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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루카 2,22-35
주님은 어떤 사람을 관상기도의 은총으로 부르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은 성전에 봉헌되시고 이때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시메온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그 사람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가 주님을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주셨고 결국,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메시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관상’의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입니다.
이 중에서 관상기도는 소리기도와 묵상기도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관상기도에서는 소리기도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고 묵상기도에서 정신적으로도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서 마음의 큰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은총이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는 않고 오늘 시메온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인생에서
오직 그분을 만나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또 그분께서 반드시 만나주신다는 믿음을 성장시킨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포스베리의 역발상’이란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현재 육상 높이뛰기 선수들은 모두 배가 하늘로 향한 채 뒤로
바를 넘습니다.
이른바 ‘배면뛰기’ 자세입니다.
하지만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의 한 선수가 이 자세를 처음 선보이기 전까지는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자세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다들 바를 앞 또는 옆으로 장대를 넘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당시 21살의 미국 선수 딕 포스베리가 배면뛰기를 처음 시도했고,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배면뛰기는 현재 ‘포스베리 플롭(fosbury flop)’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포스베리 플롭은 지금도 스포츠사에서 역발상의 백미로 꼽히고 있고, 스포츠계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포스베리는 높이 뛰기 선수였지만 배면뛰기를 하기 전까지는 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희박한 실력이었습니다.
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분명히 이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뜀틀 공중제비돌기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뒤로 뛰기를 연습합니다.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뛰어야 가장 좋은지의 수 없는 과정을 통해 기록이 향상되었고 올림픽 대표로 발탁되었으며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현재 수영 자유형과 배영에서 발로 턴을 하는 동작인 ‘플립 턴’의 발견에서도 이어집니다.
아돌프 키예프 선수는 100야드(91.44m) 배영 경기에서 누구도 불가능하다는 마의 1분 벽을 깨고 싶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물속에서 회전하여 발로 터치를 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고 1935년 배영 100야드 경기에서 59.8초로 마의 1분 벽을 돌파합니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배형 100m에서 기록한 1분 05초 9는 이후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습니다.
바라고 믿으면 분명히 만나게 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면 반드시 만나는 해답이 있는데, 그리스도도 그렇게 만나게 됩니다.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그 양 날개로 사랑이 있는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단 하나만을 바라는 완전한 ‘희망’과 또 그렇게 희망하는 이에게 반드시 그분은 만나주신다는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에게 그런 희망과 믿음을 ‘성령’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왜 누구에게 그런 희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이는 진정으로 ‘원하고’ 어떤 이는 원하는 척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해야 성령께서 이끌어주십니다.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도 메시아의 탄생을 그렇게 원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천사와 별로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아주 잘 표현한 영화가 있는데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빛깔’(The color of Paradise)입니다.
아름다운 이란 북부의 자연이 특히 돋보였던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년 무하마드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에게 손가락의 감각으로 세상 사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말해주는 아저씨에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도 알잖아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내가 시각장애인이기에 모두 내게서 도망가요. 볼 수만 있다면….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일반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렇지만 나는 맹인학교에 다녀야 해요.
내가 원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에요.
우리 선생님은 우리가 볼 수 없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대요.
근데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해서 당신을 보지 못하게 했을까요?
선생님은 말했어요.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시고 저는 그분을 느낄 수 있대요.
저의 손가락의 감각을 통해서요.
그래서 저는 손을 여기저기 뻗는 거예요.
하느님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요.
그리고 그분에게 나의 마음속 비밀까지도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손의 감촉으로 나무의 질감을 느껴서 그것들을 생존을 위한 일거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 손을 뻗다 보면 주님을 만질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새의 지저귐을 듣습니다.
직감적으로 새끼 새가 둥지에서 떨어졌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더듬더듬 나뭇잎들을 손으로 뒤집니다.
자칫 새끼가 다칠 수 있으니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입니다.
고양이가 다가옵니다.
그는 새끼 새를 고양이에게 빼앗길 수 없어서 솔방울을 들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던집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해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들을 노리는 새들을 쫓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렇게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무하마드는 새끼 새를 자신 윗도리 앞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새소리가 나는 나무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로 기어오릅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힘겹게 기어오릅니다.
그리고 둥지를 찾아 새끼 새를 넣어줍니다.
그리고 고마워하는 새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무하마드는 미소를 짓습니다.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만을 만나려는 바램과 그분을 반드시 만날 수 있기에 나의 더듬거리는 손짓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과 희망만이 결국엔 우리를 한 완전한 실체인 사랑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끕니다.
관상에서의 그분과 만남은 한 인간이나 혹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한 온전한 사랑의 실체와의 만남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가 “목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목마른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김하종 신부가 한 냄새나는 가난한 아저씨를 안았을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소리를 들은 것과 같습니다.
나의 존재가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하여 모든 사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입니다.
이런 시각의 변화로 세상 어떤 피조물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처럼 우리도 그분을 만나기만을 원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원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분명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이 희망과 믿음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루카 2,22-35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 안에서,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과분하게도 피조물인 한 인간이 자신의 두 눈으로 탄생하신 메시아, 거룩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직접 뵙는 영광이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인간의 눈으로 직접 뵈옵는 천국의 행복한 상태, 한 신앙인으로서 지복직관처럼 더 큰 은총과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강조합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할지라도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지복직관의 은총이 다가올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코린토 1서 13장 12절)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토록 은혜로운 지복직관의 선물이 살아생전 주어지기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 몇 명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나자렛의 이웃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의인이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시메온이 그랬습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시메온이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뵌 타이밍도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얼마나 경건하고 충실한 신앙인이었던지 성령께서 항상 그의 머리 위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시메온이 성령의 은총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던 중 그토록 염원하던 지복직관의 은총을 입습니다.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으로 들어온 것을 시메온이 발견한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메시아 하느님,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은 시메온은 목이 메어 말을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평생소원이었던 지복직관을 만끽한 시메온은 이제 더 이상 소원도 없게 되었습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정수리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크신 주님 은총에 시메온의 입이 열립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에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복음 2장 29~30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메온이 누렸던 ‘살아생전 지복직관’이 우리에게도 불가능이 아닙니다.
부당한 죄인인 우리에게 ‘살아생전 지복직관’ 그게 가당하기나 하겠냐는 의문이 들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행스럽게도 너무나 가까운 곳에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 안에서,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때마다 우리가 영하는 빵과 포도주,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매일의 성체는 우리 안에 매일 현존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의 표현입니다.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고 싶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겨운 바람의 표현이 영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좀 더 잘 준비하고, 좀 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한 후,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할 때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룩한 영성체를 통해 우주의 창조주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좁디좁은
죄인의 몸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때로 죄로 얼룩지고 때로 비참한 우리 몸이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이 내 육신이 예수님께서 머무시고 사시는 지성소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한한 우리 인생이지만 은혜롭게도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성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2월 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아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동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히 요즘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오르는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어떤 분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에 한 분은 지금이라도 빨리 사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분은 이제 오를 만큼 올라서 곧 폭락할 것이라며 절대 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 다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데, 과연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두 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부동산으로 이득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경험은 모두 망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세상 안에는 너무 많은 말이 있습니다. 이 말 중에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조건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 특히 사람들이 존경했던 종교지도자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맞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께 의지하며 판단해야 해야 합니다. 오류를 줄이고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메온은 예루살렘에 사는 열심한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를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라고 전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언자’로 알려진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구세주를 기다렸고 마침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그 부모를 보고 감격과 기쁨이 넘쳐흘러서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0)
오래전에 자녀를 시장에서 잃어버린 어떤 부모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딱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시더군요. 시메온은 4천 년 동안 기다렸던 구세주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달리, 갓난아기의 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우리 먼저 그 구원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롭고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다. 질문하는 여행이다(브라이언 그레이저).
행복은 시간을 남에게 할애할 때 주어진다.
한 그룹은 중병을 앓는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편지를 쓰게 했고, 다른 그룹은 라틴어 문장이 가득한 페이지에 철자 ‘이(e)’를 표시하게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과제를 마친 뒤에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풍족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 준 참가자들이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말했으며, 풍요로운(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남에게 자기 시간을 내어주었을 때, 우리는 마음의 풍요로움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결코 시간 낭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사용하고 의미 있게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은 시간을 남에게 할애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내 시간만을 만들어나갈 때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말과 함께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