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이야기-60년, 그 우정의 세월, D-day/夫唱婦隨
흔히들 ‘다름’과 ‘틀림’을 말한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논조는, 대체적으로 자기 견해만 옳다 하면서 다른 사람의 견해를 틀렸다 하면 안 된다는 논조다.
Daum사이트에서 그 논조의 한 예를 찾아봤다.
Daum카페에서 ‘2017년 올해의 우수카페’로 선정된 ‘5670 아름다운 동행’에 그 예가 있었다.
5년 전으로 거슬러 2018년 9월 10일에, ‘예풍인’이라는 필명의 회원이 ‘다름과 틀림’이라는 제목으로 게시한 글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 글을 퍼왔다.
다음은 그 글 전문이다.
사람들에게 ‘+’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면 교사는 덧셈, 교통경찰은 ‘사거리’, 약사는 녹십자, 신부는 십자가라고 한단다. 학생들이 싸움하는 현장을 보면서 경영학 교수는 ‘싸우는 양쪽 모두 손해야!’, 의류학과 교수는 ‘옷 찢어질라!’, 정신과 교수는 ‘이것들이 미쳤나?’ 한다는 유머를 한 번쯤 접했을 것이다.
이렇게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같지 않은 여러 생각을 ‘틀림’으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다름’의 관점에서 서로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풍토가 형성되어야 그 집단, 그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사회에서의 ‘다름’은 ‘차이’가 아닌 서로 같지 않은 개성의 다양성이며 그 다양성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 ‘틀림’은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어떤 경우든지 고쳐서 바르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항상 옳다는 망상 즉, ‘다름’을 ‘틀림’으로 애써 덮어씌우려는 오만한 자만심 때문에 서로 반목하고, 싸움하고, 십년지기도 금방 원수가 되어 갈라지는 모습이 안타깝다. 특히 정치꾼들이 선거 때가 되면 자신의 부족한 능력과 검은 속내를 숨기려고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의도적으로 상대 공약을 틀림으로 매도하여 비방하는 등 네거티브 선거운동을 일삼는 이 같은 소인배들의 정치문화도 늘 아쉬운 대목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몰아가는 것은 남이 잘되는 것을 샘 하고 미워하는 마음인 시기심이라고 한다. 시기심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으로 파괴적이다. 시기심이 파괴적인 이유는 그것이 나쁜 것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파괴하려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시기하는 외적 관계는 시기하는 내적 관계로 이어져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 혼돈되고 공격받고 파편화됨에 따라 정체감과 자기 가치감에 큰 혼란을 일으킨다. 박해 불안에 사로잡혀 무엇이 진실인가에 관심이 없고 개인적인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모든 나쁜 것은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가정, 아름다운 이웃, 신나는 직장을 원한다. 그렇게 만들고 가꾸어나가려면 가장 소중한 요소가 무엇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틀림’을 바르게 고쳐나가는 겸손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기심이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냉정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한다. 이해, 인정, 지지, 배려, 희생, 봉사, 사랑, 행복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자존심으로 키워야 한다. 시기심이라는 덫에서 깨어나기 위한 치료는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말을 강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지 않은가? 물을 먹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다.
정치권도 개혁되어야 하지만 우선, 우리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가정, 이웃, 직장에서만이라도 달라졌으면 좋겠다.//
나 역시 공감이 가는 논조였다.
그러나 그 글에는 빠진 것이 있었다.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그 ‘남’에 대한 범위다.
내 인생에 별로 상관이 없는 남이라면, 나도 그 논조와 하나 다르지 않는 논조를 펼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는 남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
달라서 다투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속담이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쉽게 말해서 각자 다른 생각을 내세우다보면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일 게다.
상관이 있는 남들이라면, 뭔가 일을 추진하기 전에 생각을 하나로 맞추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상관이 있는 남들 중에는, 더더욱 뜻을 하나로 맞추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 지붕 아래 한 솥밥 먹고 사는 가족들이다.
그 중에서도 제 일은, 곧 남편이고 아내다.
말하자면 부창부수(夫唱婦隨)해야 할 사람들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으니, 생각 맞추기가 그리 어렵지도 않다.
생각을 맞추지 않으면, 허구한 날 싸울 수밖에 없다.
나도 참 많이도 싸웠다.
안 좋은 줄 알면서도 싸웠다.
그러나 갈라 설 작성을 하고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로지 생각 맞추기를 하려고 싸웠을 뿐이다.
결국 다른 생각을 늘 하나로 맞췄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부창부수 바로 그것이다.
우리 중학교 졸업 한 갑자 세월을 기념해서 교정에서 만나기로 한 행사에, 남편 따라 그 교정에 발걸음 해준 아내들이 있었다.
그 면면을 봤다.
힘들지 않아서 따라온 발걸음이 아니었다.
남편을 빛내주려고 따라온 발걸음이었다.
하나같이 부창부수 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