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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어수선한데 여행기를 올리려니 다소 마음이 께름칙합니다. 그러나 쓴다고 약속을 했고, 나도 오래 걸려 대충 꾸렸으니 그냥 시간 보내기용으로 가볍게 읽으시길….
내용도 치밀한 여행기는 아니고, 그날그날 뭘했나를 기억할 양으로 해둔 기록 정도. 다음에 그리스에 갈 계획이 있는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빌면서. 유적지 정보는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1992년과 2020년. 28년 만에 그리스를 다시 찾았다. 그동안 다녔던 많은 여행지 중에서 항상 마음속에 남아있던 곳, 언젠가 한번은 꼭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28년 만에 찾은 아테네…소매치기들의 손님맞이
1월 27일
0시 25분에 출발하는 터키항공 비행기. 이스탄불에서 갈아타고 아테네로 들어간다. 서울에서 새벽 0시를 넘긴 시간에 비행기를 타는 것은 처음이다. 움직이기에는 더 나은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천천히 나오면 되니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다. 다만 공항버스는 저녁 8시 40분이면 끊기니 교통편에 신경을 써야 하고, 공항에 있는 통신사 영업시간을 체크할 필요는 있다.
이스탄불에서 3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40분이다. 15시간 정도가 흘렀는데도 아직 날이 밝으니 하루를 번 듯하다. 공항버스는 1인당 6유로. 도심에 있는 신타그마(헌법) 광장까지 50분 정도 걸려 데려다준다. 구글 맵을 켜고 호텔을 검색하니 걸어서 4분이라고 나온다. 거리 이름을 찾아서 숙소로 들어섰다. 오미로스(Omiros) 호텔이다. 프런트 직원은 흔쾌히 이른 체크인을 해준다. 퍽 친절하다. 호텔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작가, 저술가’란다. 호머를 아느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Homer is omiros’라고 한다. 사흘간 머물 곳이다. 가격은 조식 포함 181.5유로.
(오미로스 호텔. 이것은 호텔 자체 홍보 사진)
짐을 풀고 배낭을 메고 거리를 둘러보러 나섰다. 직원에게 물어 여행사가 있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스 여행 일정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신타그마 광장으로 다시 나가니 정면에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분수대도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다. 날씨는 겨울이라지만 춥지 않다. 그래도 그리스 사람들은 털옷에 부츠까지 갖춘 겨울 차림이 눈에 많이 띈다. 여행사를 찾느라 기웃거리고 가는데 친구가 황급히 다가오더니 배낭의 지퍼를 채운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로 구성된 3인조가 내 배낭을 열고서는 코를 들이박고 훔쳐갈 것을 찾고 있었단다. 순간 비상금 봉투를 넣어뒀던 게 생각이 났다. 다행히 깊숙이 있어 갖고 가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신고식을 톡톡히 치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두 부인이 다가오더니 나보고 가방을 왜 뒤로 메고 다니느냐고, 이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니 반드시 앞으로 메라고 충고한다. 자기들도 그 모습을 봤다고 한다. 그야말로 등골이 서늘해진다.
(신타그마 광장 앞 국회의사당)
여행사 한 곳에 들어갔으나 조건에 맞는 상품이 없어 포기하고 피레우스 항에 가보기로 했다. 그리스에서 섬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피레우스 항에서 배를 타게 되므로 누구나 한번은 가게 되는 곳이다. 모나스티라키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된다. 자동판매기를 살펴보니 표를 사는 게 쉽지 않다. 우리가 망설이고 있으니 한 남자가 다가와 표 2장을 내민다. 얼마냐고 묻자 하나에 1유로란다. 1.4유로인데 싸게 받는다. 2유로를 주고 두 장을 받아들자 자기가 시범을 보이며 플랫폼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일단 샀으니 그대로 따라 들어가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 남자가 같은 차량에 타고선 가지 않고 계속 옆에서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지하철은 차량이 막혀있어 다른 차량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 이미 소매치기의 공격을 받은 터라 다소 불안하다. 그래서 문쪽에 붙어서 가방을 뒤로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옆에 서 있던 여자의 손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모르는 척하며 몸을 잠시 틀었더니 그냥 움직임을 멈춘다. 다음 정거장에서 남자와 함께 내리는 것을 보니 한 패였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피레우스에 내리니 비가 온다. 2월의 그리스는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우산은 준비했다. 항구에 비가 내리니 나그네의 기분이 좀 더 확연히 다가온다. 몇 군데 선사에 들어가 선박 티켓을 알아보고, 주변 정황이 그다지 안전한 것 같지 않아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이제 플라카 지역을 슬슬 걸어본다. 아크로폴리스가 보이는 중심 지역이다. 가는 길에 그리스 레스토랑이라는 간판이 들어왔다. ‘헤르미온(Hermion).’ 나중에 보니 맛집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릴 칼라마리(오징어)가 눈길을 끌어 들어갔다. 렌틸콩 스프와 칼라마리, 생선(Bass, 농어)을 시켰다. 구이지만 숯불에 구운 것이 아니라 그릴에 요리를 해서 아주 맛이 있다. 오징어에는 밥도 곁들여 아주 푸짐하다. 빵과 함께 올리브 페이스트도 나왔다. 그리스에 오기 전에 올리브를 많이 먹으리라고 기대했는데, 역시 그랬다. 하우스 와인도 한 잔씩 시켰다. 잔의 거의 80%까지 넉넉하게 채워주는 것을 보니 마음이 괜스레 푸근해진다. 맛있는 음식에 인심도 넉넉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양이 너무 많다. 둘이서 허덕이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남길 수밖에 없었다. 첫 식사의 포만감이 마음 한구석의 불안을 없애주기에 충분했다.
1월 28일
오늘은 아크로폴리스로 간다. 오전 8시부터 문을 열지만 겨울이라 오후 4시에는 닫는다. 호텔에서 아침을 하려고 7시에 내려가니 우리만이다. 친구는 나와 생활패턴이 비슷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형이라 빨리 움직일 수가 있다. 아침을 마치고 길을 나섰다. 아크로폴리스 쪽으로 올라가자니 벽은 보이는데 정작 들어설 수 있는 문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남자에게 물으니 맞은편으로 반 바퀴 정도 돌아야 한단다.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한국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서울에서 3개월 정도 있었다며 도심에 있던 산을 묻는다. 남산이라고 말해줬더니 기억이 났다며 웃는다. 다음엔 서울에서 보자며 활기차게 웃고 떠난다. 아테네에서 한국 다녀온 그리스 사람을 만나기도 하니, 세상이 참 많이 달라지긴 했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
(아크로폴리스 이곳저곳)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본 아테네 시내)
아크로폴리스로 다가가자 아침이라 한가하다. 유적지 10곳을 볼 수 있는 통합 입장권은 30유로다. 아크로폴리스는 평균 해발 156m에 자리하고 있어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아크로(최상의, 가장 높은) 폴리스(도시국가)에는 아테나신전, 에렉티온, 디오니소스 극장 등등 오래되고 세계에 널리 알려진 유적지들이 있다. 아침에 일찍 왔는데도 벌써 단체 관광객들도 있다. 그런데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오니 정작 가장 높은 곳이 아니다. 저 멀리 교회 같은 것이 서 있는 언덕이 보인다. 궁금해하며 지도를 보니 리키비토스 언덕이다. 나중에 찾아봐야 할 곳인 듯하다. 어쨌든 오늘은 ‘아테네 뽀개기(?)’를 하기로 하고, 통합입장권(한 사람에 30유로)이 허용하는 곳을 다 둘러보기로 했다. 자세한 유적 관광은 인터넷 지식으로 대체하기로 하고….
(아크로폴리스 맞은편 공원 안에 있는 소크라테스 감옥. 당시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음)
오후에는 여행사에 들러 다음 일정을 위한 예약을 진행했다. 델피에 가서 하루를 자고 돌아온 뒤 바로 밤 페리를 타고 산토리니 섬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하루를 자고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로 나와서 다시 여유 있게 다니다가 귀국하는 것으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부킹닷컴으로 델피 숙소와 산토리니, 돌아온 뒤 아테네 숙소 등 3곳 예약을 했는데, 회신 메일이 오지 않는다. 문제는 결제도 끝냈는데, 정확한 숙소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당연히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따로 기록을 해두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한국에 있는 친구 딸에게 부킹닷컴 안내센터에 전화를 걸게 했다. 나와 직원이 전화까지 하면서 어렵게 해결을 했다. 그들은 내가 이메일 주소 기록을 잘못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메일이 틀리면 진행이 되지 않는다. 자기들이 잊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해결이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는 항상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1월 29일
아침에 일어나 리키비토스 언덕으로 걸어갔다. 어제 아크로폴리스에 올랐을 때 멀리 바라보이던 언덕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부유촌인 콜로나키도 있다. 지도를 가지고 걷다가 방향이 틀어지고, 다시 제 자리를 찾기도 하면서 언덕길을 오른다. 집들 사이로 끝없이 뻗은 계단이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Stairway to heaven) 같다.
(리키비토스 언억에 있는 작은 교회)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간다는데, 거기까지 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니 9시 5분 전이다. 아침 9시부터 운행한다고 되어 있지만 직원 그림자도 없다. 케이블카는 열려 있다. 조금 있으니 여직원이 나타나더니 그냥 타고 올라가란다. 달랑 두 명만 싣고 케이블카는 움직인다.
5분도 못되어 도착하니 남자 직원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고 표를 끊으란다. 왕복으로 끊고 계단을 다시 올라간다. 잠시 올라가니 어제 보았던 지붕이 하얀 자그마한 게오르기오스 성당이 서 있고, 마당은 생각보다 좁다. 곳곳에 소지품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붐빌 땐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발 260m로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아크로폴리스도 멀리 내려다보인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길을 걸으며 약국에 들러 배 멀미약도 사고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아카데미, 유명 건물들을 훑어보았다. 점심은 시내에 있는 채식식당에서 먹었다. 이름은 아보카도 식당이다. 두부를 두껍게 튀겨 밥 위에 얹은 덮밥과 참기름을 드레싱으로 한 샐러드가 맛있었다. 그리스 사람들도 많이 찾고 있었다.
(포세이돈 신전)
(해를 이고 잇는 포세이돈 신전)
(포세이돈 신전 기둥 하나 아래쪽에 바이런이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이 보인다.)
(저물어가는 에게해의 태양과 포세이돈 신전)
오후에는 마침내 포세이돈 신전을 보러 수니온으로 갔다. 28년 전에 비포장도로를 먼지 날리며 3시간에 걸쳐 갔을 때 해안가 바위에 우뚝 솟아있던 신전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도로도 포장이 되어서 예전과 사정이 다르다. 버스를 타고 조금 있으니 그리스 아줌마가 중간에 타서 돈을 받는데, 왕복으로 두 사람 요금이 25유로다. 그런데 영수증을 끊어주며 뭐라고 말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왕복이라고 표를 잘 챙기라는 이야기였다.
바다를 따라 끝없이 구불구불 이어져가는 길을 바다쪽으로 눈을 주고 한참을 달리다 보면 멀리서 바다를 향해 변함없이 솟아 있는, 아니 조금은 외롭게 불쑥 튀어나온 듯한 포세이돈 신전이 맞아준다. 에게해는 햇살이 꽤 찬란하게 내리비치면서 사금파리처럼 잔잔히 갈라진다. 해넘이를 본다고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정작 바다 바로 위에 구름이 두껍게 끼어 가라앉는 마지막 모습은 보기 어려울 듯하다. 신전을 돌아본다. 예전에는 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금지선이 둘러쳐져 있다. 기둥 하나에 시인 바이런이 자기 이름을 낙서한 것도 보인다. 그냥 둘러보면서 바다를 바라보면 정말 해신이 지켜줄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꽤 오랜 시간 매점에 앉아 바다를 마주하고 여유롭게 풍광을 즐기다 맥주도 한 병 마시고 서둘러 아테네로 복귀한다.
저녁을 먹기 위해 ‘이쿠라’라는 일식과 한식을 파는 식당 앞에서 메뉴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주인이 나와서 말을 건다. 우동이 먹고 싶어 일단 들어갔다. 물을 가지고 온 주인은 한국인이다. 그러면서 식당 안에서 보니 내 배낭 뒤에 중동 사람 둘이 붙어 뭔가 훔치려고 하기에 나와서 말을 걸었단다. 에고…. 암튼 조심에 또 조심이다. 오랜만에 우동과 김밥을 먹으며 피곤을 덜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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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무래도 소매치기는 한 번 당했을 듯~~~2,3편 읽어보면 ㅎㅎ
그래고 무사히 그냥 넘겼다는 것 아닙니까. ㅎㅎㅎ 신들에게 잘 보인듯...
사진 기량이, 아니 카메라 성능이 업그레이드된 휴대전화가 분명히 선배 손에 쥐어졌을 것이다.
휴대폰이 좋은 건 맞는 건 같아. 근데 눈이 안보여서 되는 대로 갖다 댔거든... 그냥 풍경이 절로 사진 속으로 들어왔다고나 할까. 깨알자랑은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ㅎㅎㅎ
에게문명 발상지, 산토리니 섬, 마마미아.. 그리스 가고 싶네요, 회장님이 찬찬히 재밌게 알려주신 것 참고해 자유여행으로 가~즈아!
당할듯이 당할듯이 당하지 않는ㅎㅎ 용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