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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학교 등굣길에 미나를 만났다. 그 오랜 시간 서먹했던 미나였지만, [해결사가족]이라는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왠지 서먹함이 덜하게 느껴졌다. 소은이는 조금 앞서 걷고 있던 미나에게 걸음을 빨리하여 다가가 옆에 붙어 섰다.
“어제 마지막 회 봤니?.”
미나는 옆을 돌아보고는 소은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순간 멈칫했지만, 미나 역시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서먹한 기분이 풀린 모양인지 슬쩍 웃어보였다.
“당연히 봤지. 마지막 회 정말 눈물 나지 않았니?”
미나는 마지막 회 보면서 울었던 모양이었다. 소은이는 대답했다.
“사실 난 어제 못 봤어.”
미나는 의외라는 듯 소은이를 다시 돌아보았다.
“어머, 왜? 넌 나보다 더 마니아잖아”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거든. 어제 못 봐서 무지 궁금한데, 너한테 어제 내용을 들을 수 있을까 모르겠어.”
미나는 소은이와 같이 걸으면서 어제 방영된 [해결사가족]의 마지막 회 내용을 상세히 얘기해줬다. 소은이는 그 내용을 들으면서 궁금증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마지막 회를 보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왔다.
“근데 미나야, 어제 레이첼은 어땠어?”
“레이첼..... 사실 그 애가 어제 이상했어.”
“이상하다니?”
“연기가 불안정했다고 해야 되나. 암튼 평소와 다르게 너무 어색했고 얼굴도 평소만큼 예뻐 보이지가 않았어. 뭔가 불안하고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았던 것 같았어.”
소은이는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레이첼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무컵이 없어 연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걸까. 미나가 멈춰 선 소은이를 뒤돌아보았다.
“넌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소은이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친 소은이는 교실에 돌아와 다시 미나에게 갔다. 그리고 오전 내내 할까 말까 고민했던 말을 결국 미나에게 얘기했다.
“미나야, 전에 [해결사가족] 드라마 땜에 너하고 나하고 다툰 적 있잖아.”
미나는 고개들어 소은이를 쳐다봤다.
“소은아, 그 얘기는 하지 말자. 그 때 내가 너한테 심했던 거 나도 알아. 늦었지만 사과할게. 미안하다. 그러니 이제 그만.”
“지금도 그 말 믿지 않는 거구나.”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말이야.”
소은이는 자세를 고쳐 미나를 바라보았다.
“너한테 보여 줄 게 있는데.”
“보여줄 거? 그게 뭔데?”
“네가 상상도 못할 물건이야. 지금 집에 있는데, 그런 물건을 학교에 가져오긴 좀 그렇고, 이따 우리 동네 근처에서 만날래?”
소은이와 미나는 늦은 오후에 서로의 집 중간 지점에 있는 한 근린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에 돌아온 소은이는 책상서랍을 열어 나무컵을 꺼내 빈 종이상자에 넣었다. 미나가 나무컵을 본다면 내 말이 사실이었다는 걸 믿겠지. 종이상자를 들고 긴장된 마음으로 집을 나와서 미나를 만나기로 한 공원으로 갔다. 미나는 미리 나와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은이는 벤치에 앉아 조심스럽게 종이상자를 열고 나무컵을 꺼내, 미나 앞으로 내밀었다.
“이 나무컵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미나는 나무컵을 잠시 동안 자세히 살피더니 드디어 감을 잡았다.
“해결사가족에서 본 것 같은데. 맞아, 그 집의 주방에 이런 게 있었어.”
“미나야, 이게 바로 그거야.”
소은이는 나무컵을 손에 넣게 된 그동안의 상황을 미나에게 아주 디테일하게 설명했다. 소은이 말을 다 듣고도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해 하는 미나에게 소은이는 계속 말했다.
“내가 레이첼이 가지고 있던 컵과 똑같은 컵을 어디서 구했겠어. 네가 TV에서 본 모양 그대로, 색깔 그대로, 무늬 그대로인 컵이야. 만일 이게 짝퉁이라면 새것이어야 할 텐데, 자 봐, 이 컵이 어디 새것 같아? 오래돼서 표면도 맨질맨질해.”
“정말.... 정말 믿겨지지가 않아. 소은아, 이게 사실이라면 이 컵은 보통 컵이 아냐. 가격도 어마어마할 걸?”
“미나야, 이건 언젠가는 레이첼에게 돌려줘야 돼. 가격이 얼마인지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할 수가 있어?”
“소은아, 너 정말 돌려줄 생각이 있는 거니?”
“돌려줄 생각? 당연한 거 아냐?”
“근데 너 왜 어제 드라마 보지 않았어? 이걸 갖고 싶어서 일부러 안 본 거 아냐? 이걸 돌려줄 생각이 있었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드라마를 봤어야 했을 텐데 말야.”
“그 그게 말이지....그 때 마침 집에 손님이 오셨어. 엄마 친구들인데 거실에 모여 말씀하시는데 TV를 볼 수가 있어야 말이지. 게다가 중요한 얘기들을 하고 계신 것 같았는데 거기에서 내가 어떻게 TV를 봐?”
미나는 어떤 대꾸 대신에 소은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 말 사실이냐는 듯한 눈빛 같아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소은이는 미나의 시선을 개의치 않은 척하며 계속 말했다.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려줄 거야. 꼭 그렇게 해야 돼.”
“어떻게 돌려줄 건데?”
“레이첼 데이비스는 다른 드라마에 출연할 거야. 그 드라마는 한국에서 방영될 거고. 그 때 돌려주면 돼.”
미나는 연신 소은이를 쳐다봤고, 소은이는 짐짓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역배우 공개오디션 공모가 그로부터 약 두 달 후에 인터넷에 떴다. 한 엔터테인먼트사에서 청소년 드라마에 출연할 다섯 명의 아역배우를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여러 오디션 공모를 눈여겨 봐왔던 소은이는 바로 이번 기회에 도전해 보리라 마음을 굳히고, 제출서류양식을 다운받아 작성하여 기획사 홈페이지에 접수시켰다. 며칠 후 그 기획사에서 오디션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고, 소은이는 그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다. 엄마는 하늘의 별따기라며 난색을 보였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오디션현장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하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말이다, 소은이 너 평소에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내비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연예인에 대한 끼도 엄마한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엄마는 아무래도 소은이가 아역배우 오디션을 본다니까 영 못미더운 모양이었다.
“엄마, 요즘 연예인은 끼 부리지 않는 평범한 모습이 더 메리트가 있는 거야.”
“끼 부리지 않는 평범함 자체도 결국은 끼잖아.”
“걱정 마 엄마. 내 주위사람 모두를 깜짝 놀래킬 컨셉이 이미 다 마련돼 있으니까.”
소은이가 이렇게 큰소리치는 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나무컵이 가져다 줄 행운에 대한 믿음 또한 적지 않았다. 나무컵을 지닌 채 오디션에 참가하면 왠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이 강렬하게 소은이 안에서 인 것이다.
접수한 지 며칠이 지나고 오디션 보는 날이 되었다. 소은이는 나무컵을 잘 챙겨 가방 속에 넣었다. 새로 다니는 직장에서 하루 휴무를 얻은 엄마와 함께 소은이는 아침 일찍 오디션 장소에 도착했다.
정해진 시간보다 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오디션 현장은 수많은 참가자들로 북적였고,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땐 인산인해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듯 소은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는 마.”
“실망 안 해. 난 꼭 될 거니까.”
소은이는 엄마를 밖에 남겨두고, 다른 아역참가자들과 함께 안내자 지시에 따라 대기실 안으로 향했다. 벽면 한쪽 전체가 거울로 되어 있는 대기실 안에 설치된 기다란 의자에 접수번호 순서에 따라 앉은 소은이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어 나무컵을 슬쩍 꺼내 보았다. 컵을 보자 다소 긴장이 완화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컵을 가방에 집어넣으려 할 때 누군가가 저만치서 소은이를 향해 외쳤다.
“어머, 그 컵!”
한 여자아이가 소은이에게 다가가더니 옆에 앉으며 소은이가 들고 있는 나무컵을 보며 신기해했다.
“나 이 컵 알아. 얼마 전에 방영한 [해결사가족]에 나왔던 거야.”
소은이는 고개 돌려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소은이 또래로 보이는 아이였다.
“너도 그 드라마 봤구나.”
“그럼 굉장히 재밌게 봤어. 근데 그 드라마에 나온 것과 똑같은 컵을 어디서 구했어? 파는 데가 있나?”
“누가 나에게 줬어.”
설명하자면 간단치 않은 이야기라서 소은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너도 오디션 보러 온 거야?”
여자아이는 친근하게 물었다.
“응, 근데 생각보다 참가한 아이들이 엄청 많네.”
“그러게 말야. 그래도 경험 삼아 이렇게 한번쯤 오디션 보는 것도 괜찮지. 근데 넌 어디 살아?”
아이는 소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서유리라고 해. 지금 5학년이고 서울에 살아.”
소은이는 서유리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를 받았다.
“난 김소은이야. 나하고 같은 학년이네. 우리 집은 여기서 얼마 안 멀어. 암튼 같이 이렇게 오디션을 보게 됐으니 이것도 인연이네.”
“그러게말야. 근데 어느 연기학원 다녀?”
“난 연기학원 안 다니는데.”
“학원 안 다닌다고? 혼자 독학해서 온 거란 말야?”
“응.”
“우와, 대단하다. 그거 되게 어려운 건데.”
“그래서 나 역시 경험 삼아 온 거야. 되면 좋고 안 되도 아쉬울 거 없고.”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지 뭐. 어쨌든 오디션 잘 봐. 행운을 빈다.”
“나도 행운을 빌게. 꼭 좋은 결과 얻어서 나중에 방송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유리는 소은에게 파이팅의 뜻으로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오디션은 네 명의 심사위원이 했다. 일곱 명씩 한 조가 되어 심사위원 앞에 나가 각자의 즉흥연기와 특기, 장기자랑으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는 그저 평범한 오디션 형식이었다. 참가 아이들은 심사위원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기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교태를 부리기도 하고 막춤을 추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게 섹시댄스까지 춰댔다.
앞 순서 참가아이들의 오디션이 모두 끝나고, 이제 소은이가 속한 조가 무대로 걸어 나가 심사위원 앞에 나란히 섰다. 심사위원들의 번득이는 눈빛들, 공중에서 자신을 찍어대고 있는 몇 대의 카메라들에 소은이의 가슴은 더욱 긴장되었다. 긴장한 내색을 떨쳐내느라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소은이는 메고 있던 가방 속에서 나무컵을 꺼냈다. 그리고 몇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가 나무컵을 바닥에 놓고는 다시 뒷걸음질로 본래 자리에 섰다. 심사위원 하나가 의아하게 소은이를 쳐다보았다.
“그게 뭐예요?”
“제 친구의 소중한 물건입니다. 친구는 저 컵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해서 제가 친구한테 잠깐 빌렸습니다.”
심사위원은 소은이의 말에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저도 행운을 빌게요. 그런데 상당히 눈에 익은 물건이네요.”
심사위원은 전체 참가자들을 한 번씩 둘러보더니 맨 오른쪽 아이에게 친구가 없어 외로울 때의 표정을 주문했다. 그리고 다음 아이에게 친구에게 놀림 받아 화가 났을 때의 표정을 해보라고 했다. 소은이에게는 무서운 영화를 봤을 때의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라고 했다. 역시 나무컵은 행운을 주는 컵인가 보았다. 놀란 반응의 연기는 소은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줄 아는 연기컨셉이었다.
소은이가 속한 조의 아이들은 그 외에 저마다의 특기와 장기자랑을 한 번씩 심사위원들에게 보여주고는 예상했던 것보다 간단하게 퇴장을 했다. 오디션이 너무 빨리 끝났기 때문에, 소은이가 속한 조의 아이들 중에 합격을 줄 만한 아이가 보이지 않아서 심사위원들이 대충 해서 퇴장시킨 거 아닐까 하고 소은이는 은근히 염려가 됐다.
“워낙 참가자가 많았기 때문에 시간 안배를 고려한 걸 거야.”
소은이의 염려에 엄마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소은이를 데리고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합격자는 9월 말경에 개별 통보를 해주기로 돼 있었다. 워낙 경쟁률이 높아서 기대가 낮아지긴 했지만, 합격자 발표 시기가 임박해오자 소은이는 은근 긴장이 되었다.
“연락이 안 오더라도 좌절감 느끼거나 그러지 마. 엄만 네가 혹시 그럴까봐 그게 가장 걱정이야. 너는 앞이 창창하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거니까 그냥 경험 한번 했다고 쳐.”
그렇게 다독여주는 엄마지만, 사실 소은이가 보기에 소은이 자신보다 엄마가 내심 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9월 마지막 주가 되자 엄마는 틈만 나면 소은이에게 전화했다.
“연락 왔니?”
소은이는 슬슬 대답하기가 진이 빠졌다.
“엄마, 연락 오면 내가 당연히 엄마한테 제일 먼저 연락 하지. 연락이 안 왔으니 그냥 이러고 있는 거 아냐.”
9월이 다 가고 기어코 10월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