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제도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해되면 좋겠는데요, 아직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위키만 좀 읽어 보다가 눈에 띄는 것이 있어 여기 글을 올립니다.
기본소득제는 전혀 복지론인 발상이 아닌데, 행태적으로 무상으로 배분하는 것이 같다 하여 복지적 제도로 보이는 듯하여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것은 사람의 이기심이나 인자함과 같은 인간의 성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고, 오로지 '천부인권과 같은 권리'에 해당한다는 점이 아주 새롭습니다.
기본소득제는 어떤 사회, 어떤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권리가 주어지는 '사회적 배당'이라는 점이 특별히 부각됩니다.
기본소득제는 어떤 사회(즉 '국가'라는 주식회사)의 일원으로 참가한 국민에게 그 사회가 거두어 들인 총소득에 대한 주주지분을 무조건적으로 1인1주의 동일배당으로 분배(1/n)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어떤 사회가 주식회사라고 한다면, 그 회사의 주주들이 배당을 받는 것은 누구로부터 시혜적으로 또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분배하여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것일 것입니다. 만약 그 사회가 잘 나가는 주식회사라면, 당연 배당이 많을 것이므로, 가난한자건 부유한자건 모두가 그간의 증오나 갈등을 잊고 우쭐대거나 뻐겨가면서 '자랑스런 사회, 자랑스런 나라'라 부를 것입니다.
위키에 있는 <알라스카의 예>는 이 제도에 의하여 아주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이주민 도래자의 경우까지 그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기본소득제는 철저히 고도화된 자본주의적 발상이면서 자본주의가 인간의 면모를 동시에 갖추는 '사회통합적' 모습을 보일 것 같습니다. 즉, 기본소득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면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찰떡 동반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보입니다.
저는 '사회적으로 배당받을 권리'(기본소득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필요를 충족하는 자원으로,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여유로운 삶를 진정으로 행사하게 하는 보람찬 방법이 될 것으로 장차 전체적인 인간회복의 새로운 장을 펼치게 할 것이라 내다 봅니다.
그것이 분배를 통하여 비록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는 하나 현재의 양극화가 가속 하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시민사회의 선택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로써 사회는 현재의 갈등을 뛰어넘어 한차례 진보를 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내다 봅니다.
정리하면, 기본소득제는 국민된 사람의 '권리'라 이해해 봅니다.
참고 : 기본소득 위키 http://ko.wikipedia.org/wiki/기본소득....깨 (tr.****)
세상을 보는 눈은 다양합니다..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것을 분석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니 말입니다..
저에게는 또 다른 신선감을 주엇던 깨님이 보는 기본소득 입니다..
기본소득을 반대하시는 리드미님의 글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본소득제에 관한 비판적 추언..........리드미....
저물어가는 내 인생의 목표는 마지막 화려한 백수이기에 기본소득제의 실현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는다.
내가 만일 위대한 룰라의 브라질에 살았다면, 세계 최악의 빈곤과 양극화 더구나 문맹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브라질 인민들에게 룰라가 소년시절 잃어버렸던 새끼손가락 하나의 도움이라도 주려는 그런 고통의 공감과 양심을 가진 정치인이었다면, 브라질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으로서 기본소득제의 실현을 위해 투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대한민국은 남아메리카의 브라질이 아니다. 축구와 삼바와 리오의 카니발을 빼놓고서는 민족국가(nation)로서의 정체성이 없는 다민족, 다계층, 심지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다른 종(種)의 동물이나 노예로 간주하는, 만델라 이전의 남아프리카와 같은 아파르타이드의 전근대적 사회가 아니다. (브라질 부유층들의 국적은 그들의 조상이 그렇듯이 아직도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국이다.) 대한민국은 아프리카의 알제리아도 아니며 유럽의 핀란드도 아니다. 문맹률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고등교육률을 자랑하면서도, 앞으로 10년 이내에 국민 거의 모두가 박사님이 아니라면 석사학위 쯤은 간판 걸게 될 나라이면서도, 초등학교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한 대다수 브라질 인민들의 정치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그런 이상한 나라가 우리의 대한민국이다. 이상한 나라라기 보다는 무엇에인가 완전히 미쳐버린 나라이다.
그 무엇은 돈이다.
대한민국에서 돈은 돈이 아니라 종교이다. 돈이 지배하는 정치를 금권정치(ploutocracy)라 희랍인들은 이름 붙였으나, 대한민국은 이미 금권정치을 넘어서 돈이 신으로 둔갑한 신정정치(theocracy), 성경에서 예언했던 맘몬(Mammon)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역사와 전설에서 맘몬의 나라들은, 소돔과 고모라와 바빌론과 예루살렘과, 이후 잉카와 잉카를 침략했던 스페인도 멸망해야 했음을 배웠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맹목적으로 탐욕했던 바로 그 돈 때문에 당연히 멸망의 운명 앞에 있다.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미친 나라의 미친 국민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브라질의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기치 아래 결국 자본가를 위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와 지구의 대량파괴와, 나아가 민주주의를 소비자 대중이라는 돼지들의 거대한 사육장으로 만들어버린 케인즈 류 수정주의의 방탕이 아니었다. 브라질의 기본소득은 국민교육을 위한 투자였다.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게 된 브라질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길거리의 거렁뱅이나 소매치기로 내몰지 않고 학교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배운 아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알게 되었고, 배움으로써 더 잘살 수 있다는,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노동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뱅크도 비슷한 교육적 역할을 하였다. 국가 시스템이 부재한 사회에서 빈민들에게 공여된 최소한의 화폐소득은 자본주의 착취의 전단계인 화폐화(monetarization), 즉 화폐침략(강탈적 고리대금과 사기적 불평등교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경제적으로 양극화 이전에 양극성 정신분열 증상에 빠져 있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브라질의 볼사 파밀리아가 옆 나라 콜롬비아의 마리화나나 코카인보다 더 효과적인 역할을 하게 될지 아닐지는 과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벌써 이 나라에서 노령연금은 노후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교육과 문화 활동에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비 개독목사가 이끄는 수구꼴통들의 시위 뒷 켠에서 소주와 오징어 다리 냄새 푹푹 풍기며 젊은 세대들에 대한 욕지꺼리로 대부분 되돌아오고 있다. 노인들을 위한 무료승차권이 파고다 공원과 온양 온천에서 노인성병의 원인이 되고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캐나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에스키모 인디언 아보리젠들에 대한 연금이 알콜중독과 비만과 우울증을 통하여 결국 토착민 사회와 문화의 파괴자가 되었던 것처럼, 만일, 대한민국 사회의 노인층과 빈곤층의 대량학살이 목적이라면, 기본소득제 만큼이나 달콤하지만 확실한 수단은 없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불쌍한 인민에게는 동정과 도움이 비참을 극복하는 작은 위안과 격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을 탐욕이라는 광란의 엑스타시에서 깨어나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 기초소득이라는 대체마약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마약이 없는 나라, 즉 돈이 필요없는 나라로 만드는 길 뿐이다.
어제의 가난했던 나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최근의 경제학은 지구와 인류 보존을 위한 생산과 소비의 감소 즉 국민소득의 감소를 통한 국민행복의 증대를 위하여 연구하고 있다. 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보다 착하게 지내자는, 과거회귀적인 플라톤적이요 자연회귀적인 루소적인 사상이 탈(脫) 시장주의 이론과 함께 장래의 경제학의 주제가 되고 있다. 돈을 덜 벌어도 좋으니 공해없고 경쟁없는 사회에서 잘 살아볼래? 덜 먹고 덜 싸고, 한편 덜 일하고 덜 괴로워 하며, 그리하여 시원한 여름날 저녁의 남은 시간을 이천오백년전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에서처럼 모여, 책임있는 시민으로서, 모두가 자기 개인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일원으로서, 공공의 정책(politics)을 토론하는 시간으로 사용할래?
모든 경제발전은 필연적으로 잉여노동을 낳는다. 자본의 원천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떠나서, 자본의 축적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잉여노동이 착취나 강탈의 대상이 되거나, 다시 자본주의적 착취나 강탈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지 않게 하려면, 현재 주어진 생산력의 수준에서 잉여노동을 최소화하거나 (즉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아니면 잉여노동이 공공의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을 위해 투입되도록 해야 한다. 노동 역사의 발전은 노동 시간의 점진적인 감소를 가져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아직 발전에 따른 충분한 노동 시간의 감소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신분열적 이기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잉여생산의 쓰레기를 자기의 뱃속에 쳐넣기 위해서 하루 열 몇시간을 일하며 자기의 뱃속에 쳐넣을 쓰레기를 생산한다. 돈의 신을 추종하는 교육과 언론이란 이름의 제사장들은 탐욕이 행복이라며, 돈을 탐하라 그리하면 너(개인주의)와 네 집(가족주의)이 구원함을 얻으리라며 설교하고 있다.
국민은 쓰레기통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단계와 사회적 상황에서 기본소득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의 현상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현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돈을 뿌려 소비를 촉진하자는 주장은 인플레이션이나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경제사회의 발전이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그 해악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세금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강제저축이라면, 그렇게 국민이 피땀 흘려 절약한 돈을, 아무리 케인즈의 이름으로 치장되고, 포스트 마르크스 이후 말초적인 심리학과 사회학과 심지어 미학의 언어로 포장된 진보의 소피즘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국민의 저축을 국민생산적 투자가 아니라 대중인기적 소비에 쓴다는 것이 과연 정의인지는 곱씹어보아야 한다.
단순히 체제유지를 위해, 소위 민주주의라는 데마고지 인기투표의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마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막걸리와 고무신처럼 소비자 대중에게 그들의 돈, 국민의 돈을 뿌려, 독점 자본가들이 만든 싸구려 물건을 사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국가의 임무인가? 아니면 부패하고 무능한 꼭두각시 정부의 책임회피인가? (물론 이명박의 사대강과 같은 날강도질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혹한 폭정은 국민에게 비밀한 혁명의 꿈이라도 갖게 하지만, 방종은 다만 국민을 나태하고 비열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세금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쓰여야 한다. 세금은 공공재(res publica)의 형성을 위하여 쓰여야 한다. 이것이 공화국(republic)의 원리이다. 부자는 당연히 세금을 많이 내고 빈자는 따라서 세금을 적게 내야 한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살기가 힘들수록 부자는 더 많이 빈자는 더 적게 세금을 내야 한다. 이것이 폭력적 혁명없는 평화적 진화의 원리이다. 즉 세금은 경제전반에서 국유화와 국립화를 실현함으로써 생존재와 자본재의 무상화와 탈시장화를 지향하는 국민권력의 강력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세금은 세금이 필요없는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 이것이 경제학의 목적이다....
어떠신가요?
너무 이상적일 까요?
이런 글들을 읽어 보면서 우리들의 소양을 쌓아두면 후세는 그것을 빼내 쓰기만 하면 됩니다..
첫댓글 하자님 요약좀 ㅎㅎ
간단한말로 설명할수있어야 이해한거라 했어요.
내용이 하자님의 생각을 통해서 나오면 글의 일관성이있을수있는데 매번 여러 필자로부터 나오니 볼때마다 난해하다 혹은 뭔가 간과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집중력을 떨어뜨리네요.
가장 논란이 되는거부터 정리하는건 어떨까요?
기본소득제의 당위성은 다들 동감할겁니다.
다만 의견이 갈리는게 재원문제, 노동기피문제, 인플레이션문제등인것 같아요.
이렇게 몇개의 카테고리로 접근하는게 일관성이 있을것같습니나.
제 의견입니다
항상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꼬마야님은 정확히 이해를 하셨을 내용 정도로 보이는데..모지란 저하테 떠넘기시네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의 독점을 경계 합니다..자본의 욕심은 끝이 없고 제어가 안되기 때문에..
그 부분을 국가가 개입해서 제어 해야 한다고 말하죠...
신자유주의를 만든 그시키 또한 그러 했구요...이것을 민주주의의 변화과정..인민>국가>자본에서 자본>국가>인민
으로 바뀌는 시대 흐름에서 국가의 개입은 필수적이라 했습니다..(ㅁ문제는 이러한 힘의 이동에서 국가는 제어기능을 담당해야 하는데 자본의 시녀로 바뀌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잉여노동이 확대되고 그 가치마저도 인민의 몫이 아닌 자본의 몫으로 돌아갔지만 .
국가는 여전히 자본의 편에서서 빨대에 힘을 보태게 되니 ....
ㅣ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다시 국가가 개입하여 공공부분을 확대하는 것이 기본소득을 하는것보다 나은 방향이다..
뭐 이런 풀뜯어 먹는 소리 입니다...이럴거면 결국 맑스로 돌아가자 하면 될것을....굿이..시간 다지나고 사람들 힘겨운데.. 여기서 대안을 내놔야 하느것 아닐런지...
악~~ 정리해주셨네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올리시는글에 좀만 요약을 해주시면 독자들이 훨씬 많이 늘어날것으로 생각됩니다.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꼬마야 참 나쁜 취미를 가지신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