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일(주)
* 시작 기도
(렘 29: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주님...
주께서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유다의 포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곳에서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살며 서로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번성하고 줄어들지 않게 하라고 말입니다.
그곳 성읍의 평안을 구할 것은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바벨론 포로수용소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 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곳을 위하여 평안을 빌라고 하십니다.
주를 믿는 자는 이 무덤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할 때 결국 새 생명으로 일어나게 됩니다(롬 6:4).
하여 그 자리를 피하거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어주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힘을 얻어 새로이 시작합니다.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공동체로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성전 되게 하시고 주의 이름만 높임을 받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겔 34:17-24
제목 :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1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18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19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21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나의 묵상
본문은 이스라엘 양 떼 중에서 악한 무리를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신 내용이다.
즉 양 떼를 착취하고 방임한 이스라엘의 악한 목자들 곧 악한 정치 지도자들을 향하여 심판을 선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 정치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일반 백성들을 착취하고 횡포를 부린 일부 부유층을 향하여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17-22절).
무엇보다 이스라엘 양 떼를 위하여 한 선한 목자 곧 다윗을 보내어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실 것이다(23-24절).
하나님께서는 34장의 전반부에서는 당신의 양 무리를 강포로 다스리며 흩어지게 한 악한 목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천명하셨다.
하지만 그 심판의 대상은 악한 목자들만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양 무리들 중에서도 선악간에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신다.
여기서 양과 양, 숫양과 숫염소는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에 포함된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선민 공동체에 포함된 자 모두를 선악간에 엄중히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회 안에는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악한 양들도 있다.
교회 안에는 알곡도 있지만 알곡의 모양을 하고 있는 쭉정이들도 있다(눅 3:17).
이는 이 세상에 있는 지상 교회는 불완전하여 죄악에 오염될 수도 있고 그 안에 구원과 무관한 자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 교회 안에는 얼마든지 악한 양들과 쭉정이들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 있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나 심판에서 면제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렇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지상 교회에 대해서도 양과 염소를 나누실 것이다(마 25:31-46).
마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른편에 양을, 왼편에 염소를 두신다.
그 우편에 있는 양들에게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신다(34절).
그 이유는 주님이 주릴 때 그들이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의인으로 인정받은 양들은 주님과 다른 소리를 한다.
(37-39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의인으로 인정받은 양들은 자기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부인의 삶이다.
이들은 물론 이런 기특한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다.
양들이라고 무조건 다 그런 일을 한다는 공식은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일을 한 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일을 한 자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에서 그런 착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건 그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이었기 때문에, “내가 언제 그런 일을 했나요?” 하고 묻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일을 했을지라도, 그건 그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이며 단지 그들은 자기부인을 당한 것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기자랑이 눈꼽만큼도 들어가지 않는다.
은혜로부터 격발된 착한 일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착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자로 인정해 주신다.
따라서 그들 또한 자신들이 행했다고 평가해 주시는 그 일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실은 안 했거든.
근데 하나님께서는 “했어, 한 거야” 하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덮어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이것이 곧 구원이고 덮으심의 은혜이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그런 착한 일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자칭 양’들은 어떠할까?
이들은 자칭 양이다.
그런데 실은 양이 아니라 염소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모두 자신이 행한 義라는 마일리지에 차곡차곡 쌓는다.
그리고 명함 뒤에 다 적어가지고 다닌다.
‘40일 금식기도 3회’, ‘아프리카 선교 2회’ 등등
이들은 자신들이 행한 착한 일이나 기특한 종교행위를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자랑을 잊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열심을 부리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신다(요 8:44).
그들이 행한 착한 일이 바로 마귀의 행사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눅15장의 다른 비유에서 이들을 이렇게 꼬집으신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보다 죄인이 하나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의인 아흔아홉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이 지금 착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그들은 분명 기특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그들을 하나도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신 죄인 하나가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 돌아올 때 천군천사가 환호한다는 뜻이다.
여기 의인이라고 생각한 자들이 바로 염소다.
이들은 회개할 것이 없을 정도로 착한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바로 염소요 지옥에 갈 자들이다.
하지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하면서 오는 그 죄인 하나가 곧 양이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당신의 좌우에 갈라놓으신 후에 창세로부터 예비된 천국과 지옥으로 그들을 밀어넣으신다(33-34절).
여기서 사용된 동사들은 모두 완료형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염소들이 내어놓은 착한 일이 그들의 염소 신분을 양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거지로 나타나셨을지라도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의와 선은 절대 그들을 향해서 격발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양이다.
염소들은, 왜 당신이 나타나지도 않아놓고선 나에게 난리냐고 하지 않는가?
나타나기만 했으면 나는 분명 했을 거라는 거다.
그것이 바로 눅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이다.
이웃이 누구인지 말만 해주세요.
내가 가서 확 사랑해 버릴 테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지만 실은 그게 바리새인이다.
주님은 네가 그렇게 도움을 주는 사마리아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그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은 사마리아인처럼 남들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다.
너야 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니까, 완전한 사마리아인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라는 말이다.
마 25장에 열 처녀 비유가 나온다.
그 열 명의 처녀들은 모두 다 자고 있었다.
그렇게 자고 있던 자들 중에 다섯 처녀가 기름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 발각되자마다 신랑 곧 주인이 찾아와 버린다.
그리고 문을 닫아버린다.
그런데 나머지 다섯 처녀는 똑같이 자고 있었는데 신랑이 깨워서 데리고 들어간다.
미련한 다서 처녀의 불평은 다 같이 자고 있었는데 왜 쟤네만 깨워서 데리고 들어갔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요 편애이다.
이 비유 바로 아래에 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붙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임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편애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하나님은 공평하고 공정하며 공의로운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하나님의 공평과 공정 그리고 공의는 지극히 말미잘과 같은 단세포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삭의 아들 야곱의 편애는 아주 극단적이다.
12명의 아들들 중에 오직 한 사람, 요셉만을 편애하였다.
나머지 아들들이 이것을 가지고 시기하며 불평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어떠한 근거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으로 예표되는 야곱의 판단에 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것을 깨닫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행하심 앞에서 어떠한 불평이나 원망도 없다.
내가 비로 어려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나에게 반드시 필요해서 주시는 것임을 믿음으로 받을 뿐이다.
그것이 진짜 믿음이요 신앙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내게 주신 일들을 감사함으로 받아 믿음으로 행할 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단세포적인 이성과 사고의 조각에 따라 주님을 판단했던 아주 몰상식한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전부인 양, 에덴에서의 아담처럼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 나는 하는 일마다 어그러지고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실패가 결국 나를 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두 손을 들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내가 어찌 되든 주님의 행하심은 공정하고 공의롭습니다.
내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인 줄로 생각하였던 나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수모를 당하는 것이 싫어서 남들에게 착한 일을 하려했던 나는 바보 중에 바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바보라도 좋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그런 바보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나의 육신의 일을 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 앞에서 나 자신을 더 내려놓게 하시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