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강 문 석
실로 오랜만에 의정부 땅을 밟았다. 군에서 제대하면서 떠나온 곳이니 48년 세월이 흘렀다. 그 반세기 세월이 밀어올려 의정부는 천지개벽하여 낯선 이국처럼 변했다. 서울역에서 1호선 전철에 오르면서 그 변화상을 미리 떠올려보긴 했지만 낯설어도 너무 낯설어 동서남북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알려진 대로 ‘의정부’란 이름은 조선시대 최고 의결기관인 관청을 이른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하다가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렀고 의정부 3정승을 포함한 대신들이 이곳에 와서 정무를 논의한데서 의정부란 이름을 얻었다.
부관의 환궁소식을 접한 태종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이곳 전좌마을까지 친히 나와서 환영준비를 하였고 이성계는 타고 온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아들 태종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시가지 중심에 세워진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는 조각상이 그 역사적 순간을 말해주고 있다. 먼저 군생활의 추억이 깃든 미1군단사령부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상전벽해로 사라진 부대를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60년대에 시가지 한복판이었던 중앙로를 둘러보기로 했다. 어느 날부터 도시들이 내거는 캐치프레이즈에는 희망이라든가 행복 그리고 꿈이란 말이 빠지지 않는다.
의정부도 ‘희망도시’를 표방하면서 그 중심지에 조성한 문화의 거리를 ‘행복로’라 붙이고 있었다. 중앙로를 행복로로 이름만 바꾸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어느 도시가 그러지 않았겠는가. 이곳을 처음 찾는 사람이라도 행복로란 길을 새로 만들면서 많은 돈을 쏟아 부었다는 걸 알 수 있게 해놓았다. 파발교차로에서 역전교차로 구간에 키꼴이 하늘로 쭉쭉 뻗은 귀족소나무들을 쭉 심었고 그 소나무 높이에 맞추어 돌로 빚은 조형물들도 높게 만들어 하늘을 찔렀다. 청춘남녀가 가까이 마주보고서서 그윽한 눈빛을 보내거나 입맞춤 직전의 황홀한 애정장면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표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얼굴들은 허공에 높이 떠있었다. 사라진 군사령부를 찾기 위하여 시청 관광과를 떠올렸다. 그곳에 가면 서는 부대의 마지막 기록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바로 눈앞에 관광안내소 간판이 나타났고 그 안에 자그마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반백년 세월을 거슬러 오른 부대 사진이 딱 두 장 그곳에 붙어 있었다. 사진 속엔 ‘미1군단사령부’를 까만 영문자로 나타낸 부대 간판이 작은 위병소가 서있는 정문 위와 낯익은 사령부 건물 정면에 각각 붙어 있었다.
사령부는 주로 ‘붉은 구름부대’란 별칭을 줄여서 CRC로 나타냈다. 용산의 미8군은 물론 전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에선 그렇게 통했다. 어느 부대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장비나 소모품을 수령할 때도 그랬다. ‘한국동란 이후 미1군사령부 등 8개 미군부대가 의정부에 주둔하여 군사도시로 성장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어쩌다가 소발에 쥐잡기로 군단에서 선발하는 ‘모범사병’에 뽑혔다. 영관급 미군 장교들이 마주앉아 묻는 미합중국 대통령과 국방장관 미8군사령관의 이름을 답하고 ‘군인의 길’을 영어로 읊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 기념으로 받은 것은 인증서와 B5용지 크기의 인물사진 두 장이었다.
미군대위가 촬영실에 고정된 사진기로 정성을 들여 찍으면서 두 컷을 찍는 걸 보고 처음 찍은 것은 실수를 한 것이라 여겼는데 그 두 장은 같은 인물을 판이하게 다른 얼굴로 만들어냈다. 흑백인데 색상까지도 달랐다. 그 사진은 결국 나에게 카메라를 갖게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군들이 주둔한 동두천과 파주의 부대를 직접 체험하는 기회도 가졌다. 한국동란에서 사단기를 빼앗겨 영구히 귀국하지 못하는 미7사단은 소요산 자락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1박하면서 용맹스럽고 잘 훈련된 셰퍼드 군견들을 만났다. 여러 마리를 이끌고 철책을 따라 산길을 밟으며 군견들의 경계근무를 방문한 우리 병사들에게 견학시켜 주었다.
7사단에 비하면 인디언추장 얼굴이 부대마크였던 파주의 미2사단에서 보낸 2주간은 별로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서로 병력을 바꾸어 상대방 부대를 체험시키고자 만든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제대특명을 받아놓고 집에 갈 날짜를 손꼽고 있을 무렵 청와대를 급습한 무장공비 사태가 터졌다. 퇴각하는 무리들을 잡기 위한 포위작전이 펼쳐졌다. 부대막사에서 바라봐도 무수히 공중에 떠있는 조명탄들이 도봉산자락의 칠흑 같은 어둠을 밀어내고 밤을 대낮처럼 밝히면서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다. 같은 막사 안의 코쟁이들은 지레 겁을 먹고 퀀셋 속에서도 바들바들 떨거나 침대에서 모포를 뒤집어썼다.
우린 개인화기 엠포틴을 휴대하고 쓰리쿼터에 올라 지금은 화장장이 들어선 벽제에서 이중으로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는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 계산은 많이 빗나가 잔당들은 이미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넌 뒤였다. 송추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놓은 칠팔 구의 공비들을 만났다. 사채는 총상으로 훼손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취재하는 미군 장교들 틈바구니에 붙어서 카메라에다 가마니로 얼키설키 덮어놓은 124군부대 공비들의 최후를 담을 수 있었다. ‘부대찌개’는 의정부에서 태어나 전국으로 퍼진 음식이다.
십여 년 전 모처럼 외식을 한답시고 화명신도시에서 부대찌갤 시켰다가 아내에게 타박을 들은 적이 있다. 한식도 양식도 아닌 잡탕을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의정부에서 복무하던 그땐 보릿고개도 끝나지 않아 모두가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햄과 소시지 베이컨 같은 서양식 식재료들이 그냥 먹기에는 우리의 입맛에 좀 느끼했다. 그래서 전통 식재료인 김치와 고추장 가래떡과 신선한 야채까지 넣어 얼큰하고 시원하게 끓여먹기 시작한 것이 부대찌개의 시작이었다. 겨울해가 짧아 예정했던 송추유원지를 찾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금은 유원지로 바뀌었지만 반세기 전엔 ‘잭슨메인’으로 불렀던 부대의 군사훈련캠프였다. 카메라 덕분에 숲속에서 총을 가지고 벌이던 훈련장면은 물론 휴식시간에 묏등에서 총구를 얼굴에 바싹 붙여 벌인 일탈행동과 밭에서 미군들과 무를 뽑아먹으며 찍은 장면도 재미있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송추계곡은 세월을 지나면서 의정부와 고양을 잇는 국도변에 위치하게 되었다. 항상 맑은 물이 흐르다보니 수영장과 낚시터까지 생겨 수도권 시민들의 유원지로 탈바꿈했다. 군홧발로 산을 오르내렸던 도봉산에서는 용추계곡이 북서쪽에 자리한다. 그런데 도봉산은 둘로 나뉘어 의정부 쪽은 원도봉산이다.
조선 초기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갈등으로 백성들의 마음도 패가 갈렸던 것이다. 그래서 진짜 왕은 이성계이고 이방원은 가짜 왕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상왕이 있는 쪽이 진짜라는 의미로 원도봉산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 생활하던 시기에 양주군에서 시로 승격한 의정부는 이제 43만의 대도시로 경기북부지역을 대표한다. 이렇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위치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남쪽으론 서울의 도봉구와 노원구가 붙어있고 80년대에 창동역에서 의정부까지 수도권전철이 연결되었다. 동남쪽으론 남양주시 동북쪽으론 동두천 그리고 북서쪽으로는 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의정부역은 신세계백화점 건물에 들어있어 관광지도에도 그 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대기업 자본이 든 때문인지 초대형 역사는 으리으리했다. 그런데 그늘도 없지 않았다. 몇 백 개나 되어 보이는 건물의 지하상가는 전부 문을 닫고 있었다. 간판이 아직 그대로 다 붙어있는 걸로 봐서 영업을 시작했다가 점포를 접은 것이 분명했다. 편의점 등 문을 연 점포는 몇 개에 불과했다. 상당수 시민들이 전철에만 오르면 쉽게 닿을 수 있는 서울의 시장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모양이다. 시민들이 동대문이나 남대문 등 서울의 전통시장을 찾는다는 걸 감안했더라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지하상가를 돌자니 점포들을 분양받았던 상인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둠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할 무렵 예매한 부산행 열차시각에 쫓겨 전철에 올라야 했다. 송추유원지와 관광지도에서 그림으로만 본 ‘소풍길’이 떠올랐다. 이제 흘러온 날들처럼 내 앞에 남은 긴 세월은 없다. 서둘러 올해 안에 봄여름 가을을 가리지 말고 하루를 날 잡아 의정부행 전철에 오른다면 수려한 의정부의 풍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땐 가족도 동반했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