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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 (10) 머슴 출신 호남의병의 용장 안계홍
문대식 추천 0 조회 34 19.12.24 19: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 (10) 머슴 출신 호남의병의 용장 안계홍
日 군경 격파하자 양반·유생도 환영
의병 활동 때 약탈 금지시켜 민중 뜨거운 지지
백성 괴롭히는 관리·지주·일진회원 등 혼내
부산일보 2008/05/03일자 015면 서비스시간: 15:44:44
 

안계홍 의병장(위쪽).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파청마을 비들고개에 있는 '파청승첩비'.
1908년 5월 2일, 일본인 순천경찰서장은 전국의 의병토벌 상황을 총괄하는 일본인 내부경무국장에게 긴급보고를 하였다. 60여 명의 의병이 전남 보성군 대원사를 근거로 빈번히 출몰하기에 일인 순사 6명, 한인 순사 4명으로 순천군 송광면 문곡리(현 보성군 문덕면 문곡리)에 토벌을 나섰는데, 되레 일인 순사 2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보고였다.

순천경찰대 10명이 지리에 익숙한 일진회원의 도움을 받으면서 5월 1일 오전 7시 출발, 오후 2시 대원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의병들의 맹렬한 공격에 맞닥뜨렸던 것.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토벌대였지만 중상을 입고 혼절한 일본 순사 2명을 업고서 비 오듯 하는 화승총 총탄 속을 뚫고 간신히 철수, 다음날 새벽 2시에야 낙안주재소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맹활약했던 의병들은 며칠 전인 4월 26일 보성군 득량면 파청마을 앞 야트막한 고개에서 보성헌병분견소 기마병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총 3정과 탄환 2백여 발을 노획한 이른바 '파청승첩'을 거두었다. 의병들은 일본 기마병의 옷에 별을 달고 있으니, 지위가 아주 높은 줄 알고 더욱 사기가 충천해 있었던 터였다.

당시 의병대장은 강사문이었고, 안계홍(1879~1911)은 부대장이었다. 강사문 의병부대는 의병 112명, 총기 80여 정을 갖춘 당당한 부대로, 지리에 밝은 보성의 열혈 청년 수십 명으로 구성된 안계홍 의병부대가 의기투합해 세력이 만만찮았다.

일본 군경과 몇 번의 전투를 치른 후 문제가 발생했다. 강사문 의병장이 이끌고 왔던 의병들은 주로 장성 출신이었는데 반해, 부대장 안계홍 의병장을 따르던 의병들은 보성 출신이었던 관계로 갈등을 빚게 된 것. 강사문 의병부대는 광주·나주·장성 지역으로 나아가고, 안계홍 의병부대는 보성·순천·장흥 지역을 돌면서 의병 모집에 나서게 됐다. 안계홍 부대에는 해산군인 출신 오주일 의병부대 수십 명이 합진하게 되고, 염재보를 비롯한 보성 문덕 청년들이 합세, 동소산에서 새로 의병부대를 구성하게 된다.

안계홍 의병장은 본관이 죽산으로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출신이다. 네 살 때 부친을 여읜 그는 어머니와 함께 동소산 아래로 이사, 그곳에서 소년 시절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했기에 그를 '안담살이'라고 불렀다. 그가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 양반·유생들은 함께 도모하기는커녕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일본 군경을 쳐부수는 맹활약을 하자 마을 사람들은 큰 잔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안 대장은 우렁찬 목소리로 의병투쟁의 방향을 밝혔다. "우리가 의병을 일으킨 목적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왜놈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탐학한 관리와 주구하는 자를 근절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왜놈 앞잡이 세력을 없앨 것이며, 마지막으로 왜놈들을 죽일 것이다." 동소산은 의병들과 주민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안 대장은 의병투쟁을 하면서 비행을 철저히 단속하고, 약탈을 금했다. 그 결과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사실 또한 일본 경찰의 비밀기록에서 읽을 수 있다.

"이곳은 안(安)의 출신지이기 때문에 주민들 가운데 배일사상을 가진 자가 극히 많고, 도리어 안 등에게 동정하는 자가 있어 토벌의 효과가 적으며 그들의 날뜀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 해 8월 24일 진산에서 일본군 수비대 및 기병대와 격전을 벌여 일본군 5명에게 부상을 입힌 '진산대첩'도 민중들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안 대장은 보성·순천·화순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26차례 전투를 벌였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나 탐학 지주를 벌한 것이 7차례, 일진회원을 혼내준 것도 4차례로 나타나 있다.

1909년 9월 1일부터 일제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펼치기 직전, 그 정지 작업으로 의병토벌이 극심하던 8월 하순, 안 대장은 염재보·임창모 등 제장들과 중대한 회의를 한 뒤 후일을 기약하자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의진을 해산했다. 하지만 그 뒤 얼마 있지 않아 일진회원의 밀고로 사로잡혔으니, 그 날이 9월 25일이었다.

안 대장은 광주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끌려갔다가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인 1911년 5월 5일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20여 년을 머슴살이를 해오다가 국권회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그는 비록 다섯 자 세 치의 몸이었지만 일제로부터 '비장(飛將)'이란 칭호를 받았던 호남의병의 용장이었다. 석 자 높이의 돌담을 쌓고 진지를 구축한 화순 '쌍산의소'와 보성 비들고개만 아직도 그날의 함성을 머금고 있을 뿐이다.

김해건설공고 교사·문학박사(의병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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