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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강인한 시집 『입술』
사랑에 관한 불편한 진실
금동철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세계에 대한 의미 찾기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창조하고, 그 이미지들은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에 내밀하게 내재해 있는 의미망들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정시에서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의 폭과 깊이, 또는 관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서정 시인이 지닌 눈의 폭과 깊이, 혹은 관점을 읽어내는 작업이 아닐까. 시인이 사물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폭과 깊이는 그대로 시 속에서 정서로 형상화되고, 독자들은 그 정서를 추체험하면서 시인이 느꼈을 그 세상을 다시 한 번 그려보는 것이다. 이 과정이 의미가 있는 것은, 삶의 다양한 국면들이 시인이라는 렌즈를 통과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정서의 색깔을 안고서 독자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를 읽을 때 우리가 행복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다양한 사물들이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정서로 말을 걸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세계의 비밀을 시인과 함께 내밀하게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내밀한 세계의 비밀은 그렇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고.
가까운, 그러나 먼 사랑
강인한의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독자가 누리게 되는 감동 중의 하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중성의 발견에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상대에 대한 애틋하고 아름다운 감정, 혹은 자발적인 헌신의 의지를 포함하는 달콤한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강인한 시에서 발견하는 사랑은 상당히 불편하다. 달콤하고 행복한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의 단절을 인정해야 할 정도의 긴장이나 아쉬움과 같은 불편함이 깔려 있는 것이다. 아니ㅡ 어떤 경우에는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서 날카로운 적의가 곤두서 있는 것도 자주 발견한다. 그러나 이 불편함을 간신히 넘어선 곳에서 만나는 것은 그때까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삶 혹은 사랑이 지닌 보다 깊은 의미인 것이다.
잎 무성한 목련나무는
봄밤에 등을 켠 기억을 잊어버렸는지
이름표를 떼고
이웃한 모과나무에 자꾸만 말을 걸고 싶어 한다
벌레들이 뜯어먹다 버려둔 이파리
모과나무는 이 여름
갈색으로 대롱거리는 철 이른 낙엽을
의붓자식 바라보듯 무심하다
달걀만한 어린 모과 열매들
푸른 잎 사이 조마조마하게 눈만 반짝이며
숨었다
향기까지는 여름이 길다
사랑하는 이여
뜨거운 내벽을 두드리는 나의 질문에서
그대가 들려주는 응답까지의 거리는
기억력이 나쁜 목련나무와 시력이 안 좋은 모과나무의
사이좋은 여름나기
그래그래 꼭 그만한 거리일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간격」전문
사랑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 내재되어 있는 불편한 진실이 여기에 진득하니 깔려 있다. 시인에게 사랑은 상대와의 친밀하고 가까우며 감미로운 그 무엇이 아니라, 이처럼 “기억력이 나쁜 목련나무와 시력이 안 좋은 모과나무” 사이의 관계처럼 도저히 뛰어넘기 어려운 간격을 소유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 간격은 무엇보다 먼저 각각의 존재가 지닌 속성에서 오는, 극복하기 힘든 ‘시간’상의 간격으로 나타난다. 잎사귀도 나오기 전에 화려하고 찬란하게 봄밤을 수놓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목련나무가 자신의 그 절정의 시간을 다 보내고 나서 오히려 수수한 이파리만 단 모습으로 멈추어 선 여름이라는 시간.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꽃을 피우고는 누구도 모르게 달걀만한 어린 열매를 불쑥불쑥 달고 그것이 향기로운 열매로 옹골차게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모과나무의 치열한 여름이라는 시간. 이 두 시간 사이의 간격은 세상을 두 존재의 세상살이 방식의 극명한 차이를 가져오고, 그것은 둘 사이의 관계의 한계를 선명하게 노정하는 원인이 된다.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시간을 이미 보내버린 이의 시간과, 앞으로가 더욱 가치 있을 날들을 기다리며 현재를 갈고닦는 이의 시간은 분명히 동일한 자리에서 동일한 감정을 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묶고 있다. 이 사랑은 어쩔 수 없이 ‘간격’을 소유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 인간이 지닌 사랑이라는 감정도 이와 같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너와 나의 행복한 일체감이라는 것이 사랑의 환상이라면,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실적인 사랑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이러한 둘 사이의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사이좋은 여름나기’와 같은 상태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뜨거운 감정의 교류나 달콤한 정서의 교환은 사라진다. 오히여 ‘뜨거운 내벽을 두드리는 나의 질문’은 ‘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거나 그 응답을 듣지 못하고, ‘그저 그만한 거리’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이 불편한 사랑의 진실 앞에 독자들을 은근슬쩍 밀어 넣는다. 사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이러한 불편한 사랑에 좌절하고 절망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삶의 방식과 자신만의 삶의 목표를 지니고 자신만의 시간 계획을 통해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나간다. 그러한 인간이 서로 만나 사랑이라는 관계를 형성하는데, 그 관계가 결코 아름다울 수만은 없음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것은 이십대의 열정적이고 그래서 그것에 자기 삶의 모든 것을 다 던져 넣을 준비가 된 그런 사랑이 아니라, 완숙하면서도 인생의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쓴 맛과 단 맛을 골고루 맛본 자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어쩌면 그래서 더욱 절절하게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간격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관계, 그 간격 앞에서 갈등과 좌절을 경험해야만 넘어 들어갈 수 있는 완숙하고 논익은 인생의 경지를 경험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지닌 불편한 진실인 것이다.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
카페 손님이 그래서 많다
당신은 내 앞에
떠 있다
강이 있고
건너편에는 내가 떠 있다
우리들은 하반신이 지워진 채 마주앉아
앞에 놓인 강에
뛰어들 것인지 말 것인지
오래 들여다본다
—「오후의 실루엣」부분
‘당신’과 ‘나’ 사이에 ‘강’이 놓여 있다는 이 인식 속으로 시인은 독자들을 불편하게 밀어 넣는다. 카페에서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나와 너 사이에 가로놓인 이 ‘강’ 앞에 사랑은 좌절하는 것. 그런데 묘하게도 둘은 상대에게 그 강물에 뛰어들어 상대에게 다가갈지 말지를 두고 ‘오래 들여다보면서’ 고민하고만 있다. 관계의 단절 혹은 나와 너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시도 자체가 고민거리가 되는 것이다. 멀어진 관계를 복원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쉽사리 느껴지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은근슬쩍 독자들의 인식의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는다.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은 거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아련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거리는 「우울한 당구」에서도 안타까운 정서로 형상화된다. “너에게로 가는 내 마음은/ 어느 모서리에 부딪히고, 부딪혀/ 각을 꺾고서/ 번번이 되돌아오는지” 한탄하는 자아의 마음에는 이러한 사랑의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장미의 독」에서는 사랑이 상대를 죽일 수도 있는 치명적인 독을 소유한 것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당신을 죽이고 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오랜 종種의 기억”이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녹아 있음을 불편한 마음으로 들춰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사랑은 ‘연옥의 불길에 닿아 있는’ 것. 사랑은 이제 ‘적의’까지도 지닌 존재가 된다.
사랑에 대한 이 같은 불편한 진실 앞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음은, 우리들 스스로 이러한 아릿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치명적인 독을 지니고 상대를 유혹하기도 하고, 좁힐 수 없는 거리감 앞에서 얼마나 자주 우리들은 좌절하는가. 아니 오히려 한 눈에 반해서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넣는 ‘꿈 같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얼마나 우리에게 어색한 ‘몽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우리 경험은 말해주고 있는지. 시인은 그것을 독자들에게 불편하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래도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음은…
우리 인간들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이 같은 불편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 앞에 감동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우리 존재를 결정짓는 ‘생명’이라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사랑’의 또 다른 진실은 우리에게 이 불편한 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넘어서게 만들어준다.
뜨겁게 데워진 돌벽 위에 손을 내밀었다
담쟁이의 망설임이 허공에서 파문을 만들었다
파란 물살에 문득 누군가의 마음이 걸렸다
능소화였다
먼저 키를 늘이는 담쟁이를 보고
봄부터 여름까지의 거리를 능소화는 헤아려보았다
담쟁이가 가녀린 허리를 가만히 내주었다
능소화는 담쟁이 허리를 껴안고 기어올라
한 덩어리 파아란 불길이 되어 그들은 타올랐다
사나운 비바람이 담쟁이를 흔들자
능소화도 담쟁이도 함께 흔들렸다
담쟁이는 제 가슴에 붉고 커다란 꽃송이들이 자랑스러웠다
지열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여름날
목을 꺾고 꽃이 떨어졌다
안아주고 몸을 빌려준 마음을 알았으므로
능소화는 한두 송이 꽃이 져도,
꽃이 져도 좋았다.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전문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자기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식물들에게 그것은 공간에 대한 투쟁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식물에게 두 가지 종이 함께 뒤섞인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담쟁이와 능소화, 이 두 종은 같은 덩굴식물이라는 비슷한 존재방식으로 인해 같은 공간에서 서로 공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물과 빛, 공기와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둘을 한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그것도 단순히 인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덩굴을 뒤섞어 꼬이는 자리에까지 가져간다. 뜨거운 벽까지도 든든하게 붙잡을 수 있는 손을 가진 담쟁이의 성장 방식과, 무언가를 붙잡아 타고 올라야만 자랄 수 있는 능소화가 함께 자리하는 것이다.
시인의 인식 속에서 이 둘은 사랑의 불편한 진실을 넘어서는 진정한 ‘사랑’을 내보이는 관계가 된다. 담쟁이는 자신의 가는 허리를 능소화에게 내어주어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주고, 능소화는 자신의 ‘커다랗고 붉은 꽃송이’를 담쟁이의 가슴에 매달아주어 담쟁이로 하여금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자신의 공간과 몸을 내어놓고 상대의 것을 받아들여주는 ‘희생’이 있기에 가능한 것. 그 ‘희생’을 알기에 능소화는 자신의 꽃이 지는 것이 서러워지지 않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는, 다시 말해 인생의 원숙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임을 시인은 이 둘의 관계를 통해 내밀한 방식으로 내보이는 것.
오목눈이
붉은머리오목눈이 작은 둥지
눈물 찔끔 알을 낳았는데
하늘빛 제 설움으로 낳았는데
뻐꾸기가 몰래 떨구고 간
하늘빛 둥근 알
눈도 못 뜬 고 벌거숭이가
등으로 등으로 오목눈이 알들을 밀어내네
밀어내서 둥지 밖으로 떨어뜨리네
가엾어라
제 새끼들을 죽인 뻐꾸기 새끼인데
오목눈이 먹이를 물어다 먹이네
그나마 목숨은 한가지라고
제 몸집보다 훌쩍 큰 남의 자식을
오목눈이 지성으로 먹여 살리네.
—「성자聖者」전문
자기 둥지를 만들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는 뻐꾸기의 잔인한 속성까지도 포용하고 뛰어넘어, 그 알들을 자기 새끼인 것으로 알고 키워내는 오목눈이의 모습 속에서, 시인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읽어낸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결국 ‘희생’이 필요한 것임을 잔잔한 감동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이 희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목숨’ 혹은 ‘생명’에 대한 진정한 경외감이 아닐까. 시인은 자연에서 발견하는 본능의 요구 속에 내재해 있는 ‘생명’ 혹은 ‘목숨’의 가치가,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동인임을 이 오목눈이의 사랑을 통해 내보이는 것이다. 오목눈이의 사랑은 시인이 발견한 사랑의 불편한 진실을 아름다운 향기로 물들이는 힘을 소유하고 있는 것. 그래서 그 사랑 앞에 시인은 ‘성자’라는 커다란 이름을 붙여 내는 것이다.
시인의 눈으로 볼 때 사랑이 진정한 향기를 발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지닌 불편한 진실들마저 뛰어넘는 ‘희생’이 전제된다. 그 ‘희생’ 위에서 인간은 진정한 성숙을 이루어내고, 또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랑을 나누는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 어쩌면 그렇게 우리는 아직도 ‘사랑’을 꿈꾸고 몽상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시》200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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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철 / 문학평론가. 서울대 및 동대학원 졸업. 1995년 《현대시》평론부문 당선.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수사학』『구원의 시학』등. 현 아세아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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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감상 잘 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