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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시는 일 (요9:1-12절)
나병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폴 부렌드 박사는 “고통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는 이상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미국에서 일평생 나병 환자들을 돌보면서 고통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 환자들을 통해 체험하고 나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가령 나병 환자가 숯불 속에 넣어둔 밤을 끄집어내어 먹을 때 그들의 슬픔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은 손에 이미 문둥병이 번져서 숯불의 뜨거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은 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손가락에 신경이 살아 있으면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곧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는 죽은 육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혼에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임을 확인하는 것이기에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평과 불만을 하게 되는 대부분의 상황은 우리가 고난이나 고통을 당할 때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나의 눈으로 볼 때는 언제나 아픔이요, 재난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축복일 수 있으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회일 수 있고,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찾았고 성전에 올라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침 그때 현장에서 간음을 하다가 잡혀온 여인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신 주님은 무리를 향하여 자신의 존재를 생명의 빛으로 알리셨습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초막절에는 성전 여인들의 뜰에서 4개의 황금 촛대에 불을 밝힘으로서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힌다는 상징적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신 주님은 자신이 모든 빛의 근원이요 생명의 빛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과거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과 동일하게 나타내시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빛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사60:19-20 다시는 낮의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이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선언하신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고치시고 보게 하심으로서 자신의 증거를 구체적으로 확증해 보이셨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무리 불행해도 이 사람 만큼 불행할 수 없고 아무리 쓸모가 없어도 이 사람 만큼 철저하게 무용지물일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입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흑암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포기의 풀도, 싱그러운 나뭇잎 하나도, 작은 들꽃 하나도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뿐 아니라 자기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무슨 감정이 있으며 감격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엎친데 겹친 격으로 살림은 아주 빈곤하고 가난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가 던져 주는 동전 한 닢 그것에만 모든 신경이 쏠려있는 거지 인생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고 내일도 없습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사람,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해 오늘도 지겨운 인생의 걸음을 걷고 있는 절망의 존재입니다.
이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해야 합니까. 적어도 본인의 잘못도 아니요, 부모의 잘못도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이런 비참한 인생으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말하기를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삶에 목적이 있고, 삶에 방향이 있으면 분명히 살아갈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신체를 지탱해야 하는 수고와, 생존의 고통과, 암울한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구걸을 비웃는 냉대가 전부입니다.
지나간 화려한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찬란한 미래의 꿈도 꿀 수도 없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자기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셨을까. 이렇게 된 불행의 원인이 무엇일까. 아마 조상이나 부모가 죄를 많이 지었거나 자신이 전생에서 죄를 많이 지었겠지. 하면서 수군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죄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의 죄인가 하는 것을 꼭 따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것이 부모의 죄냐. 본인의 죄냐. 하고 갑론을박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 사람에게 감당하기 힘든 치명적인 모욕이요, 비난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동냥을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선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마음 상하는 소리만 언제나 늘어놓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 앞을 예수님이 지나가시면서 그를 보셨습니다. 그때 제자들도 주님께 유대인들과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요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 질문을 보면 제자들 역시 일반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 소경, 귀머거리 등 불치의 병이나 불구자에 대하여 죄의 징벌로 인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고방식이 달랐어야 옳았습니다. 누구의 죄냐를 따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말은 “예수님 저 장님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선생님 저 사람을 도울 방법은 없겠습니까.”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엉뚱한 시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가 남의 고난을 볼 때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했습니다.
첫째 그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불행과 죄를 결부시켜 버립니다. 내가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이라고 하고 남의 불행은 “그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 고생한다.‘ 하고 남이 고생할 때는 “하나님께 벌 받는 것” 이라고 힐책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쉽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둘째 남의 고난에 대해 깊은 이해심이 없습니다.
상대의 고난을 깊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대한 눈으로 보거나 동정의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판단해 버립니다. 고통을 이해하고 격려하기보다는 비판하기가 더 쉽다는 말입니다.
셋째 자기를 예외시합니다.
나와 저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정상인이 장애인을 보면 차별하기 쉽습니다. 유식한 분이 무식한 사람을 차별합니다. 자기는 본래부터 유명인 인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수가 주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지나가는 소경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깨닫는가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었다고 해서 지식을 잃은 것도 아니요, 건강을 잃었다고 해서 정신이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은 말하기를 ‘고난의 시기에 동요하지 않는 것, 이것은 참으로 칭찬해야 할 탁월한 인물이라는 증거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을 잃으면 모두 다 잃은 것으로 착각하고 낙심하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잃는 것은 무엇이며 얻는 것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고통 되는 까닭은 철저한 자기 상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환경적인 요소를 다 잃을 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먼저 예수님은 소경의 문제를 신학적 논쟁이나 죄 문제로 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이루실 경륜을 생각하십니다. 아무 쓸모없는 거지 소경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보신 것입니다. 나타난 현상 세계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그 진정한 원인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도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을 사람들이 볼 때에는 실패요, 불행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성공이요,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를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소경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의 육신의 고난을 보았지마는 예수님은 소경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은총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죄인으로 보았지마는 예수님은 소경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의인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든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시고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자세로 이 문제를 대하고 계십니다.
*요9:4-5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이러한 메시야의 사명이 시간적으로 낮에 제한되어 있어 매우 촉박한 것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일에 제자들을 동참시켰습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어둠의 권세에 매여 지척을 분별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빛의 아들로서 살아가야 함을 깨우치시고 이 제자들을 통해 눈먼 자에게 빛을 주는 구속 사역이 지속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후 다시 메시야적인 자기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헬라어로 “포스 에이미 코스무” 입니다. 세상에 해당하는 ‘코스모’ 는 히브리어로 ‘바울람’ 인데 이 단어는 원래 ‘영원, 불변.’ 의 뜻이었으나 후대에 고통의 현세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비친 유일한 빛이셨습니다.
*사49: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들을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오늘 이 소경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캄캄한 어둠이 밝은 빛을 만난 것입니다. 흑암이 깊은 곳에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졌듯이 눈먼 소경에게 창조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요9: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환자를 치료하심은 독특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주님이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신 것은 새로운 형태의 창조 행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많은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실 때는 말씀이나 안수로 치료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은 날 때부터 소경이 아니라 대개 어릴 때 사고로 눈을 다친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람은 태어날 때 불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사역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9:32-33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예수님은 흙을 다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 라는 뜻의 연못입니다. 베데스다와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중에 하나입니다. 처녀의 샘이라는 기혼 샘으로부터 수원을 공급받아 예루살렘 성 안에 물을 공급합니다.
‘실로암’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창세기에 야곱이 넷째 아들 유다를 축복할 때 ‘실로’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거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창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서 “실로” 는 메시야 곧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사8: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실로아 물을 버렸다.”는 것은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이 배척당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생수의 근원이 되셨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적 실로암이시며, 참 실로암이신 주님은 소경을 자신을 상징하는 실로암 못으로 보내시고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들의 죄악을 씻고 정결케 되어야만 그들의 닫혔던 눈이 열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소경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로암으로 내려갑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씻고”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닢사토” 는 ‘자기 몸을 닦다.’ 라는 의미로 이 소경이 단순히 자기의 눈만을 씻은 것이 아니라 물에 온몸을 완전히 잠겨서 씻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그가 예수의 말씀을 얼마나 간절하고도 신실한 마음으로 순종했는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눈 뜨기를 얼마나 원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자신의 눈을 뜰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옴 몸을 물속에 잠그고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눈은 완벽하게 치료 되었으며 밝은 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는 어둠 밖에 없었는데 빛이 찾아 온 것입니다. 진실로 그에게는 예수님은 빛이셨습니다. 그는 참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평생의 장애를 고쳤을 뿐 아니라 이 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게 된 소경을 심문하면서 주님을 고소할 구실을 찾았습니다. 소경의 부모는 출교를 겁내어 사실을 진술할 것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소경이었던 그는 유대인의 질문에 담대하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요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더욱이 그는 바리새인들이 직접 불러 묻기를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할 때에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선지자니이다.” 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당신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 라고 되물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요9:30-33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난 이 사람을 만나주시고 소경이 눈을 뜨게 된 진정한 의의는 믿음의 주를 바라본 데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의 영적인 눈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영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경영하시는 일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관념과 전통에 매여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가 배운 지식에 따라 쉽게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고통은 그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과 축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며 영원합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날 때부터 맹인된 거지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속에서 버림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을 때 그는 제자들보다도, 바리새인들보다도 더욱 신령한 은혜를 맛보았으며 큰 이적과 표적을 경험하고 예수가 누구신지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이 밝아짐과 동시에 영적 세계가 환히 열렸습니다. 말하자면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불쌍한 거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로 살아갈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몰라 주고 오해하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과 영광 중에서 존귀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 신령한 세계, 그 신비한 세계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교통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 있습니까.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 속에 있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있음을 깨닫고 바라고 소망하면 주님이 오시는 그 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소망을 버리지 마시고 굳게 잡으면 내가 알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은 일어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하면서 소망 중에 영광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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