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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서해랑길 15코스(당포버스정류장-달도교차로)
여행일 : ‘23. 4. 29(토)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화원면 및 산이면 일원
여행코스 : 당포버스정류장→월하마을→마천마을→마산제→별암마을→금호갑문→금호마을→달도교차로(거리/시간 : 13.6km/ 14.13km를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15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해남·영암 구간의 여덟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그동안 임시 구간(2개 코스)으로 운영해오다 2022년 12월 ‘솔라시도 대교’가 개통되면서 3개 코스로 새롭게 포장해 개통했다. 아무튼 이 코스는 금호방조제와 화원반도의 구릉지를 걷는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눈요깃거리가 없다. 그저 들길과 마을길을 걸으며 지역 주민들의 삶을 기웃거려보는 게 다라고나 할까?
▼ 들머리는 당포버스정류장(해남군 화원면 월호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49번 지방도를 타고 화원반도로 들어온다. 구지교차로(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서 국도 77호선(매월리 방면)으로 옮기면 오래지 않아 당포마을에 이르게 된다. 77번 국도변에 있는 버스정류장이 15코스 들머리이다.
▼ 새롭게 단장된 15코스는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자주 걸어야한다는 편치 않은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위험표시 교통표지판을 지도에 그려 넣었다. ‘느낌표’가 들어간 지점이 도로와 만나는 지점이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 서해랑길(해남 15코스) 안내도는 당포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시작점 표지판은 그 옆의 전봇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월호정미소’의 맞은편으로 난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를 따를 경우 ‘양화마을’로 가버리니 주의한다. 화원반도와 인근의 섬 주민들이 ‘땅끝’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송지면의 ‘땅끝’이 위도 상으로 한반도(육지)의 최남단이라면 화원반도의 ‘땅끝’은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육지의 가장 끝이란다. 실제 금호방조제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해남읍에서 버스로 1시간이나 소요되는 외진 곳이었다.
▼ 바다를 향해 일직선의 수로가 나있다. 꽤 너른 것이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간척지 또한 그만큼 넓다는 얘기일 것이다.
▼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이 그 증거다. 푸름으로 덧씌워진 농경지가 바다를 향해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간다. 넓다는 들판도 저 멀리 산이 막아서는 이 땅에서는 흔치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저런 풍경, 즉 소실점으로 모아드는 아득한 직선로가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현실에서 그런 광경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 서해랑길은 월하마을을 빙 돌아 ‘관광로(국도 77호선)’로 연결된다. 이때 양배추로 한가득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 해남은 월동배추로 유명하다. 전국의 대도시로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주민들에게 고소득을 안겨주는 고소득 작물의 대열에 요즘은 양배추가 낀 모양이다.
▼ 그 옆에서는 보리가 익어간다. 호사가들은 사시사철 푸르른 들녘을 화원반도의 특징으로 꼽는다. 월동배추가 끝나면 보리가 초록빛 바다를 연출하고, 연이어 감자와 고구마 순이 돋아나며 화원반도는 일 년 내내 녹색의 꿈이 익어간다는 것이다. 그 같은 초록빛깔의 향연을 감상하는 게 화원반도 여행의 매력이란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 ‘월하(月下)’마을로 들어선다. 3개의 자연부락(당포·월하·수동)으로 이루어진 월호리(月湖里)의 으뜸가는 마을로 ‘다라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쌀농사보다는 배추와 양파를 더 많이 재배한단다.
▼ 마을을 지나서도 주변 풍광은 변하지 않는다. 배추밭과 보리밭이 탐방로 좌우로 펼쳐지는 들녘을 꽉 채운다.
▼ 들녘의 트랙터는 빗줄기가 반가운가 보다. 시름없이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쉬고 있다. 하긴 비가 내려야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운명이니 어쩌겠는가.
▼ 그렇게 5분쯤 걸어 ‘국도 77호선(관광로)’에 올라선다.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12㎞/ 시점 1.5㎞)와 마을 표지석이 이곳이 월하마을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 이후부터는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따른다. 스치듯 지나가는 차량을 피해 걸어야하는 위험스런 구간이다. 이 구간에서 우린 ‘우측통행’이라는 정부의 지침을 비웃으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지침에 따르면 달려오는 차량을 뒤에 두고 걸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교통사고가 잦은데 달려드는 차량이 보여야 피해볼 시도라도 해볼 게 아닌가.
▼ 주변 풍광까지 삭막한 건 아니다. 스위스의 산간지방에서나 볼 법한 목가적인 풍경이 좌우로 펼쳐진다.
▼ 월하마을에서 15분. 월호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수동(水洞)’마을 입구에 이른다. 그렇다고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저 멀리서 눈인사만 하고 슬그머니 지나친다.
▼ 위험천만인 도로를 꽤 오래 걸어야 했다. 조바심 때문에 하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서해랑은 도로를 따라 1,7km나 이어지고 있었다.
▼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가는 게 아닌가. 도로 개설 때 생긴 절개지가 온통 등나무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그게 연자줏빛 꽃을 피워내면서 진하면서도 향긋한 향기를 보내온다. 덕분에 비로 인해 찌뿌둥해진 심신이 한결 나아질 수 있었다.
▼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고갯마루(이정표 : 종점 10.4㎞/ 시점 3.2㎞)에 올라선 탐방로가 도로를 벗어난다.
▼ 저 이정표는 대체 뭘 알리고 싶었을까? 하단의 서해랑길 안내도(종점 10.4㎞/ 시점 3.2㎞)가 무색하게도, 상부는 서해랑길과는 무관한 방향표지판을 매달고 있다.
▼ 서해랑길은 이제 ‘마산리’로 들어선다. 그리고 임도를 따라 마천마을로 간다. 법정 동리인 마산리(馬山里)를 구성하는 2개 자연부락(마천·마산) 중 하나로, 마천(馬川)이란 지명은 마을 지형이 말의 형국이고,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흐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엄청난 크기의 노거수 한 그루가 시선을 꽉 채워버린다. 마천마을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같은 화원반도라고 해서 보여주는 풍경이 다 같지는 않았다. 그동안 걸어왔던 황산면이나 문내면은 산다운 산이 없는 구릉지 일색이었다. 그런데 반도의 끝자락인 화원면은 곳곳에서 산봉우리가 솟아올랐다. 그중에서도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추락했던 운거산은 318m에 이를 정도로 높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마천(馬川)’마을에 들어섰다. 탐방로는 월호마을처럼 마을을 관통해버린다. 이처럼 15코스는 만나는 마을마다 관통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의사항 하나, ‘서해랑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주민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그러니 마을을 지날 때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주의해가며 걷도록 하자.
▼ 참! 마천마을을 그냥 벗어나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18년 전, 그러니까 1993년 발생했던 아시아나항공 추락사고 현장이 이 마을 부근(운거산)이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들은 진입로가 없는 가파른 산중턱까지 올라 부상자를 구했다. 항공유 유출로 2차 폭발이 예상됐지만 주민들은 부상자를 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고 한다.
▼ 당시의 기억은 ‘마천숭의관(馬川崇議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항공기 사고 이후 세간의 이목은 마천마을로 집중되었고, 주민들은 청와대로부터 초청을 받기도 했다. 에이스침대 창업자 고 안유수 회장이 지어준 저 건물도 그 헌신에 대한 보답이다. 에이스침대는 이후에도 건물의 유지(보수)·관리(운영비)를 지원해오고 있단다.
▼ 당시 사고는 탑승객 116명(승객 110명과 승무원 6명) 중 68명이 사망하고, 44명이 중상을 입었다. 저 위령비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탑승객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다.
▼ ‘신한국의 표상, 사랑의 마천마을’이란 대형 빗돌도 보인다. 사고 때 헌신적인 인명구조 활동을 벌였던 주민들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여기서 ‘신한국’은 김영삼 대통령의 캐치 프레이즈 ‘신한국 창조’에 나오던 신조어, 항공기 사고가 김영삼 대통령 재직 때 일어났다는 얘기일 게고 말이다.
▼ ‘박경완 기자 산화불망비’는 기자단체에서 세운 빗돌이다. 사고 당시 광주(무등일보)에서 근무하던 그는 자원해서 사고현장으로 달려왔고, 다음 날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전남사진기자회는 매년 추모제를 갖고 ‘박경완보도사진상’을 제정 기자정신이 돋보이는 후배기자들을 표창해 오고 있다.
▼ 마천마을이 낳은 서정시인 박성룡(1934-2002)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대표 시 ‘풀잎’을 그의 약력과 함께 적어놓았다. 참고로 1930년 이곳 마천마을에서 태어난 박성룡 시인은 이한직·조지훈 시인의 추천을 통해 ‘문학예술’지에 등단하였으며, 풀잎·화병정경·과목 등 유려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자연을 제재로 깊이 있는 통찰의 시를 추구하며 자신만의 조어를 동원해 시의 깊이와 상상력을 더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 그네들의 헌신을 살펴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15구간의 특징 중 하나는 관광로(국도 77호선)를 반복해서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곧장 가지를 않고 ‘조선소길’까지 에둘러서 가고 있었다.
▼ 농로를 따라 6분쯤 걸어 ‘조선소길(이정표 : 종점 8.9㎞/ 시점 4.7㎞)’에 올라선다. 화원반도의 끝자락을 따라 내놓은 도로로 ‘화원 조선산업단지’를 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탐방로는 이제 조선소길을 따라 ‘관광로’로 간다. 2차선이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이 드물어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참! 이곳에서 집사람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3km쯤 전방에서 출발했음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따라잡았다. 나물을 뜯느라 더뎌진 집사람의 발걸음 덕분일 게다.
▼ 마산저수지는 구경만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쓰레기 투척이나 시설의 무단사용은 물론이고, 물놀이나 고기잡이도 금지한다는 해남군수의 날선 경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 10분쯤 더 걸어 또 다시 ‘관광로’로 올라선다. 탐방로는 왼쪽, 그러니까 목포 방향으로 간다. 하나 더, 이곳은 그동안 걸어오던 마산리가 끝나고 영호리가 시작되는 지점(이정표 : 종점 8.4㎞/ 시점 5.2㎞)이기도 하다.
▼ 여섯 달 만에 돌아온 해남, 이 지역 특유의 이정목이 반가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시점과 종점, 그리고 근처 주요 포인트를 가리키는 방향표시가 한 면을 장식한다. 다른 한 면은 시점과 종점의 거리를 적었다.
▼ 이번은 도로를 따르지 않는다. 50m쯤 걷다가 농협창고 옆에서 농로로 들어선다.
▼ 길가에는 무화과 농원이 꽤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옆 고을인 영암의 특산물이지만, 이곳 해남에서도 재배지를 늘려가는 추세라고 한다. 하긴 ‘여왕의 과일(클레오파트라가 즐겨 먹었단다)’로 까지 불리는 과일이니 어디 지역을 가려가며 재배하겠는가.
▼ 오랜만에 보는 담배 밭이 옛 추억을 소환시킨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가득가득 논과 밭을 채웠던 담배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옆집 순이네도, 뒷집 철수네도 모두 담배농사로 먹고 살았다.
▼ 농로(저상길)는 ‘저상마을(양짓몰)’을 스치듯 지나간다. 법정 동리인 ‘영호리(靈湖里)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구지·장재·저상·별암) 중 하나로. ‘저상’이란 지명은 예전에 마을에서 모시를 많이 심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하천가를 걸으며 올려다본 저상마을.
▼ 농협창고에서 저상마을 쪽으로 들어선지 15분. ‘저상길’ 농로를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영호길’로 올라섰다. 마을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저상마을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 영호길은 별암마을(영호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 앞에서 오른편으로 간다. 하지만 탐방로는 마을을 거쳐 가도록 나있다.
▼ 마을을 빠져나오면 또 다시 ‘영호로’이다. 이와는 별도로 4차선인 ‘관광레저로’가 별암선착장을 향해 시원스럽게 달려간다.
▼ 군인들이 사용하던 ‘콘센트막사’를 닮은 저 건물은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카페다. 차와 식사를 파는데, 함께 운영하고 있는 펜션(뒤로 보이는 건물)은 뛰어난 뷰로 입소문을 타는 중이란다.
▼ 이곳은 바닷가. 자동차 보다 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가 보다.
▼ 화원 조선산업단지로 가는 ‘산단로’의 아래를 지나자 ‘별암선착장’, 화원반도의 끝자락이자 금호방조제의 남쪽 끝에 위치한 선착장(이정표 : 종점 5.3㎞/ 시점 8.3㎞)이다. 저 선착장은 목포에 근접해있던 이곳 사람들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당시는 사람과 농수산물을 실은 배가 하루에도 수십 척씩 드나들었다고 한다.
▼ 목포행 여객선이 드나들던 선착장은 금호방조제가 생기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방조제를 따라 4차선 도로가 뻥 뚫렸으니 여객선이 다닐 이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깃배는 여전히 드나들고 있으며, 그 덕분에 횟집과 낚시가게들이 포구의 명맥을 근근이 이어간다.
▼ 금호방조제(錦湖防潮堤)를 걷는다. 해남군의 화원면과 산이면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이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금호도는 육지로 다시 태어났다. 방조제는 2개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해랑길은 1방조제(별암마을↔산두마을)부터 먼저 걷는다.
▼ 영산강 하구로 나아가는 바다에는 수많은 배들이 떠있다. 금호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저 바다는 우리나라 최대의 낙지 산지였다. 주민들은 아침마다 양동이에 가득 담아 공판장에 내다 팔았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자식들의 학비를 댔다.
▼ 방조제의 끝은 ‘금호갑문’이다. 바다를 막아 생긴 호수, 금호호의 인공 물길인 갑문이다.
▼ 금호갑문을 지나면 ‘금호1교차로’. 탐방로는 이곳에서 4차선 도로(관광레저로)를 건넌다. 이런 곳에서의 안전은 나그네 몫이다.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으나 이를 지키지 않는 인간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란 신호를 보고 건너던 우리 앞을 속도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지나가는 못된 놈이 있었다.
▼ 도로 건너에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방조제공사가 마무리 된 것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금호호’라고 적힌 빗돌을 세워놓았다. 참고로 금호호는 따뜻한 기온과 넓은 갯벌로 인해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이다. 이러한 요건은 다양한 새들을 모여들게 한다. 겨울이면 수많은 철새들이 따듯한 남쪽나라로 가기 위해 기착지 삼아 이곳에 들른단다.
▼ 서해랑길은 산두버스정류장(‘산두마을’ 표지석도 눈에 띈다)에서 도로(관광레저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산두마을’ 방향으로 50m쯤 들어가다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를 따른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구간이다. 단지 고속도로처럼 씽씽 달려대는 자동차들이 부담스러워 에둘러가며 길을 내놓았지 않나 싶다.
▼ 반원(半圓)을 그리던 탐방로가 다시 도로변(관광레저로)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풍림농산’이라는 특산물판매점 앞에 데려다 놓는다. 당도가 높기로 소문난 해남의 ‘꿀 고구마’라도 사가라는 모양이다. 최근 수확량을 늘려가고 있는 무화과까지 끼워서...
▼ ‘천년초 송편’도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토종 선인장인 ‘천년초’는 면역력 향상과 세포 활성화 작용을 하는 페놀성분과 항산화‧항염의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풍부해 관절염 등 염증성질환 개선에 큰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나처럼 관절이 시원찮은 노인들에게 안성맞춤이니 어찌 관심이 쏠리지 않겠는가.
▼ 가게를 기웃거리게 만든 탐방로는 또 다시 도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섬의 중앙에 들어앉은 ‘금호마을’로 향한다.
▼ 도로와 헤어지고 10분. 고개 하나를 넘자 ‘금호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금호리(錦湖里)의 2개 자연부락(금호·산두)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속금(束金)’이었다. 목화를 생산하여 돈을 묶는다는 뜻이란다. 그러나 100년쯤 전 마을의 부흥을 예언한 어느 학자의 말에 따라 바다경치가 비단자락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고,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의미의 ‘금호(錦湖)’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이때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었을 정미소가 고즈넉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수십 년 동안 마을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을 정미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옛 추억을 소환해주기에 충분했다.
▼ 2018년에 폐교되었다는 금호분교(산이 서초등학교)는 뭔가(체험 또는 복지시설)를 위해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책 읽는 소녀’나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은 옛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 이 마을은 여성 전용 ‘경로당’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옛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성추행의 여파가 이곳 섬마을까지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다.
▼ 보건진료소도 들어서 있었다.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저 들녘 너머, 호수 반대편에는 ‘공룡들의 땅’이 있을 것이다. 방조제 축조로 물높이가 낮아지면서 새롭게 드러난 공룡·익룡·새 발자국 화석산지다. 우항리(황산면)에 위치한 그 화석산지에는 세계 최초·최고·최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세계 최초로 동일 지층에서 여러 종의 화석이 발견되었고, 20~35㎝에 이르는 익룡의 발자국 크기도 세계 최대다. 83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성년도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로 꼽힌다.
▼ 금호마을에서 나오면 또 다시 관광레저로, ‘금호2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금호2방조제’로 올라간다.
▼ 오늘은 ‘사슴과 구름’이라는 아호를 쓰는 저 둘레길 도반과 함께 걸었다.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열정을 갖고 있는 분, 그녀는 15구간에 이어 16·17구간을 내일까지 마치겠다며 트레킹을 이어가고 있었다.
▼ 금호2방조제는 ‘동금달도(naver map에 적힌 지명이다)’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둑을 펼쳐놓은 모양새이다. 이 방조제에 금호1방조제와 영암방조제를 더하면 영암·금호방조제가 된다. 영암군 삼호읍과 해남군 화원면을 연결하는 4.3km 길이 방조제로 농경지와 수자원 확보를 위해 1985년에 착공하여 1996년에 완성되었다.
▼ 저만치 앞 바다에 흐릿한 섬(신도)의 흔적이 가물가물 가라앉은 듯 보인다. 마치 수반 위에 놓인 운치 있는 자연석 수석(壽石)처럼 고요한 바다 속에 잠겨 있다.
▼ 동금달도를 지나갈 때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변을 걷기도 한다. ‘코리아 둘레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상황이랄까? 고속도로처럼 속도를 내며 스칠 듯 지나가는 차량들이 너무 무서웠기에 하는 말이다.
▼ 방조제는 ‘산이반도’로 연결된다. 영암호와 금호호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이다. 그나저나 이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여름철이면 방조제 앞이 강태공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것이다. 떼를 지어 올라오는 갈치를 잡기 위해서다. 호수에서 자란 회류성 어류들은 8월이면 바다로 나간다. 이때 배수 관문에서 빠져나오는 치어를 먹이삼아 갈치가 떼를 지어 올라온다고 한다. 먼 바다로 나가야 만날 수 있는 갈치를 제방에 앉아 낚는 장면은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란다.
▼ 바다 건너 거대한 시설단지는 현대삼호중공업이 아닐까 싶다.
▼ 방조제의 끄트머리는 ‘달도갑문’이 장식한다. 금호호의 또 다른 물길이다.
▼ 날머리는 달도교차로(해남군 산이면 구성리)
달도갑문을 지나면 곧이어 ‘달도교차로’, 트레킹은 교차로 건너 광장에서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4.1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임시노선이었을 때의 15코스는 달도교차로에서 곧장 영암방조제로 가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선보인 15코스는 횡단보도를 건너 산이반도로 들어온다.
▼ 산이반도는 ‘솔라시도(Solarseado)’라는 기업도시로 새롭게 태어나는 중이라고 했다. 보성그룹이 전라남도·전남개발공사와 함께 친환경 미래형 도시로 개발하고 있다나? 데이터센터 유치가 계획대로 이뤄지면 아시아를 대표하는 ‘데이터센터 파크’로 자리매김 될 전망이란다.
▼ 서해랑길(해남·영암 16코스) 안내도는 교차로에서 솔라시도CC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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