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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卍 原始佛敎 頭陀禪宗(총본산) / 竹林宮 祇園精舍 원문보기 글쓴이: 화엄스님
아라한을 증득한 분들은 번뇌장과 소지장 가운데 번뇌장만 끊었을 뿐
소지장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타력, 부처님을 의지해서 이제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한다.
번뇌장과 소지장
아라한 그분들은 번뇌장과 소지장 가운데 번뇌장만 끊었을 뿐 소지장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법과 길과 그 방법을 일러주기엔 지혜가 너무 부족하기에 부처님의 완전한 지혜를 증득하기위해서는 멸제와 도제를 닦아 더욱 더 끊임없이 처절하게 정진해야한다.
아라한을 증득하고 십지 보살을 띄어 넘어 성불을 이루면 , 부처님의 완전한, 완벽한
대 지혜를 증득해야 모든 법과 길과 그 방법을 일러줄 수 있고 중생들을 제도하고 이끌어 주고 이롭게 하는데
번뇌장(煩惱障)
수행의 장애,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중의 하나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나는 오온=색,수,상,행,식(五蘊=色,受,相,行,識)이 화합한 존재이며
그 가합(假合)이 나이며 그 소멸이 나의 죽음이다.
또한 이 오온을 실체로 착각한 데서 일어나는 번뇌가 번뇌장이다.
108번뇌의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장은 <나>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의
근본 원인이 되므로 수도의 장애로 파악된다.
원효스님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번뇌장은 중생의
근본 고(根本, 苦)이며, 일심(一心)의 진실을 왜곡하고, 해탈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고, 번뇌장의 극복이 불성(佛性)의 첩경이라고 강조하였다.
소지장(所知章)
수행의 장애,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중의 하나
번뇌장(煩惱章)과 함께 중생해탈을 방해하는 2가지 근본적 장애이다.
지장(智章)이라고도 한다.
탐욕과 성냄 등의 근본번뇌가 사물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실의 지혜를 막는 번뇌이다.
원효스님은 이 소지장이 중생을 업의 속박에 머물게 하는 근본원리라고
파악하고, 이는 지적 편견, 무집착, 비움, 버리는 자세로 타파되며 극기의
수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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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장과 소지장
유가행자의 교의에 의하면 두 가지의 장애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공함을 깨닫는 것에 의하여
그러한 장애가 파괴될 때 일체지가 얻어진다.
그 첫째는 번뇌장(煩惱障)이고,
둘째는 소지장(所知障), 즉 절대적 진리를 은폐하는 장애이다.
번뇌장이란
집착이나 증오와 같은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 그것은 사물을 여실하게 아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두 번째 소지장이란
완전한 지혜, 즉 최고 진리가 부족한 것으로
참된 진리를 타인에게 나누어
그들을 이익되게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 중 첫 번째 장애는
모든 것이 공함을 깨닫는 것에 의해서만 제거된다.
집착이나 증오 따위와 같은 감정은
첫 번째 장애의 원인이지만
이러한 불순한 감정의 원인은
외적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실존한다고 항상 생각하는 것에 의했기 때문이다.
무아를 깨달으면
나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비실재한 사물과의 굴레가 타파된다.
그렇게 되면 집착이나 증오 따위의 감정도 없어진다.
그것은 내가 실존한다고 생각하는 결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무아를 끊임없이 명상하면
이러한 장애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 후 상당한 수행을 하면
행자는 일체가 공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명상을 열심히 수행하면
이 세계의 무아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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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하면 공부 끝이 아니라 이제 공부시작이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상좌부 불교에서는 견성해서 보림함을 탁발걸식, 하심 하여
이 육신의 대한 착을 완전히 끊어버린 자리를 아라한의 증득이라 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수행 가지고는 아라한을 증득 할 수 없고
그 정도를 아라한의 증득이라 할 수 없다.===
초지보살
이지보살
삼지보살
사지보살
오지보살
육지보살
칠지보살
팔지보살
구지보살
십지보살
초지에서 십지까지 올라가는 경계는 참으로 기적이고 거기서
부처님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견성했다고 함부로 부처님이라고 하지 말아야한다!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부처님존호를 더럽히지 말아야한다!
영원히 지옥에서 나올 기약이 없을것을...
한국의 원효스님은 팔지 보살인데도 부처님의 세계를 관하지 못했고
부처님을 친견하지도 못했으며 지옥도 극락도 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원효스님이 부처님이 아니시기에 부처님의 세계를 관하지 못한 것이다.
선불교에서 얘기하는 견성, 깨달음은 불지, 부처님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견성은 깨달음은 이제 달의 표면만 본 것이고
부처님 같은 지혜를 가진 분은 달의 안과 밖은 물론
대우주의 질서를 완전히 아시는 것이다.
견성 보림해서 불과를 증득했다면 석가모니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을
한자도 틀림없이 똑같이 써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공통점이다.
부처님이 되는 것은 중생들은 거의 불가능하다 맑은 물처럼 아주 청정하게
세세생생 처절하게 수행한다면 그 어느 생에는 부처님이 되겠지만
그 세월이 부지하세월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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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스님=
1994년 6월 1일, 불일회보(조계총림 송광사 발행) ‘특별초대석’에 ‘수행승 중의 수행승,
월인月印 스님’ (법랍 54세, 세속 나이 90세,1999년 입적)회견기가 실렸다.
‘특별’한 수행담이 소개되었다.
스님께서는 정토삼부경을 접하면서 그때부터 ‘정토발원’을 하시며 불자들에게도
이를 권하셨다는 것이다. 화두 참선을 하던 분이 아미타불을
염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화두를 타파했는데도
구경究竟이 안 보이더라는 것이다.
평생 동안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건만, 아직 생사 해결을 못해 바쁘시다는 월인 스님은
평생을 어느 절 주지 한 번 하지 않고 오직 선방과 토굴에서 홀로 본분사에 충실해 온
대덕이시다. 당시 강원도 삼척 신흥사 암자인 청련암에 머물고 계셨는데
회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토삼부경을 보고 ‘야 이거 이렇게 가기 쉬운 데가 있구나. 내가 왜 진즉 거기에 참가를
못하고 인제사 알게 되었나’ 오히려 후회한 생각으로 남도 권하고 나도 극락 가자고
발원하고 있어. 지금 나한테는 다른 소리,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무슨 참선한다는 사람에게도 ‘참선해야 소용없는 짓 하지 마라. 너 차라리 공부하려면
아미타불 부르고 극락 발원해서 극락에 가자꾸나.’ 나는 그런 소리밖에는 안 하고 있어.
그래 ‘아미타불을 신信하고 자꾸 염불하면 극락에 가는구만.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만인이 닦으면 만인이 한 사람도 안 빠지고 다 간다’ 그랬어.
이렇게 쉬운 법이라 이것이. 근데 난 입때껏 참선한다고 꺼떡거리고 남들 가르친다고
꺼떡거리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해.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러면 욕도 할 텐데, 선방에서도 내가 그렇게 하니 큰 욕은 않고
모두 더러 긍정을 하대. 일생을 참선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정토발원을 막 하라고 하고,
나도 하고 그러니까 욕할 텐데 뭐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인제 다른 사람들도 다 지쳐서 아마 그런 것 같애. 예까지 왔으니 보물 한 권(정토삼부경)
줘야지. 가서 한 번 읽어봐. 열심히 읽어 실천하면 극락에 가서 또 만나누만,
틀림없이 내가 결정코 갈 거라 극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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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회보'에 실렸던(1994년 6월 1일자 제 162호) 월인(月印) 노스님의 기사를 생각한다.
그는 법랍이 54세, 세속 나이 90세에(1999년) 입적 '수행승 중의 수행승' 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이다.
평생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사신 분인데 갈 날이 앞에 딱 닥쳤는데 아직 생사해결을
못했으니 지금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여비 벌고 있는 거라면서 일평생을 참선수행하신
분이 말년에는 정토발원(淨土發願)을 하셨으며 불자들에게도 간곡히 염불을 권하셨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견성(見性)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은 아니며 과거의 업장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며 스님은 백팔예불대참회를 새벽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으셨다고 한다.
화두를 타파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고, 그래 이 세계에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아시고 극락에 가서 기력을 보강해 다시 내려오시겠다는 새로운 발원으로
스님은 "극락 갈 여비(염불) 마련하느라 몹시 바쁘다."고 말씀하셨다.
수행자의 생명은 그 정직성에 있다고 본다. 사람마다 자기 특성과 경계를 분명히 깨닫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간 존재의 허약성을 알고 나서 오랫동안 길들여 온 수행 방법에
수정을 가할 수 있는 분의 용기에 대해서 찬탄심을 금할 수 없다.
월인 큰스님이 정토발원을 하는 것은 극락세계가 살기 좋고 훌륭한 곳이기 때문에 거기서
호강하러 가려는 것이 아니 고, 여기 지금 사바세계는 자기 기능을 양성할 수 없으니까,
세세생생에 보살도를 행하겠다 는 서원을 이루려면 거기 가서 능력을 양성해서
다시 이 세계에 나와야겠다는 원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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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선사月印禪師의 고백
나무아미타불!
화두를 타파해도 구경각이 보이지 않으니 나는 이제 정토로 회향하노라.
아마 94년도이었을 것입니다. 송광사에서 발행하는 <불일회보>에 월명암月明庵에서 주석하고 계셨던 월인선사께서 충격적인 고백을 하신 내용이 바로 "화두를 타파해도 구경각이 보이지 않으니 나는 이제 정토로 회향하노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으로 인해 그 당시 전국 제방선원에서 수행하던 화두선 수행자들은 불끈 달아올랐고 선원 수좌들 뿐만 아니라 강당과 포교당에서도 계속해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일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월인선사께서 구참납자들이 많이 수행하고 있는 김천의 수도암修道庵이라는 선원에 가셔서 해명아닌 해명을 하시고 돌아오셨다는 풍문이 있었습니다.
월인선사께서는 제방에서 선사로써 널리 명망이 있는 화두선을 수행하시는 선사이셨는데 이 같은 발언에 화두선을 수행하는 수좌들은 아마 청천벽력 같은 충격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월인선사의 고백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화두라는 공안을 타파해서 견성을 못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구경각究竟覺, 즉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정말 진솔한 고백이었다고 제 개인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화두선에 국집局執하여 법집法執을 하는 화두선 추앙자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아마 저를 죽이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화두선으로 완전한 구경각,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계실까요?
조사어록을 읽어보면 정말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지보다 훨씬 수승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온갖 도리를 다 설해 놓았지만 만약 역대의 조사스님들 중에 정말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은 완전한 구경각을 증득하신 조사께서 출현 하신적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바로 조사라는 명칭이 아닌 부처님이라는 명호를 사용했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요?
월인선사께서 그 후로 청화스님을 예방하여 인사를 나눈 후 하시는 말씀이 "청화스님 당신이 옳았습니다. 이제 정식으로 스님께서 주창하시는 염불선에 대해서 법을 듣고자 합니다." 하시며 법을 청했다는 이야기를 청화스님 문도의 스님에게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월인선사께서는 청화스님의 염불선 법문이 당신에게 큰 감화를 주시지 못했는지 나중에 입적하시기 2년여 전에는 관정큰스님의 "극락세계유람기"를 제가 불자들에게 널리 법보시 하여 은연중 정토를 선양하셨던 적이 있으셨습니다.
참으로 사상이란 무서운 법입니다. 사상의 차이 때문에 민족과 민족이 총뿌리를 겨누었던 아픔의 역사가 있었고, 십자군 전쟁이나 많은 종교 전쟁들이 모두 사상의 차이에서 발단이 되었습니다.
한 집안에서 태어난 부모형제도 사상이 다르면 마침내 등을 지고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물과 우유처럼 화합하며 살아가야 올바른 불제자들마저도 사상의 차이 때문에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살아가야 한다면 더 이상 불교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나무아미타불!
(선용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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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불관 노인의 생사해탈
중국 청나라에 백불관(百不關)이라 불리는 노인이 있었다.
백불관이란 일체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염불에만 마음을 기울이라는 뜻이다.
60세가 넘은 노인이 한평생 살아온
자취를 더듬어 보니 서글픈 마음 뿐이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나가고 자신의 삶 또한
임종이 멀지 않았음을 절감하니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다.
살아 생전 공덕과 선행은 닦지 못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만 심어준 일이 생각나 그를 더욱 괴롭게 하였다.
또한 과거에 저지른 죄업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이대로 죽게되면 필히 지옥이나 축생의 과보를
받게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 도원이란 스님이 효자암이란 암자를 짓고
평생 염불만 하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노인은 공손히 예배드리고 물었다.
“저는 일생동안 세상일에 얽매여서 성인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죄만 짓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임종이 가까워짐을 느끼니 앞일이 캄캄하고 두렵습니다.
극락가기는 원치 않으니 부디 악도(惡道)를
면할 수 있는 법이 있으면 저에게 일러 주십시오.”
노인의 간곡한 말을 들은 스님이 고개를 들어 천천히 말하였다.
“그러한 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노인께서 이 법문을 그대로 믿고 행할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어찌 큰스님의 말씀을 믿지 않겠습니까.
꼭 죄업을 소멸시키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법문을 일러주십시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 해도
그것을 진실하게 뉘우치고 오직 염불에만 마음을 기울이십시요.
부처님의 공덕을 의지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생사의 고통을 영원히 벗어나게 됩니다.”
하고는 아미타불의 무한한 자비와 서원으로 성취된
극락정토와 그곳에 태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오직
“나무아미타불”에 전념할 것을 간곡히 일러 주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염불하는 사람은 많으나 염불공덕을 성취하는 이는 드물며,
염불하는 사람은 많으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염불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오래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고,
오래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일념(一念)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염불에 일념이 되어야 염불공덕을 성취하고
임종후에는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됩니다.”
노인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염불정진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일년 이상을 열심히 염불을 했지만 일념의 염불은 되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효자암을 찾았다.
“이제 염불의 공덕으로 몸도 마음도 가뿐합니다.
죄많은 이 몸을 구원해 주기 위해 정토법문을 베풀어 주신
부처님과 큰스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심으로 염불은 하지만 지나간 기억 때문에
일념염불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념을 이룰 수 있을까요.”
노인의 말을 들은 스님이 빙그레 웃으시더니
“노인께서는 톱으로 나무를 켜 본 적이 있습니까?”
“네, 많이 잘라봤습니다.”
“그러면 톱으로 톱밥도 잘라봤습니까?”
“톱밥은 자를 수가 없습니다.”
“노인께서는 지금 마음의 톱으로 극락을 건설하고 계십니다.
지나간 과거는 톱밥과 같은 것입니다.
소용없는 것에 마음을 도둑맞지 말고 향기나는 나무를
다듬어 보배궁전을 만들어야 합니다.”하고는 붓을 들어
‘백불관(百不關)이라 써서 노인에게 주면서 다시 한 마디 하였다.
“염불하다가 지나간 일이 생각나면 곧 바로 백불관!하고 부르십시오.
톱밥을 만지던 손을 다시 일념으로 염불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아미타불 아미타불 일성(一聲)에 죄업이 소멸되고
몸이 정화되어 부처님의 가피가 느껴져 올 것입니다.”
진실로 감사한 마음의 삼배를 올린 노인은 염불의 정진 속에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밝은 기운이 뻗쳐나왔다.
그리고 길을 갈 적이나 가족들과 함께 할 적에
염불심이 흐트러질 적이면 백불관!하고 소리치며
아미타불 일념을 다시 챙기곤 하였다.
이웃사람들은 그런 연유로 염불노인을
‘백불관 노인"이라 부르며 공경하였다.
염불할 때 잡념을 쫓는 데는‘백불관’이 아주 좋은 약이 되었다.
이같이 하여 백불관 노인은 일념의 염불이 길어져서
삼매를 얻고 그 속에서 부처님 세계를 훤히 보게 되었다.
너무나 환희로운 마음으로 효자암을 찾아갔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해주신 법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었습니다.
스님의 은혜로 악도에 떨어질 제가
생사의 업을 벗어나 부처님 세계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왕생하게 될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인사 드릴려고 찾아왔습니다.”
하고는 공손히 예배드리고 집에 돌아와 깨끗이 목욕하고
새옷을 갈아 입은 다음 식구들을 모이게 하였다.
“내가 이제 염불의 공덕으로 업장을 소멸하고 극락정토에 가게 되었다.
모두 슬픔의 눈물일랑 보이지 말고 기쁨의 염불로
나의 장례를 장엄하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그리고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서
“나무아미타불”을 잠깐 염불하더니 그대로 임종하였다.
그때 서쪽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집 안을 비추이고
기이한 향기가 집 안에 가득 차서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하였다.
위의 이야기는 왕생록에 실린 백불관 노인의 왕생이야기에
필자가 약간의 가필을 한 것이다.
각성된 의식으로 자성을 관조하고 대상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수행의 이치가‘백불관’이라고 하는 한 마디에
오묘하게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죄업이 소멸되고 몸과 마음이 정화되면
부처님의 세계를 자기 눈으로 보게 되고
부처님의 가피로 생사의 업에서 해탈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아, 염불공덕의 부사의함이여.
죄업중생의 한 줄기 빛이로다.
아침이슬 우리인생 슬픔 없어지리라.
인간의 삶 의미없다 말하지 말라.
비우고 맑히는 일에 인간의 행복이 있네.
나무아미타불.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을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의 방법이란
가장 소중하고도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수행이란 비유하자면 음식과 같은 것이다.
저마다 식성과 입맛이 다르듯이 업장이 다른 중생들이
닦아가는 수행의 방편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화두선 일변도의 우리 수행환경을 보면 애써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성취한 사람은 보기 어렵다.
또한 많은 대중들은 수행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소화시키지 못할 음식을 억지로 먹게 되면 병이 들게 마련이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밥맛을 잃게 된다.
자기 체질에 맞고 소화에 자신있는 음식을 고르듯이
자기 적성에 맞는 수행의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원래 염불이란‘나무아미타불’을 지칭하는 말이다.
관음정근’이나‘지장정근’은 염불이 아닌 ‘
관음기도,‘지장기도’이렇게 호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해탈 성불하여 중생제도를 발원하는 수행자라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해야 한다.
아미타불의 서원과 공덕에 의지하여 염불하면 생사업을 소멸하게 되고
탐·진·치 삼독이 자비심으로 비뀌어 성불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외곬수 화두 일념으로 고행 정진해 오신 월인 큰스님
(평생동한 선수행에만 전념,화두타파하신 큰스님 세수 90세. 법납 54로
2000년 입적)께서 말년에 정토삼부경을 보고 깊은 믿음을 일으켜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염불정진으로 돌아오신 일은
초심자들에게 무언의 설법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6월 불일회보 인터뷰에 실린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화두만 타파하면 구경(究竟)이 보일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노스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정토발원을 하는 것은 극락세계는 살기가 좋고
훌륭하기 때문에 거기에 호강하러 하고 잘 살러 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는 내 기능을 양성할 수 없으니 내가 거기 가서
기력을 양성해서 다시 여기에 나와 내 뜻을 발하리라.
이런 원을 가지고 살고 있어.”
업장을 소멸하고 부처님세계에 태어나는 방법을 설법한
‘관무량수경’에서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신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람은 인간 가운데서 가장 순결한 연꽃이니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며
그는 항상 진리를 떠나지 않고 필경에 부처를 성취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그대는 이와 같은 말을 잘 지녀야 되느니라. 이와같은 말이란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간직하는 일이니라.”
-관무량수경 유통분-
과거전생 부처님을 뵈온 사람은
의심없이 정토법문 믿을 것이니
공경하고 겸손하게 믿고 행하여
환희심에 염불하며 기뻐하리라.
나-무-아-미-타-불
이상 현장스님 법문(대원사 주지)
[출처] 월인스님|작성자 자비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안심법문입니다. 더욱 확고하게 '나무아미타불' 염불하겠습니다. '집지명호 일심불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미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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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제자가 왜 석가를 보고 예를 갖추고 절을 했을까?
위엄과 광명을 보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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