신비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여전히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묵상기도를 통해 천사를 만나는 것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물론 묵상의 과정은 신기하고 기쁘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멈춘다면 기도를 하다 만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더 머무르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분이 동산지기처럼 여겨집니다. 마리아는 두려움을 무릅씁니다.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면 더는 필요한 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리아는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동산지기가 정말 예수님을 훔쳐 갔다면 마리아는 매를 맞거나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죽음을 무릅씁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아시니 그제야 마리아도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는 스승님을 “라뿌니!”라고 부릅니다. 스승을 만났음은 이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줄 분을 만났음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과 머물고 싶습니다. 타볼산에서 베드로도 변모하신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와 그곳에서 천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깊어지면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기쁨 속에 잠겨있다가는 평생 세상으로 내려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마지막입니다. 예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기도에서 받은 사명만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향기를 풍깁니다.
기도는 ‘머무름 – 들음(깨달음) - 기쁨과 평화(만남) - 파견(사명)’의 과정을 거칩니다. 군인이 군대에 들어와 훈련하다 보면 이전의 자기가 무엇을 했고 무슨 의도로 들어왔건 결국엔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전우애만 남게 됩니다.
영화 ‘지 아이 제인’이 그러합니다. 여자도 네이비실의 훈련을 견뎌낼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남자들과 함께 훈련받던 그녀는 이제 그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과 같은 한 명의 네이비실이 되어 나라와 동료를 위해 싸우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잘했다면 마지막엔 나의 처지에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사명만 남습니다. 이 사명이 명확히 느껴지면 그때 기도를 멈추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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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라./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만물의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해 한 말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빨리 간다./ 우리의 심정은 튼튼하고 용감하나/ 싸맨 북소리처럼 둔탁하게/ 무덤 향한 장송곡으로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 안에서/ 발 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매장하라!/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느님이 있다!/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치느니,/ 우리도 장엄한 삶을 이룰 수 있고,/ 우리가 떠나간 시간의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남길 수가 있느니라./ 그 발자취는 뒷날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다가/ 파선되어 버려진 형제가 보고/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지니./ 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지 않으려나./ 어떤 운명인들 이겨낼 용기를 지니고,/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면서/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지 않으려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멋진 글입니다. 롱펠로우의 삶은 그가 예찬한 것처럼 멋지고,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롱펠로우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우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롱펠로우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롱펠로우에게 힘을 준 것은 바로 부정이 아닌 긍정의 마인드였습니다. 인생은 환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을 고목(古木)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고목의 새순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이 바로 인생의 새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새로운 감정이 생깁니다. 우울한 생각을 하면 우울한 감정이 생깁니다. 감사의 생각을 품으면 감사할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두가 포기했을 때, 모두가 두려워 숨어 있을 때에도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하여라. 나는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전하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옛것의 기준은 시간의 순서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나이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부정과 불평 그리고 불만입니다. 새것의 기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의 순간에도, 역경의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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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카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카 8,2),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 중의 하나로(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난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밖에 보지 못하였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 하고 기뻐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명을 받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 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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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그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들음’을 통하여 힘을 드러냅니다. 특히 ‘들음’은 ‘착한 목자의 비유’(요한 10장 참조)에서 예수님의 양들이 가진 가장 독특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의 양들은 ‘들음’을 통하여 착한 목자와 깊은 일치의 관계를 맺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10,3-4)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가장 먼저 ‘들음’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에 참여하였어도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도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백처럼 우리 믿음도 들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여 참으로 살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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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하면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2)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20,11-15ㄱ)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
1)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우리 교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해서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아닐 것이고, 마리아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특별한 점’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마리아가 좀 더, 또는 아주 많이 앞서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끝까지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실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박해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는데(요한 20,19.26), 마리아는 박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고,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모습은 ‘사랑은 함께 있음’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몸’만 함께 있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과 함께 있으려고 노력해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면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사도들은 모두 자고 있었고,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26,40) 아마도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2,37-39) 이 말씀을,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 바치는 일.”이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고, 그렇게 다 바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그렇게 다 바치면,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 라는 존재는 녹아 없어지고, 내 안에 주님만 계시는 상태가 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내 안에 주님만 사시고 더 이상 나는 없는” 단계를 잘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 부활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그 단계에 도달해 있었고, 사도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들도 모두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는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치’입니다.(요한 17,20-26)>
3) “여인아, 왜 우느냐?”라는 천사들의 말은, “울지 마라.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으니.”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울지 마라. 내가 이렇게 네 앞에 살아 있으니.”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과 시신이 없어졌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마리아는 천사들의 말도 알아듣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랑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부활 신앙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던 때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실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데(요한 20,16), 그 일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눈을 열어 주신 일입니다. <마리아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신 일입니다. 주도권은 언제나 항상 예수님 쪽에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에도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알아보았는데(루카 24,30-31), 그 일도 역시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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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리운 노랫소리에 까맣게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니, 그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아쉬움과 후회에서 한동안 벗어나질 못합니다. 지나치듯 들려온 노래 한 곡에 사랑을 주고받았던 추억이 밀려듭니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사소한 어떤 계기에 수많은 기억이 소환되고는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분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분 곁에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고, 낯선 이들이 서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의 기억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른 상황 속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비록 처음에는 알아뵙지 못했지만, 그 사랑의 추억 때문에 자신을 부르시는 목소리에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발견하며 의심 없이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려면, 예수님과 나누었던 추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 추억들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야 합니다.
지나온 삶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한 기억을 잘 간직해 놓아야만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의 추억을, 그분에 대한 기억을 잘 간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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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교회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주로 창녀나 죄 많은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한 모습 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며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루카 8,1-3 참조),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와 그분의 장례 때에 그 곁에 머물렀던 이였습니다.(마르 15,40-47 참조)
또한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빈 무덤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한 첫 증인이며 선포자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 성녀를 일컬어 사도들이 세상에 선포할 것을 미리 그들에게 선포한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하였습니다.(「요한 복음 해설」 참조)
오랜 시간 우리가 ‘사도’에게만 의미를 두느라 ‘사도들을 위한 사도’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사도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초대합니다. 그 회복은 예수님께 충실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곧 그분의 말씀과 삶에 온전히 충실하고자 하는 이, 복음에 더욱 충실해지는 이가 바로 ‘사도’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세상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고 증언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거나 치유된 이들, 세상 안에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사도인 저의 복음 선포를 힘 있게 만들어 주는 ‘사도를 위한 사도’입니다. 더욱 충실한 사도가 되게 해 달라고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전구를 간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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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으로, 이러한 관점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실,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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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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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얼마 전에 어디를 가다가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 있는 분이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신호가 바뀌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그분을 따라 건너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호가 보입니다. 파란불이 아닌 빨간불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분을 쫓아 건너려고 했던 분이 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일상에서 자주 접하게 됩니다. 대화 중이던 친구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면 제 손도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잡습니다. 내 옆의 사람이 하품하면 저 역시 입을 벌려 하품하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모방 행동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 모두 공동체 안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행동만 연결되어 있을까요? 아닙니다. 감정까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의 힘든 감정을 이야기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도 감정의 동화를 느끼면서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쁘고 즐거운 감정도 전달되어서 상대 역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에 어떤 행동과 감정을 전달해야 할까요? 공동체 자체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다면, 그 영향을 받는 나 역시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가 전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성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끝날 때까지도 주님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십자가의 죽음 뒤, 무덤에 묻히신 다음에도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어서, 누가 주님을 꺼내 갔다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분이 왜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슬픔의 감정, 모든 것이 끝났다는 감정,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고,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며 전합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주님을 알아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세상에 기쁨을 전달해야 합니다. 우리도 기쁨을 속에서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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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흘려도 공허한 가슴은 채울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7,53),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여인(루카 8,2),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요한12,3) 등 복음 속의 다양한 여인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차마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고 치유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눈에서 절망의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 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끝까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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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직도 그럼에도>
요한 20,1-2.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아직도 그럼에도>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요한 20,1)
아직도
어두울 때에
그럼에도
빛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뿌열 때에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망설일 때에
그럼에도
희망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사릴 때에
그럼에도
사랑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움츠릴 때에
그럼에도
살림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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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신부님들의 자애와 배려 덕분에>
+ 찬미예수님
신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고3을 졸업하자마자 신학교에 들어간 저는 하루하루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착한 사람들만 있으리라 생각했던 신학교에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있었고 저와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규칙적인 생활, 수없이 많은 학과목들 등등 도통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그래도 1학년 때는 어찌어찌 정신없이 적응하며 보냈는데 2학년 2학기가 지나갈 즈음, 그동안 숨겨왔던 욕망들이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교는 한 없이 답답하게만 느껴졌고 일반 대학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신학교 생활이 힘들어지자 제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정말로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저런 사람을 신학생으로 뽑았을까? 하느님은 왜 부도덕한 사람들을 그냥 손 놓고 보고만 계실까? 왜 성직자는 독신을 지켜야 하는가? 끊임없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적인 갈등이 계속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업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 철학 책을 집어던지고 소설책만 잔뜩 읽기 시작했습니다. 교실의 맨 뒤에 앉아 교수님들의 눈을 피해 다양한 소설책을 읽으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견뎌냈습니다. 그렇게 시험 기간이 다가왔습니다. 서술형 시험들은 그래도 주워들은 것을 대충 적으면 F를 면할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희랍어 과목이었습니다. 고대 언어는 정확한 문법을 써야하므로 공부한만큼 솔직한 성적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고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봤습니다. 그렇게 가채점을 한 결과는 22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면 그만뒀지 희랍어 재시험을 보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다행히 믿을 구석이 있긴 했는데 중간고사 점수를 98점 받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대충 따져보면 평균 60점이 넘으니 D학점으로 통과할 점수긴 했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신학교 분위기상 괘씸해서라도 통과를 시키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점수 발표날이 다가왔습니다. 책상에 놓여있는 점수표를 조심스럽게 펼쳐보는데 “중간고사 98점, 기말고사 22점, 평균 60점 통과”라는 말이 써 있었습니다. 살았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저에게 동기들은 100점을 맞았냐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뿐, 방학이 시작되자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신학교의 성적표는 등수가 매겨져 본당 신부님들께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신부님이 형편없는 저의 성적을 볼 텐데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C학점과 D학점으로 가득한 성적표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에게 주임 신부님께서는 “너는 C,D를 구워왔구나” 말씀하시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홀했던 저의 모습을 묵묵히 넘어가주신 신부님들께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때에 저의 정신상태는 실로 심각했습니다. 2학년을 마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모든 책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침을 뱉고 나올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부님들이 저에게 성적이 떨어졌다고 꾸중을 하셨거나 힐책을 하셨다면 저는 어쩌면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뒤늦게, 신부님들이 제 동기들과 선배님들께 야고보가 고민이 있는 것 같으니 신경 좀 써주라고 당부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 잘못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참아주는 것. 매우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 한 순간에 이뤄지지 않고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차근차근 완성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이런 사소한 배려들이 쌓이고 쌓여 다시금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고 오히려 다시 성소를 느끼고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었던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자비를 통해 용서를 받은 대표적 인물입니다. 여기서 일곱 마귀는 7대 죄악, 즉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식탐, 나태 등의 죄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힘으로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뒤 예수님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녀의 죄를 사라지게 만들고 오히려 선을 향하여 나아가게끔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며, 제자들에게 이를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그녀의 과거를 돌아보면 하느님을 의심했고 그분께 소홀했으며 나아가 거부하기까지 했던 철없던 시절의 제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계기로 다시금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고 그분의 손길에 이끌려 사제가 되었으니, 그리고 심지어 제가 그토록 싫어하던 교수까지 되었으니 하느님이 사람을 쓰시는 방법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을 없애시는 분이 아니라 선하게 바꾸어 사용하시는 분임을 말입니다.
이렇게 묵상을 하다 보니 앞서 반항심에 되물었던 질문들에 대한 해답도 떠오릅니다. 제가 마음으로 의구심을 가졌던 이기적인 신학생들의 모습은 대부분 저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시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훗날 그에 합당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독신을 지키는 사제의 삶은 하느님을 더욱 성실히 따르기 위한 은총의 삶입니다.우리 모두, 때로는 죄를 짓기도 하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더욱 좋은 일에 쓰시고자 애쓰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이를 발견하고자 애쓸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여정은 오늘 독서의 고백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나는 (…)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 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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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최고봉>
-사도들의 사도-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땅, 이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 63,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심정을, 우리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벌써 가을이 온 듯 강론을 쓰고 있는 고요한 여름 밤, 풀벌레 청낭한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대는 물론 교회 전 역사를 통틀어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유일한 분이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일 것입니다. 성녀와 예수님의 사랑관계를 보면 이성간의 연정과 스승에 대한 우정의 사랑이 절묘하게 조화된, 그러나 선을 넘지 않은, 하늘을 우러러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는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최고봉처럼 생각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이름 대문자는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아이콘이된 느낌입니다. 얼마전 제가 어느 분의 단편소설에 추천의 글을 썼는데 그 소설 제목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줄인 ‘막달라’였습니다. 성녀의 아침기도 찬미가 아름다운 다섯째 연을 소개합니다.
“향기론 막달라의 고운꽃이여
예수의 사랑으로 도취된이여
당신의 타오르는 사랑으로써
우리의 마음들을 달궈주소서”
26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1998년 12월25일 주님 성탄절에 수녀님으로부터 빨간 칸나꽃을 받고 즉석에서 쓴 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였고 지금까지 무수히 나눴지만 나눌 때마다 새롭고 좋았던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의 사랑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 사랑에 목숨을 건 수도승들의 모범이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일 것입니다.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망라한 소설로 태백산맥을 읽을 때는 40대 수도생활중에도 밤을 새워 읽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인터뷰중 기자가 그의 아내 시인 김초혜는누군가 물었을 때 답변도 잊지 못합니다.
“집사람은 제게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 막달레나에 예수님이 누군가 물었을 때 역시 성녀의 답변도 이와같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그대로일 것이며 제 경우도 똑같을 것입니다.
“그분은 제게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48년전 28세 젊은 교사시절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제모습을 물었을 때 자매님과 주고받은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멋있어요! 인기가 많았겠어요!”
“그때는 멋있는 줄 몰랐어요! 그때는 인기가 좋은 줄 몰랐어요!”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교회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늦게서야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 사랑에 감격한 교회는 2016년, 그러니까 거의 2000년이 지난 다음에야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도들의 등급인 축일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을 받들어 교황청 경시성은 2016년 6월3일 교령 “사도들을 위한 사도”를 통해 ‘이날은 로마 보편전례력에서 사도들의 경축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축일 등급을 지니고 교회의 모든 여성의 모범이고 본보기인 이 여인의 특별한 사명은 강조되어야 한다.’ 밝힙니다. 서방교회는 전통적으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해석에 따라 예수님의 발에 야유를 바르며 참회하는 여인, 마르타와 라자로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한 인물로 결합시킵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도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셨고’, ‘부활의 기쁜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배경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녀에게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는 호칭을 부여했고 바로 교령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예수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한폭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그림처럼 압축적으로 드러납니다. 제1독서 아가서중 신부의 서두와 마지막 말마디는 그대로 성녀 마리악 막달레나의 고백을 방불케 합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 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오늘 복음중 감동적인 몇 대목을 나눕니다. 맨먼저 예수님 무덤에 도착한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 였고, 빈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입니다. “왜 우느냐?”는 천사의 물음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는 성녀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당신을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에 감동하신 부활한 주님께서 나타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아시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묻지만 성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로 착각하고 다시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일편단심의 사랑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르십니다. 새삼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마리아가 아무리 주님을 찾았어도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없었으면 못 만났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나눠야 할 묵상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는데 착각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정원지기 아담의 실패를 완전히 만회하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온 새 에덴 동산의 정원지기 주인공이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으로 바뀌었음을 봅니다. 여기서 또 죽음을 가져온 하와의 실패를 만회하는 생명을 가져온 마리아 막달레나의 지고한 사랑이 빛납니다. 두분의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의 돌아섬은 내적전환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세상에 “마리아야!” 부르실 분은 예수님 말고 누가 있겠으며, “라뿌니!”하고 부를 분은 예수님 말고 누가 있겠는지요? 집착해 붙잡으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류하시며 하시는 말씀에서 언제 어디서나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된 예수님 모습을 감지하게 됩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환희에 넘쳐 고백하니 바로 여기에서 “사도들의 사도”라는 호칭의 유래가 됨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덕분에 새 에덴 동산을 상징하는 이 거룩한 미 시간에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생명나무의 열매, 성체를 모시게 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한결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당신의 은총이 생명보다 낫기에, 내 입술이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치올리리이다.”(시편63,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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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의 사랑에 다그 침 받는 우리>
막달레나 성녀는 어떤 분인가? 어떤 분이라고 함이 가장 합당할까? 이번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인가? 맞는 말입니다.
성녀는 주님을 가장한 사랑한 여인인데 여인 가운데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일 뿐 아니라 사도들과 비교해도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고, 주님을 가장 사랑했다고 하는 요한 사도보다도 더.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른 사도들은 다 도망쳤어도 실제로 요한 사도만은 주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는데 그런 그도 주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엔 사랑이 끝난 듯 주님을 찾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는 빈 무덤을 보고서도 찾아 나서지 않은 그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연인을 찾아 헤매는 아가를 독서로 한 것이 시사하듯 성녀가 주님을 찾아 헤맨 가장 사랑한 여인인 것 맞습니다만 사랑한 여인 이상의 분이라고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성녀의 축일을 축일로 지내게 하였고, 감사송을 특별히 지어 바치며 성녀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명명합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성녀는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성녀도 처음에는 주님 만난 기쁨에만 머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붙잡으려는 성녀에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
그래서일까 아가서의 대체 독서인 코린토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도 다그침을 받습니까? 그래서 사랑을 넘어 사명을 실천하는 오늘 우리입니까?
늦잠을 자서 많은 묵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포르치운쿨라 행진에 들어갑니다. 혹 강론 올리지 못하는 날이 있을지 모릅니다. 저와 행진단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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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은총의 은총을 입은 마리아 막달레나!>
오늘 복음(요한20,1-2.11-18)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된 은총을 충만히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많은 자매님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일곱 마귀에 걸렸던 여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8,2) '일곱 마귀'가 전하는 의미는 '일곱(7)'이 '완전함'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완전하게 죄 중에 있었던 여인, 완전히 미쳤던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오늘 미사 감사송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또 하나의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진심어린 회개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늘 예수님 곁에 있었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실 때까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이 큰 사랑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나는 큰 은총을 낳았고,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고 증인이 되는 은총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생활의 모범'입니다.
회개의 은총,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은총,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과 행동으로 전하는 은총이 우리 안에도 충만히 내리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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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막았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다.
빈 무덤에서
가장 뜨거운
울음을
눈물을
만나게된다.
부활의
첫번째 소식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뜨거운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울음과
절망과
슬픔을
어루만져주시는
주님 부활의
기쁨이다.
부활은
진심어린
사랑이다.
가난한 마음안에
뜨거운 사랑이
되살아난다.
사랑하기에
아프고
사랑하기에
기쁘다.
사랑이 깊으면
부활의
기쁨도 더욱 크다.
되살아나신
예수님과
마음을 나눈다.
마음을 나누는
사랑의 대화는
부활의 뜨거운
현존이다.
뜨거운 사랑의
눈물에 비친
부활의 참된
사랑이다.
사랑을 위한
사랑의
부활이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진심어린
사랑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다.
사랑은
무덤을 열고
수의를 풀듯
다시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느님 사랑은
죽지 않는다.
되살아
날 뿐이다.
되살아나신
사랑의 주님을
마리아
막달레나는
분명히 만났다.
사랑의 길을
되찾은 것이다.
사랑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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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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