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보고 싶다
김윤선
큰 손녀가 언제 커서 올해 대학생이 되었다. 일 년에 한 두세 번 볼 때 마다 키가 쑥쑥 자라 저 엄마보다 더 큰 숙녀로 변해간다. 아들 넷에 첫 손녀로 태어났을 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이었다. 우리 보물 손녀를 보내주신 조상님께 매일 손모아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손녀가 네 살 무렵 며느리가 자궁이 약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며칠간이라도 안고 잠을 자야 하는데 사랑스러운 천사를 안고 자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첫날 병원에서 엄마와 함께 좀 놀더니 할머니와 간다는 것을 눈치챈 아이가 그만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에게 꼭 안겼다. 잠시 엄마와 놀게 하다가 차를 태워 할아버지에게 안겨 약 십 분간 아무 말 없이 오더니 속울음을 훌쩍이며 “할머니 엄마가 보고 싶어요” 하며 울기 시작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한테 간다며 젖떨어진 강이지 모양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어 차를 되돌려 병원으로 돌아 갔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어미 옆에 함께 누워 버렸다. 집에 안 가겠다며 엄마 곁에 있겠다고 때를 썼다. 만약 저 어미가 없었다면 내 심장이 어떻게 되었을까, 차마 눈으로 볼수없는 광경이 펼쳐 졌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어미 곁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셋째 아들 손자가 갑자기 맹장염이 걸려 백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때도 작은 손녀가 네 살 먹었는데 3일 밤을 데리고 잤다. 처음엔 아무 탈 없이 잘 먹고 잘 잤는데 3일 째 되는 날 저의 아빠가 왔다 갔다. 저 아빠가 가고나니 순간 울음을 삼키며 눈물이 그렁그렁 하더니 엄마를 찾기 시작하였다. “할머니 우리엄마 언제 와요, 아빠는 언제 와요,” 창문을 열어놓고 “엄마 아빠 언제 와요, 어디 있으요,” 불러 대는데 온몸이 져려 왔다. “우리엄마 언제 와요? 엄마 보고 싶어요.” 그 예쁜 말에 내 몸이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밤은 되었는데 업어 주다가 달래어 보며 온갖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할머니 엄마한테 데려다 주세요” 그 애절한 어린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애비가 와서 데려갔다. 만약 어린 것이 저 엄마가 없었다면 그 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지난날 아동복 장사를 할 때 할머니가 키우는 손자 손녀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려 올 때도 종종 있었다. 아동복 장사를 40년을 하면서 부모가 없는 손자손녀를 끌어안고 피눈물로 키우는 노인들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아려왔다. 아이들 옷을 사주려고 왔는데 티 하나 값 밖에 되지 않는 돈으로 사고 싶은 옷은 많은데 가슴이 답답했다. 할머니들은 손자 손녀들을 잘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는 것이 한이 되어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 때 마다 돈과 관계없이 팔던 옷을 골라 내 부모처럼 몇 벌씩 선물을 하기도 했다.
내 나이 열 두 살 초등학교 5학년 말 엄마와 처음 이별을 했다. 옛날 우리 이웃에 살던 의 고모님이 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아이보는 사람을 구하러 왔다. 며칠간 사람을 찾아 다녀도 갈 사람이 없다고 하니 내가 불쑥 나서서 가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너는 학교에 다녀야 한다며 안된다고 했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딸이 남의 집에 간다는 소리에 눈물로 밤을 지새던 어머니셨다. 어머니의 눈이 붓고 붉게 출혈이 된 모습을 나는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에는 하루속에 돈을 벌어 엄마를 편하게 모시야 된다는 결심이었다. 시간이 되어 버스 정류소를 가는데 집에서 약 30분 거리를 걸어서 버스 정류장에 닿았을 때 갑자기 버스가 왔다. 어른들과 함께 차를 탈 때 엄마가 “선아" 부르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른들 틈에 의자를 잡고 소나기가 쏟아지듯 흐르는 눈물을 감당 할 수가 없어 의자가 다 젖어 버렸다. 버스는 몇 시간 비포장 도로를 털거덕 거리며 달리는데 어머니의 선아 소리만 귀에 들렸다. 약 네 시간 소요되는 거리를 의자를 잡고 얼마나 울었던가, 퉁퉁 부어있는 눈을 닦고 있을 때 구포 정류소라고 했다. 구포 다리를 건너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 때 자리가 비어 의자에 앉으니 배사소, 사과, 땅콩, 계란, 하며 차에 들어와서 팔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정신이 없었다. 창밖에는 낙동강 푸른 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고향의 강물처럼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고모집에 도착하니 내 또래 고모 딸은 부산여중 일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어린시절 이웃에서 엄마 젖을 나와 함께 일년 동안 먹었다는 친구다. 친구가 부러워 밤이면 중학교 영어 책으로 공부를 하려고 책장을 펼치니 눈물이 떨어져 책이 다 젖어 버렸다. 고모님께서 곁에 계시니 더이상 공부를 할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아직도 살얼음이 얼고 샘물은 차거웠다. 아침 밥을 하려고 샘물을 길어 올릴때 신문하며 찰깍 찰깍 신문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두부장사의 요롱소리 재첩 사소 외치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아침 햇살이 뜨 오르면 구두 닦소 하며 내 또래 소년들도 있었다. 난생 처음 도시에 와서 제 각자 살아가는 풍경을 볼수가 있었다.
선생님께 온다는 말도 없이 그냥 오고 보니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프기 시작 하였다. 아침만 되면 하얀 까마귀 떼 같은 부산여중생들이 대문 앞을 지나가는데 나도 몰래 아이를 업고 학교까지 따라 간다. 여학생들은 제비주둥이들 처럼 입을 마주하며 조잘 조잘 삼삼 오오 떼를 지어 걸어가는 뒷모습을 졸졸 따라갔다. 공부시간이 시작되면 학교 창문 사이로 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늘에 천사들을 보고 있었다. 집 주변을 나서면 오른 쪽에는 대신 중학교가 있고 왼쪽에는 부산 여중이 있었다. 매일 아침을 먹고나면 아이를 업고 대신 중학교 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다가 부산 여중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모두가 내 또래 학생들이 저리도 많은데 왜! 나는 공부를 할 수가 없을까? 늘 마음속엔 내가 언제 공부를 할 수있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언제 날이 갔는지 약 40 여 일이 지났다.
시간이 흘러 4월이 왔는데 어느날 대문을 두드리며 “선아 선아” 부르시던 엄마의 목소리 꿈인가 생시인가, 맨발로 “엄마” “선아” 대문을 열고 엄마와 딸은 뼈가 으스러 지도록 끌어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죽을뻔 했어,” “엄마도 내 딸이 너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데리로 왔다. 집에가자, 너를 보내 놓고 밤마다 엄마하고 문을 열고 오는 소리에 자다가도 뛰쳐나가곤 했단다. 내 딸아 골목마다 아이들이 모두 내 딸이고” 엄마는 얼굴을 맞대며 쓰다듬고 머리를 감싸 안으며 모녀는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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