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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착한 농부들의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農心居士
2016. 6. 12(일) 선배님이 보내주신 아침편지
놀라운 은총(누사덕과 오바마)
아래의 글은 2015-06-29 세계일보 "배연국 논설위원 "이 작성한 컬럼입니다.
중국 당나라의 관리 누사덕은 마음이 넓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성품이 따뜻하고 너그러워 아무리 화나는 일이 생겨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동생이 높은 관직에 임용되자 따로 불렀다.
“우리 형제가 함께 출세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 남의 시샘이 클 터인데 너는 어찌 처신할 셈이냐”고 물었다.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화내지 않고 닦겠습니다.”
동생의 대답에 형이 나지막이 타일렀다. “내가 염려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를 것이야.” 화가 나서 침을 뱉었는데 그 자리에서 닦으면 더 크게 화를 낼 것이니, 닦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당부였다. ‘타면자건(唾面自乾)’에 얽힌 고사다.
누사덕의 지혜를 오늘날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지도자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이다.
최근 대국민 직접 소통에 나선 오바마의 개인 트위터 계정에는 모욕적인 악플이 범람했다. 심지어 ‘검은 원숭이’, ‘원숭이 우리로 돌아가라’는 흑인 비하 댓글도 있다. 하지만 오바마는 자신을 겨냥한 저급한 비방을 여태껏 지우지 않았다고 한다. ‘사이버 침’이 SNS에서 그냥 마르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오바마의 놀라운 포용 정치가 다시 빛을 발했다.
그는 지난 26일 백인 청년의 총기 난사로 숨진 흑인 목사 장례식에 참석했다. “놀라운 은총, 얼마나 감미로운가…” 추모사를 읽던 오바마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더니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총)’를 부르기 시작했다. 반주도 없었다.
영결식장을 가득 채운 6000여명의 참석자는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두 일어나 찬송가를 함께 따라 불렀다. 어떤 흑인 여성은 오바마를 손짓하며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은 연설 도중 희생자 9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이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말했다. TV로 지켜보던 국민들의 박수소리가 아메리카 전역에 울려 퍼졌다.
포용은 말처럼 쉽지 않다. 고통스러운 인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내의 忍은 심장(心)에 칼날(刃)이 박힌 모습을 본뜬 글자다. 칼날로 심장을 후비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바로 인내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자면 누구나 가슴에 칼날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참느냐 못 참느냐. 거기서 삶이 결판난다. 누사덕, 오바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사가 다 그렇다.
- 배연국 논설위원 -
唾面自乾(하늘 건)
唾(침 타)面(낯 면)自(스스로 자)乾(하늘 건)
"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것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는 뜻으로 처세에는 인내가 필요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 래
심팔사략에 나오는 것으로 남이 나의 낯에 침을 뱉을 때 이를 바로 닦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당나라 측천무후는 중국 사상 유일한 여제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했습니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고 자신의 아들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킨 후 정권을 독차지 하기 위해 독재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탄압책을 쓰는 한편, 유능한 신흥 관리를 많이 등용하고 면신을 적절히 등용하여 정치를 담당 시켰기 때문에 천하는 그런대로 태평했습니다. 그 무렵 측천무후의 유능한 신하 중 누사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성품은 온후하고 관인하여, 아무리 무례한 일을 당하여도 그 자세 흔들림 없이 늘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아우가 대주자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려고 할 때 였습니다. 그는 아우를 불러 " 우리 형제가 다같이 출세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만큼 남의 시샘도 크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샘을 면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하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으니 동생이 답하길 "비록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결코 상관하거나 화내지 않고 잠자코 닦겠습니다. 만사를 이런식으로 사람을 응대하여 결코 형님에게 걱정이나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동생의 대답을 들은 누사덕은 "내가 염려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침을 뱉는다면 그것은 네게 뭔가 크게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침을 닦아버린다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어 틀림없이 더 큰 화를 내게 될 것이다. 침 같은 건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르니 그런 때는 웃으며 그냥 침을 받아 두는 게 제일이다." 라며 훈계했습니다.
명재상 적인걸을 추천한 누사덕
중국의 유일무이한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또한 가장 신뢰한 인물이 명재상 적인걸이었다. 아부라는 말을 모를 만큼 강직한 이가 적인걸이었다. '천리마'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걸출한 인재인 적인걸을 측전무후에게 여러번 추천해 그를 재상에 오르게 한 인물은 누사덕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던 적인걸은 늘 누사덕을 업신여기고 경멸했다. 웬만하면 “내가 당신을 추천했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생색을 낼 법도 했지만 누사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측천무후가 적인걸에게 물었다. "누사덕이 유능하다고 보시오?" "성품이 온후하고 관대하지만 유능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측천무후가 다시 물었다. "누사덕이 사람은 잘 본다고 생각하시오?" 적인걸은 매정하게 답했다. "저는 지금껏 그가 인재를 잘 알아본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비로소 측천무후가 말했다. "내가 그대를 중용한 건 계속되는 누사덕의 추천 때문이었소. 그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 같소." 적인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후부터 그는 누사덕을 본받아 명재상이 되었다. 능멸을 받으면서도 업적을 자랑하지 않고 담담히 감내해 내었기에 누사덕의 격이 더욱 높아 보인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측천무후(624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武周)의 황제(당나라 제 7대 황제)로, 중국 역사에 나타난 두 번째 여성 군주이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妖女)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女傑)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兒名)은 무미랑(武媚娘)이다.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개명하였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이다. 태어난 날짜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정식 시호는 측천무후여황제(則天武后女皇帝)이다
생 애
무조는 624년 음력 1월 23일 당의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의 廣元)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유명한 목재상인데, 수 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되었다. 617년 양광의 폭정 때문에 일어난 대반란에 당시 태원 유수 이연(李淵)과 같이 참전하여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으로부터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에 무사확이 본처를 잃고, 양씨를 새로이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으니 그중 둘째가 무조이다. 무조의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시절 재상을 지낸 양달의 딸로 명문 출신이었다.
후궁 시절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4세의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렀다.
무사확이 죽은 뒤로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무조는 입궁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겼다. 그러나 무조는 가문이 빈한하여 황제의 후궁 중 비교적 낮은 지위의 재인(才人: 정5품)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다. 어느 날 태종 이세민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단 세 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 고 답하였다.
이세민은 무조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조는 애교를 부릴 줄 몰라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무조는 이세민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649년에 이세민이 사망하고, 무조의 간청으로 9남인 이치가 이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를 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穿照)라는 법명(法名)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갔다.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몰래 〈여의낭〉(如意娘)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재입궁과 암투
무조가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치의 황후인 왕씨의 도움이 컸다. 왕씨는 당시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숙비를 질시했는데, 이치가 무조와 밀회한 사실을 알고 이치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왕씨는 무조에게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고 이치에게 무조를 후궁으로 삼으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황후 왕씨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 앞에서는 지극히 공손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고, 왕씨는 무조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복종한다고 여겨 이치 앞에서 여러번 그녀를 칭찬하였다.
이치가 무조를 소의에 봉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자 왕씨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무조는 황후 왕씨와 소숙비 다음가는 지위인 소의가 되었다. 무조는 이치와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이치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이리하여 무조는 비(妃)가 되었다. 하지만 야심만만했던 무조는 황궁 안에서 왕씨나 그 일족이 오만한 태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기회 삼아 그들을 반대하는 궁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았고 왕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무조가 딸을 낳자, 아이를 좋아하는 황후 왕씨는 기뻐하며 무조의 처소를 찾아와 딸을 보고 갔다.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졸라 죽이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 때, 고종 이치가 들어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 모함하였다. 이에 이치는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키고, 소의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 때가 영휘 6년(655년) 10월 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왕씨와 소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 하였다. 또한 왕황후와 소숙비의 성을 각각 망(蟒, 이무기), 효(梟, 올빼미)로 바꾸어 불렀다.
비정한 어머니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남편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살시키도록 강요했다. 또한, 장손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656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우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런 그녀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녀는 대신들을 폐황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보내졌다가,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치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얼마 뒤, 이치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치는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이치와 대소 신료들 사이에서도 신임이 두터웠지만 무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많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씨는 675년 합벽궁(合壁宮) 기운전(綺雲殿)에서 고종과 함께 이홍과 식사를 하였고 이홍은 그 자리에서 독살당하였다. 그 후로, 그 다음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여 이치의 총애를 받았다. 무씨는 아들의 총명에 위기감을 느껴 이현에게 여색을 밝힌다 모함하였다. 680년에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당하였고 이치의 요청으로 죽음만은 면하였으나 681년 수도에서 2,300리 떨어진 파주(巴州)로 유배되었다. 이현은 유배지에서 〈황대과사〉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가 퍼져 무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684년 무씨는 조사를 한다는 구실로 구신적을 파주로 보내 아들을 자살하게 하였고 조정에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구신적이 이현을 죽였다고 덮어씌웠다.
황제로 향하는 발걸음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어쨌든 그녀는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그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리고 무씨는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조카 무승사(649~698)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는 쓰여진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한편, 당 고조 이연의 11남인 한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으나, 무씨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자기의 황제 즉위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말았다.
유일무이한 여황제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해, 무씨는 예종 이단을 황제에서 폐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자신을 측천 금륜대성신황제(則天 金輪大聖神皇帝)라 칭했고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으며 도읍을 장안에서 신도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 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다. 무씨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악독한 대신들을 임명하여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잔혹하게 몰살시켰으며 국법을 더욱 엄히 하였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한다. 무씨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때도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적인걸, 장간지 등이다. 또한, 과거를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무씨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잡아 죽이기까지도 했다. 무씨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도 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무씨는 자식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다.
여걸의 말년과 죽음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 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그리고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그 해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705년 음력 11월 2일, 거의 반 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러한 그녀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씨는 본래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대신하여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그녀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적인걸(狄仁傑.Dírénjié / 630년 ~ 700년)
적인걸은 우리에게는 낯선 인물이지만 중국에서는 인기가 높은 실존 인물입니다. 630년 태어나 측천무후 시대에 재상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황제에게 과감하게 직언을 하는 등의 행동으로 황제에게는 신임을¸ 조정대신들에게는 모함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중국 주재 네덜란드 외교관 로베르트 반 홀릭에 의해서다. 반 홀릭은 18세기 무명작가에 의해 쓰인 디공안과 적공단안대관을 번역하고 각색했다. 이후 여러 이야기와 소설에 등장한 적인걸은 특히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가는 천재 수사관으로 그려지면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서기 690년 당나라.고종 황제가 죽은 뒤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측천무후는 정식으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즉위식을 얼마 안 남겨둔 어느 날부터 그의 신하들이 인체자연발화라는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고¸사람들은 여자가 황제가 되려했기에 하늘이 노했다며 측천무후에 대항한다. 이에 측천무후는 자신의 최측근인 정아『이빙빙』와 당대 최고의 수사관인 적인걸에게 이번 사건을 맡긴다.사건을 파헤치던 적인걸은 하늘의 저주가 아닌 음모에 의한 살인이라는 것을 밝혀내고¸즉위식에 이보다 더 큰 사건이 터질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한때 측천무후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던 적인걸은 국민의 안정과 나라의 평화를 위해 황제를 돕기로 한다.
서극(徐克) 영화감독
직업 : 영화감독, 영화배우
출생 : 1950년 2월 15일 (만 66세), 베트남
신체 : 175cm
학력 :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졸업
데뷔 : 1979년 영화 '접변'
수상 : 2016 제35회 홍콩금상장영화제 감독상 외 9
아시아의 스필버그라는 수식어가 붙은 서극 감독은 최고의 환호를 받는 세계적인 액션 영화감독이다. [영웅본색], [천녀유혼], [첩혈쌍웅], [동방불패] 등의 전설적인 명작들을 제작하였으며 [촉], [상하이 블루스], [황비홍] 그리고 헐리웃에서 [더블팀]과 [넉오프]를 직접 연출하였다. 그의 작품은 모험적인 시도로 언제나 화제를 몰고 다녔다. 1950년에 베트남에서 출생한 서극은 13세부터 8미리 영화를 찍기 시작한 영화광. 오스틴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그가 처음 입사한 곳은 방송국인 TVB. 이곳에서 서극은 허안화, 임영동, 관금붕 등 이후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어가는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허안화와 함께 놀라운 뉴웨이브의 시작을 알렸던 서극은 무협영화의 전통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는데, 그 중 [촉산]은 그가 시도한 최초의 무협영화로 조지 루카스의 ILM에게 특수효과를 전담시킨 작품이다. 또한 중국 고대괴담을 소재로 독특한 홍콩 공포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낸 [천녀유혼]에서는 사운드, 조명, 편집 등의 전통적인 영화언어로 무협영화의 장면들을 재현해 내기도 하였다.
서극 감독의 영화적 특징을 살펴보면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 그의 도전 정신으로 항상 새로운 장르로 관개들을 맞이한다. 서극이 만들면 홍콩 영화계가 복제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극은 문화를 리드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두 번째는 그는 스타 제조기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의 영화를 통해 발굴된 스타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대체저긍로 신인급 배들을을 활요하고 있다는 것으로 [천녀유혼]의 왕조현, [동방불패]의 임청하, [황비홍]의 이연걸 등이 서극 감독의 영화를 통해 전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 했다. [순류역류]의 사정봉 역시 서극 감독의 영화에 전격 캐스팅되며 주가가 뛰어올랐다. 서극 영화의 특징에서 잘 나타나듯 서극 감독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으며 스타 시스템에 연연하지 않는 거장으로서의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서극 감독의 적인걸과 측전무후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대륙 최초 여황제 즉위 직전, 6명의 대신들이 저절로 불에 타 죽다!
하늘의 응징인가, 땅의 분노인가?
서기 690년 당나라, 고종 승하 이후 대륙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를 노리는
측천무후(유가령 분).
화려한 즉위식을 앞둔 어느 날,
그녀의 심복들이 차례로 불에 타 죽는 의문의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하늘의 분노라며 백성들의 공포가 커져가자 황실은 점점 혼란에 빠진다.
측천무후는 최후의 수단으로, 누명을 쓴 채 변방으로 좌천당한
천재수사관 적인걸(유덕화 분)의 환궁을 명한다.
단서는 단 한줌의 재… 인체자연발화… 천재수사관 적인걸,
거대한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적인걸에게 빼앗았던 휘장을 되돌려주며 자신의 호위를 부탁하는 측천무후.
불타버린 시신의 재만으로 수사에 착수한 적인걸은 심층적인 과학수사를 통해
대신들의 죽음이‘황린’이란 성분에 의해 인체가 자연발화 되었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이 사건이 단순 범행이 아닌,
황실을 노린 누군가의 음모임을 감지하는데….
적인걸을 위협하는 음모의 배후, 그는 진실을 밝혀내고
측천무후를 무사히 즉위시킨다.
토요일 아침 마나님이 전복 한마리를 채소에 볶아 만들어준 비빔밥 특별식은 정말 별미였습니다. 조식후엔, 곧 오랫만에 양복을 쫙~ 빼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옛날 용문동에 거주할 때 함께 구역장을 했던 형제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헤어진지 근 10여년이 지났는데, 며칠전 카카오 알림방에 자기 아들결혼식을 안내하는 문자가 떠서 알게 되었지만,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는 걸 잘 알기에 꼭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용산의 한강교 다리 근처에 위치한 '코리아나웨딩홀'에 예식시간 30분전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없어 당혹스러웠습니다. 특히나 신부측에는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축의 대상인 신랑측에도 하객들이 많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요. 그러던 차 용산 성당 용문동 구역의 원로분들 몇분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오늘 축하객들도 많지 않은 식장에 옛 원로분들은 그저 반갑다고 연짱으로 술잔만 돌리셨지만 운전해야 했기에 그 유혹을 어렵게 이겨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정경우, 용문동의 송오섭과. 정연택 형제님을 용문동까지 배웅해 드리고 마포의 직접 구운 빵집에 들려 식빵을 비롯한 옛추억 어린 팥빵, 크림빵을 봉지가득 사갖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금화터널을 지나 경복궁 4거리로 집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근처에 세워진 많은 경창버스들을 보니 아마도 서울역과 시청 및 광화문에 이르는 도로에는 아마도 오늘도 여러 집회를 비롯한 시위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마포에서 신촌을 경유한 금화터널 경복궁역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했기에 30여분만에 집에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마나님께 "짠~"하고 빵을 내어 놓자마자, 이심점심이라고나 할까? 울 마나님도 귀가 길에 빵을 많이 구입해 온 것입니다. 흑~흑~흑~
마나님은 다 먹지도 못하는 것 잘못하면 보관 중에 상하니깐, 아빠가 구입해 온 빵은 주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여, 상기 본인은 그렇다면 1만원 정도에 불과한 양(量)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왕이면 '우리 딸아이 집에 갖다주자!'고 협의했습니다. 시집간 딸아이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했고 걱정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자 군포의 집까지는 너무 먼거리이니깐, 우리집과 딸아이 집의 중간지점인 양제동 소재의 '코스트코,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각 양재동 소재 코스트코 앞까지 갖고 사위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딸을 데리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과천 근처의 '한성'식당으로 갖습니다.
우리 엄마와 아빠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준 딸과 사위를 위해 우리 부부는 비록 씨암탉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한우가 듬뿍 들어간 버섯찌게로 저녁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딸아이는 귀가하는 아빠를 위해 급히 편의점으로 달려가 시원한 음료와 또 스마트폰 차량용 충전기를 구입해 전해 주었습니다. 야심한 밤 늦은 시각 과천에서 반포대교를 지나 우회도로인 동부간선도로 방향으로 진입을 하여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달렸던 중, 아들녀석에게 전화를 건 결과 아직도 친구와 함께 운영하는 cafe에 있기에 차량의 방향을 돌려 영등포로 행했고, 아들녀석을 승용차에 태워 함께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집에 도착한 그 시각은 밤 12시 30분이었습니다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가볍기만 했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