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들의 전문수법, 적반하장
2006.5.5일, 흉기를 든 폭도에 일방적으로 매맞는 군인(조선일보)
빨갱이들의 주장: ‘군이 평화시위대를 인간 사냥하듯 폭력 진압했다’
실제 비디오: 군인이 일방적으로 매맞았다. http://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11591884&menuid=&listtype=A&boardtype=L&page=&articleid=19431
시위대의 주장과 달리 군이 시위대에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동영상이 처음 공개됐다. 한 시위대가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는 군 장병을 끝까지 쫓아가 이단옆차기로 가격하는가 하면(사진 왼쪽) 끝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아 위협적인 죽봉에 수 차례 얻어맞은 뒤 견디지 못한 장병들이 옆 도랑으로 도망치고 있다.
이 동영상은 마스크를 한 시위대가 앞부분이 갈라진 긴 죽봉으로 군 장병들을 때리고 위에서 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앞부분을 일부러 갈라놓은 죽봉은 상대를 푹푹 찌르는 효과를 내며 시위대는 장병들의 유일한 방어 무기인 방패 아랫부분을 집중 타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뒤 아픔을 견디지 못한 선두 장병들이 매를 피해 바로 옆 농수로로 탈출하려다 넘어지고 일부 병사는 물에 빠지기도 한다.
장면이 바뀌어 시위대는 군 장병들이 설치해놓은 철조망을 절단한다. 군 장병들이 파손된 철조망을 복구하려 하자 다시 시위대가 죽봉을 들고 나타나 장병들을 구타한다. 몽둥이 찜질이 계속되자 견디지 못한 장병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지만 시위대는 매질을 그치지 않는다. 장병들이 도주하자 시위대가 끝까지 쫓아가며 포위한 뒤 이단옆차기로 가격하기도 한다.
이 동영상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등이 “80년 광주항쟁의 재연과도 같은 군인을 동원한 살인적인 진압은 우리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군 장병들이 얻어맞고 있다.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bemil@chosun.com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육사23기)의 회고
"5월 20일 아침7시 30분, 우리는 광주역에 도착하자 전남대학에 투입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사황이 달라져 곧바로 광주시내에 배치됐다. 우리 대대가 맡은 지역은 양동다리에서부터 광주고속에 이르는 광주의 남쪽 주요도로였다. 비가 오고 있었다. 장비가 젖고 추워서 무작정 도로에 서 있기가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병력을 팀 단위로 주요 교차점에 배치시키고 양동교에 서 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도청, 양림교, 충장로 지역에 배치된 11, 12, 13대대 지역에서 시민,학생들과의 잦은 충돌이 있다는 보고가 무전기에 들렸다. 나는 우선 대대지역에 별 일이 없는가 하여 몇 개 교차지점을 순찰했다. 중간 중간, 우리 병사 하나 둘을 10여 명의 시민들이 둘러싸고 욕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도대체 세계 최강을 자랑한다는 무적의 공수단이 시민에 포위되어 욕을 듣는다니...
나 자신도 무전병과 단둘이 순찰하기가 겁이 났다. 병력이 너무 분산 배치되어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 대대는 다른 대대에 비하면 훨씬 편한 편이었다. 다른 대대는 많은 공격을 당했는지 배치고 뭐고 집어치우고 대대 전체가 한 곳에 집결해 있었다. 그래도 자기 보호가 어려운 상태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여단장은 분산배치에서 자기방호로 집결하도록 하는 한편 대대 자체가 위협을 받자 여단을 집결시키기 위해 11, 12, 13, 15대대를 광주역에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19시쯤, 비가 그쳤다. 악몽의 5월 20일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우리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허기가 지고 입에서 냄새가 났다.
'라면을 끓여 달라고 어느 식당에 들어갔더니 공수부대에게는 안 끓여주겠다고 하더라’ ,
‘병력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게 성당 마당으로 들어 가겠다고 하니까 신부가 안 된다고 거절하더라’
이런 얘기들을 들었다.
우리 군인은 광주에서 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위 시절 유격훈련을 받을 때 전라도 화순 어디에선가 농부에게 얻어 먹은 보리밥과 고추장 맛을 잊을 수 없다. 군 생활 15년간 얼마나 많은 훈련을 다녔는가, 김치,고추장, 된장은 말할 것 없고 힘들고 지칠 때면 주민의 도움을 받고 군인인 것을 보람으로 살아 왔는데...
적군도 다치면 치료를 해주고 밥을 주는데, 지친 병사가 가져간 라면을 끓여만 달라는데 어떻게 거절 할 수 있단 말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직자의 덕목은 어디로 가고 철문을 굳게 잠근채 안 된다고 돌아 설 수 있다는 말인가?
비맞고 지친 이방의 군인, 집안이 어려워 특전사로 자원 입대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배고파 지친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식당의 미닫이를 닫아 버렸단 말인가?
나는 양동교에서 팀단위 철수를 지시했다. 집결하여 이동하는 것보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7-8명씩 열 지어 무표정하고 아무 일 없는 듯하되 발걸음은 빠르게 하여 광주역으로 모여 들었다. 11, 12, 13대대가 광주역에 무사히 도착하는데는 엄청난 위험들이 있었다.
대대가 시위 군중에 완전히 포위되어 돌과 몽둥이의 공격을 받아 대대가 해체 직전의 위험까지 갔다고 한다. 가스분출기로 겨우 통로를 열어 쫓기듯 돌아 왔다고 한다. 21시가 되면서 어느 정도 대형을 갖춘 상태에서 광주역에 집결이 완료 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힘이 없어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 문득 내 병사들이 생각났다. 중령인 대대장인 내가 이렇게 배가 고프다면 말단의 병사들은 얼마나 배가 고플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지역의 방어에도 자신을 잃기 시작하였다.
나는 방어지역의 제일 선두에 있기로 했다. 광주사태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내가 부여 받은 3개 방어지역 중 제일 위험한 통로인 광주고속과 광주역을 잇는 도로상을 방어하고 있는데 깜깜한 밤에 느닷없이 도청 쪽 12대대 담당지역에서 버스 한 대가 터덜 터덜 굴러 와서 광주역 앞 분수대를 들이 받고 넘어졌다.
광주의 시위는 공수단의 엄청난 착각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얼룩 무늬복에 배레모만 쓰고 차렷 자세로 투입되기만 하면 시위가 끝나는 것으로 통념화 되어 있던 시위진압이 광주에서는 공수단의 패퇴, 공수단에 대한 공격, 부대의 와해, 사단장 차량의 피탈, 공수단의 무등산으로의 도주 등 실로 6.25전사의 3군단 패배에 못지 않는 치욕의 전사가 기록되고 말았다.
'무인 돌진차량'(액셀러레이타와 운전대를 일정 속도와 방향에 묶어 놓고 기어를 1단에 넣은 후 클러치를 떼면서 사람이 뛰어 내리고 돌진하게 하는 차량) 공격이 시작되면서 우리대대를 향해서도 5 대 가량의 무인 돌진 차량이 간헐적 으로 돌진했다. 공격자를 찾아서 공격을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고 허기져 있었다.
방향과 속도가 일정하니까 무인 돌진 차량을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배치된 대형에서 차량의 통로만큼만 열어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방향에서 올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늘 주의와 신경을 곤두세워 피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이때부터 ‘차 온다’는 고함소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광주사태가 끝나고 귀대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우리 3공수여단 장병에게 ‘차 온다’ 는 고함소리는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악몽의 함성으로 자명되었다.
간헐적인 무인차량의 공격과 더불어 각 방향에서 폭도의 몽둥이 공격, 투석공격이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고 우리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의 대항을 지속했다.
밤 10시가 훨씬 지났다. 그런 적막도 잠시였다. 저 멀리 양동교 방향에서 함성과 노래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점점 함성이 가까워 지면서 갑자기 ‘차 온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12대대 쪽에서 굉장한 속도로 라이트를 켠 화물차가 질주하여 분수대를 들이박고 달아났다. 엄청난 속도였다.
얼마 있다가 16대대 운전병이 돌진차량을 피하지 못해 몸이 갈기갈기 찍힌 체 죽었다는 최초의 피해보고가 구전되어 왔다. 그는 내가 16대대에 있을 때 운전병으로 선발된 병사였는데 제대를 몇일 앞두고 광주에 출동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서울에 복귀한 후에도 광주에서의 희생자가 많아서 군인의 죽음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아 지금도 나는 자세한 상황을 모른다. 다만 16대대가 광주역 좌측 방향에서 반대방향으로 포진하고 있을 사이에 돌진차량이 시속 100키로로 달려들어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30명 정도 죽었을 사고였으나 대대장 운전병만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들었다.
이에 무인 돌진차량이 유인돌진차량으로 바뀌었다. 속도도 엄청났지만 방향이 일정치 않고, 우리 대형을 찾아서 돌진하는 공격이기 때문에 위험성은 훨씬 높았다.
드디어 우리 대대 앞으로 그런 유인돌진 차량이 공격을 감행했다. ‘차 온다’는 고함소리에 눈을 돌리니 화물자동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직진하고 있었다. 유인 돌격 차량에 대해서는 가스탄도 곤봉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총 앞에 탱크가 출현한 미아리 전투와도 같은 것이었다.
최선의 공격이라고 떠오른 대대장의 전략(?)이라는게 차량의 바퀴를 펑크 내는 일이었다. 우리 대대원은 실탄을 휴대하지 않았다. 포승줄과 최루탄도 과잉장비라고 투덜대던 우리가 실탄이 소요되는 상황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총은 군인과 떨어질 수 없는 분신의 개념으로 휴대한 것이었지 쏘려고 휴대한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공수대가 출동명령만 받으면 반사적으로 들고 나오는 약간의 탄약은 전남대에 남겨 놓은 상태였다. 유일한 총기는 대대장인 나의 45구경 권총과 실탄 14발 뿐이었다.
순간 나의 병력을 뚫고 화물차가 돌진하고 있었다. 총을 꺼냈다. 탕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제발 명중하지 말아라하고 기도했다. 다행이 차에 명중되지 않고 차량은 분수대를 들이 박고 정지되어 12대대 병력에 체포 되었다.
수 차례의 폭도 공격이 있었고 시간은 밤 11시가 지난 듯 싶었다. 병력의 선두에 서 있는 내 앞 저 멀리 군중 속에 헤드라이트를 켠 2톤 트럭이 돌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부 병력이 ‘차 온다’ 고 예고하고 있었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가슴이 뛰고 있다.
방법은 없었다. 실탄을 제거하고 총을 집어넣었다. 차가 돌진을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직진이 아니고 병력이 피하는 방향으로 향하면서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돌진해 오고 있었다. 100미터, 50미터, 30미터, 발이 아스팔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는 이미 맹렬한 속도로 3미터 앞에 달려오고 있었다.
그 짧은 동안 나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안 생각도 났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가장 끝까지 생각한 것은 배고파 지친 우리 대대 병력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난국을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죽음은 나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운명에 달려 있었다.
오른쪽으로 뛰어 넘어져 버렸다. 차량은 휙 지나가면서 나를 에워쌌던 부하대원 4명 중 2명이 차의 뒷바퀴에 끌려가면서 다친 것으로 끝났다.
차가 분수대에 부딪쳐 멈추자 우르르 몰려간 우리 병력에게 운전자가 잡혀 내려왔다. 감정에 복바친 우리 병력은 진압봉으로 그를 두들겨패기 시작하였다. ‘때리지 마’ 그러나 그것은 전장에서 사격을 중지시키는 것만큼 들리지 않는 대대장의 명령이었다. ‘때리지 마’ 내가 마지막 고함을 지르자 모두들 자기 위치로 갔다.
병력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운전자가 툭툭 털고 일어나 뛰어 도망갔다. 20세 전후의 젊은이였다.
24시가 되어 시위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16대대가 전남대 입구를 엄호하는 사이 우리는 전남대로 철수를 시작했다. 별이 많이 떠 있는 초여름 밤이었다. 전남대학교 숙직실에서 처음 라면을 끓여 먹었다. 숙직실 1평방에 여럿이 다리를 포게고 잠이 들었다. 광주사태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냈다. “
-박종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