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두 가지 방법의 신행을 합니다. 하나는 자력신행인데 바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입니다.
보시 참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사실 범부는 첫 번째인 보시조차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보시를 어떻게 합니까? 쌔가 빠지게 번 내 재산을 조건없이 누구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무주상보시까지 들먹입니다.
보시, 그거 잘못하면 큰 일 납니다. 공연히 남을 도와준다고 하다가 큰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무주상보시는 범부로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범부는 조건적 보시를 합니다. 내가 보시를 베푼 사람이 나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큰 실망을 하게 되고 결국 싸움이 일어나 원수됩니다.
방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쌍한 황조롱이 한 마리 구해주면 그 황조롱이가 평생동안 잡아먹는 아기새 어머새 그리고 쥐들이 수천 마리는 되지않을까요? 내가 살린 그 한 마리가 다른 수천 마리의 생명들을 앗아갑니다. 방생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러면 어쩌라고요? 그건 자기가 다니는 절의 스님께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범부는 보시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신세인 것입니다.
지계는 어떻습니까? 이 험한 세상에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계율을 지킨단 말입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뭐든지 해야 돈을 벌어 처자식을 먹여살릴텐데 이것 저것 다 따지고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인욕은 어떻습니까? 스님이라도 신자들 잘 되라고 싫은 소리 함 해보소. 바로 삐집니다. 내 절에 안 옵니다 못 가겠다며 갑질 해 버립니다.
정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도 일주일에 한 번은 씻어야 하는데 마음을 씻으러 일주일에 한 번 절에 오라고 하면 바쁘다고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마지막에 지관은 더 어렵습니다. 지관은 참선과 지혜인데 범부가 어떻게 참선을 하며 어떻게 지혜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참선을 하면 마구니가 달려듭니다. 마구니는 사실 별 볼일 없는 자는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범부는 걱정 안해도 됩니다. 범부는 참선을 해도 마구니가 달려들지 않지만 그런데도 중간에서 다 꺾여 버립니다. 그것은 그 종자가 너무 오염되어서 그렇습니다. 신행의 장애는 자신의 업의 발현일 뿐, 魔조차 건드리지 않는 복없는 범부는 참선을 하기 전에 반드시 피나는 참회부터 해야 합니다.
참회없이 참선해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그들은 바늘 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앞의 네 바라밀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보시함으로 해서 공덕이 쌓이고 공덕이 쌓여야 계율을 지킬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이 비축되지 않는 자는 계율을 지킬 수 없고 계율을 지키지 못한 자는 인욕할 수 없습니다.인욕하는 자만이 참고 견디며 정진하고 정진하는 자 만이 선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뭘 얻으려고 합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참선은 무엇을 얻으려 할 때 이미 참선의 목적은 10만 8천리로 틀어져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참선을 해도 해도 안되면 이제 비파사나 수행을 한다고 합니다. 참선과 비파사나가 다릅니까? 참선을 해서 안되면 비파사나 수행을 하면 깨달음이 얻어집니까? 다지무야도꿈 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꿈도 야무지다는 말입니다. 달마대사가 왜 비파사나 수행법을 갖고 오지 않고 선법만 갖고 중국에 왔겠습니까! 정말 웃기는 짬뽕이고 웃기는 짜짜로니입니다.
뭐 부처가 비파사나 수행법으로 부처가 되었다고요? 공갈치지 마십시오. 부처는 참선으로 부처가 되었지 비파사나로 부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비파사나로 부처가 된다면 남쪽나라 수행자들은 이미 다 부처가 되어버렸겠네요. 참말로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이번에 단단히 아셔야 합니다. 대승수행의 참선에는 비파사나 수행법과 사마타수행법이 다 들어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애들이 엄마를 부를 때 마미라고 하거나 어머니라고 하거나 모친이라 하거나 다 엄마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엄마를 뭐 모친이라고 하면 더 효성스럽게 느껴집니까? 언어의 작난에 속지말고 그 속에 들어있는 뜻을 취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가 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화엄경도 배우고 법화경도 배우고 금강경도 아미타경도 배우고 능엄경도 죽자 살자 배웁니다. 끝없이 배우고 또 배웁니다. 그래도 뭔가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그 내용을 담을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그런 말씀이 가슴에 들어오겠습니까? 경전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경을 보고 경안이 열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가르치는 사람은 입 아프고 듣는 사람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지요.
대승경전을 배우다가 안되니 이제 니까야 니까야 하면서 니까야에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들 얼마 전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관세음보살을 목이 타게 부르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마음 바꿔 광명진언하다가 밤새워 다라니기도까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안되니까 이제 니까야에 몰려듭니다.
니까야가 뭡니까? 아함경입니다. 아함경이라고 하니 느낌이 시들합니까? 니까야라고 하니 신선하게 들립니까? 이미 그것들은 대승경전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꼭 대학교 교재 속에는 초등학교 교재가 다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니까야를 다 배워 보십시오. 그것에 만족하는가. 절대로 만족치 못할 것입니다. 그럼 그때 또 무엇을 찾는지 아십니까. 니까야조차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경전이 아니다. 직설은 따로 있다카면서 이제 우따나나 이띠웃따까 숫타니파타 같은 것들 배운다고 바쁠겁니다. 그러다 아무 소득없이 늙어 죽습니다. 기분 나빠도 어쩔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범부가 이 다섯 가지 수행을 하면 복이 생깁니다. 참선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대승불교에서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단지 마음에 복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에 복이 생기면 이제 죽지 않으려 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쉽게 죽습니다. 인생에 미련 없습니다. 내떡 니 몰라라 카면서 확 죽어버리려 합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고 돈이 많은 사람은 안 죽으려 합니다.
마음에 복이 많으면 안 죽으려고 합니다. 복이 죄업에서 본래의 자신을 일으킵니다. 본래의 자신은 죽는 자가 아닙니다. 몸은 죽으려 하는데 자기는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참 어렵게 죽습니다. 수행을 많이 하면 죽을 때 편히 잘 죽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죽을 때 만정이 떨어져봐야 두 번 다시 중생의 몸을 받으려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참선한 결과로 주어지는 복덕의 힘이자 가치입니다.
첫댓글 오! 감사합니다!
마지막 법문 구절은 들을 때 마다 쇼킹합니다.
이렇게 글자로 보니 더 섬뜩합니다.
꼭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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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