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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묵상글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 하느님을 믿기에 부활을 믿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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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23 05:30
- 하느님을 믿기에 부활을 믿는 우리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다.”
사두가이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그들은 왜 굳이 주장까지 할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의 저는 제가 주장하는 것도 싫어졌지만
남이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더 싫어졌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옛날에는 저도 주장을 많이 했다는 얘기이고,
요즘 그것이 싫어진 것이 나이 먹어 철이 든 때문인 것 같아서
이 점에 대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내용의 주장일지라도 좋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고,
주장해서는 얻는 것도 별로 없다고 또는 역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주장(主張)이란 내가 주장(主將)이 돼서 주장하는 것이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객으로 만드는 것이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주장이 되어 주장해대면
좋아할 사람 어디 있고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리고 주장은 이런 것이기도 합니다.
곧 주장하지 않아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주장해야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주장합니다.
설득력이 있는 사람은 설득하지 주장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설득하는 사람은 더욱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는 사람은 더더욱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못 되고,
교만하거나 공동체의 일치와 성장을 저해하는 분열주의자일 가능성이 큰데
그런데 이들은 왜 굳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해야만 할까요?
이왕이면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부활이 없다는 믿음이 진리에 기반한 것이기에 그러는 걸까요?
저라고 부활이 있는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으니 본 사람처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봤기에 믿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본 사람은 믿을 필요가 없지요.
봤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기에 부활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시니
하느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고,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닐 것이며 그러니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부활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이 세상에서만 살다 죽으라고
창조하지는 않으셨다고 믿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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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AI를 인간의 새로운 지배자라고도 부릅니다. 어디에 살든 불가해한 알고리즘으로 짜인 거미줄 속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알고리즘들이 우리의 삶을 관리하고, 우리의 정치와 문화를 재편하며, 심지어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재설계하면서 힘을 잃게 만듭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유튜브를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 스포츠 관련 영상을 찾다 보면 계속 첫 화면에 스포츠 영상만 나옵니다. ‘보수’ 정치 관련 영상만을 찾으면, ‘진보’ 정치 관련 영상은 전혀 볼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스포츠만 좋아하고, 보수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포츠 싫어하는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고, 진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다투게 됩니다.
이렇게 AI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을 온전히 담아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I에 의지해서 사는 삶이 아닌 진실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이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한 자기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또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질문은 이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혼인을 하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는 정리될 수 없기에, 예수님이나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부활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지요.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십니다. 결국 그 나라는 온전한 기쁨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다 보면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중심을 맞췄을 때,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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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마스다 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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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9-4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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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는 여기서부터 완성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길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산 삶이 기억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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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같은 내용이지만 이름에 따라서 의미가 무척 다르게 다가옵니다. 같은 사람인데 ‘개똥이’라고 부르면 왠지 가볍게 느껴집니다. 흔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사람인데 ‘우주’라고 부르면 왠지 귀하게 느껴집니다.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른들은 아이의 이름을 정할 때 신중하였습니다. 기업에서도 제품의 이름을 정할 때 막대한 비용을 기꺼이 지출합니다. 그만큼 이름이 매출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도요타는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도요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렉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도요타의 자동차이지만 렉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미국에서 현대도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현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제네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현대의 자동차이지만 제네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본당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건축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사제관과 수녀원 건축, 체육관 건축, 교리실 확장, 축구장 설치, 납골당 건축’과 같은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건축위원회는 ‘왜’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필요한 시설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시설을 만드느냐였습니다. 건축위원회는 두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찾아오고 싶은 성당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땅이었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만들어지는 시설은 교우들이 언제나 다시 찾고 싶은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성당입니다. 타주로 이사를 갔어도, 한국으로 갔어도 다시 올 수 있는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의 발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곳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고, 그곳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납골당’에 대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납골당이라는 이름 대신에 ‘추모관’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납골당이라고 하면 뼈를 모아 놓은 곳처럼 느껴집니다. 추모관이라고 하면 기억이 담겨 있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지탱하는 건 61년 동안 살아온 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지탱하는 건 몸이라는 육체와 더불어 61년간의 기억입니다. 기억은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연결해 줍니다. 기억은 절망 중에도 희망을 줍니다. 기억은 두려움 속에서도 담대함을 줍니다. 기억은 슬픔 속에서도 위로를 줍니다. 기억은 어쩌면 존재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기록과 나의 작업이 삭제된 컴퓨터는 그냥 컴퓨터이지 나의 컴퓨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두 인물을 기억해 냅니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예언의 상징인 엘리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율법과 예언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저는 부활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바로 지금이 부활의 때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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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이 구절을 고를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특히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주님의 이 말씀은 아주 당연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곳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곳이고 이곳의 삶이 끝나고 우리가 도달할 천국과 다른 어떤 곳도 모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저 장소만 바뀌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의 사두가이는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장가 가고 시집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광활한 온 우주를 인간의 작은 세상에 가둬두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과 다른 저세상의 모습을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 나라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하느님 나라에 살고 저곳에서도 하느님 나라에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닌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고 기쁜 일인가요? 이미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중 으뜸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말입니다.
오늘도 하느님 나라 안에서 우리가 즐겁고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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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무국
날이 점점 쌀쌀해지니 지난 추석에 먹었던 오징어 무국이 생각납니다.
소고기뭇국도 맛나지만 오징어 무국도 별미입니다.
오늘 뜨끈한 오징어 무국은 어떨까요?
무를 나박썰기해서 준비합니다.
찬물에 국물용 다시마와 무를 넣고 강불로 퐈이야~
한번 끓어오르면 다시마를 빼주시고 국간장과 참치액젓으로 간을 해주세요. 그리고 다시 4~5분 퐈이야~~~~
손질된 오징어도 넣어주시고 간 마늘 1T과 송송 썰어놓은 대파도 넣어주세요.
저는 이때 청양고추도 조금 넣어줍니다. 얼큰한 것이 땡길 때 말이죠~~~^^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우리들처럼, 그러면서도 미지근하지 않고 얼큰하고 화끈한 멋을 장착한 우리와 같은 오징어 무국이 완성되었습니다 ^^
오늘은 따뜻한 밥에 뜨끈한 오징어 무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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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신앙, 부활희망
<죽음이 끝이 아니다>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떳떳함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자 매사를 삼가는 간절함에서 나온다."<다산>
"그대가 방에 홀로 있을 때, 방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보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시경)
주님 앞에서 늘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요즘 저를 계속 행복하게 하는, 만추의 불암산을 바라보며 애송하는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2024.10.25>
11월 위령성월, 얼마전 만추의 아름다운 단풍잎들 가득 덮인 수도원 뜨락의 황홀한 풍경을 보며 시화詩畫를 만들었고, 많은 분들과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란 시를 나눴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나뭇잎들
하늘향한 사모의 정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죽음도 축제일수 있겠다”<2024.11.20.>
또 11월 위령성월에 자주 불러보는 11월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생각납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부활신앙이, 부활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궁극의 힘입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라는 고백입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위령성월 11월 곳곳에서 죽음 소식도 계속 들려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 말씀도 자주 생각이 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새생명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부활 희망의 기쁨 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도 없거니와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삼 부활의 희망과 기쁨중에 선종의 죽음을 맞이한다면 남은 이웃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나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끝임을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며 답을 요구합니다.
일곱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아 살다가 모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부활한후 이 여자는 일곱형제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거의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순전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답임을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현세에서 세례성사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 파스카의 부활의 삶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천상의 삶을 미리 앞당겨 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주님은 탈출기 3장6절을 인용하여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가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다는 것이니 바로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두 증인도 부활로 이어집니다. “이리 올라오너라.”하고 외치자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중에 구름을 타고 올라갔으니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의 새생명이 시작됐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미사경문을 통해 부활을 명백히 고백합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감사기도 2양식>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감사기도 3양식중 위령미사시>
미사중 위령감사송1양식중 다음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부활희망을 선사하며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을 앞당겨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도 천상탄일의 축제일 수 있겠습니다.
여러번 나눴습니다만, 저는 그래서 장차 있을 저의 장례미사 축제중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성가402장)로, 퇴장성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오 감미로워라”를 내심 생각하며 부탁할 마음입니다. 강론 대신에 ‘하루하루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시를 읽어달라 부탁하려 합니다. 이 또한 좋은 죽음 준비라 믿습니다. 날마다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주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의 삶을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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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너머 삶 앞의 삶>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삶 앞의 삶을
살기에
삶 너머 삶을
헤아릴 순 없지만
삶 너머 삶을
믿기에
삶 앞의 삶은
올곧게
삶 너머 삶을
바라기에
삶 앞의 삶은
기쁘게
삶 너머 삶을
사랑하기에
삶 앞의 삶은
따뜻하게
삶 앞의 삶이
삶 너머 삶을
닮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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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
성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봅시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육체의 욕정을 쫓아 살아기는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자식을 낳기 위해 혼인을 한다. 영예롭게 선택된 삶을 훌륭하게 이어 간 사람들,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보다 훨씬 높은 삶으로 다시 살게될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 곁으로 간 성인들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 것이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으며,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에게는 육체의 정욕이 모두 사라지고 관능적인 쾌락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거룩한 천사들처럼, 거룩한 영에게 어울리는 영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한다. 천사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영광을 누릴 자격을 얻은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신성은 완전합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 아니시라면, 하느님은 외아들을 낳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분이신 까닭에, 하느님은 자신이 피조물과 신성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느님만이 하나 됨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 됨이야말로 하느님의 특징입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수를 지닌 것은 모두 1이라는 숫자에 의지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1이라는 수는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풍부함과 지혜와 진리는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 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하나 됨 속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이 빙빙 도는 것은 만물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하늘이 빨리 움직이는 것이다."(284)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풀 한 포기로부터 시작해서 인긴에 이르기끼지, 박테리아로부터 시작해서 대우주 은하계의 항성에 이르기까지 , 모든 존재자는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현존한다. 그러므로 불교적 실재관에서 보면 타자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갖고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일은 결코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이 시혜나 동정을 베푸는 일이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당위가 된다.
대승 불교가 일어났던 기원전 200년을 전후하여, 반야공(般若空) 사상이 활발하게 피어나는 중에 위대한 학승 한 사람이 태어났다. 대승 불교 각 종파의 시원이 된다는 나가르쥬나(Nagarjuna)가 그 사람인데, 그가 쓴 <중론>(中論)은 철저한 비판 정신, 곧 ‘부정의 논리' 로서 피사현정(破牙顯正)을 통해 각종 인식론적 허망함을 밝히고 불변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 데올로기를 비판한 책이다. 그는 삼라만상의 현상은 ‘인연 생기법'에 의해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변화의 연속일 뿐이요 불변의 실세나 영원한 속성 따위는 없다며, 알고 보면 “낳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딘절되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만유의 실상과 실제는 오로지 공(空)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진실을 꿰뚫어 깨닫는 지혜가 참 지혜인 반야(般若)이다. 엄밀하게 불교적 실재관에서 보면 ‘창 없는 단자(單子)'와 같은 독립적 의식의 주체'로서 개인의 불멸하는 실체성이나 서구 종교가 말하는 절대적 실체로서의 신 또는 창조주 같은 ‘절대적 타자’도 동시에 부정된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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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그 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건만, 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려고 할까요? 인간의 생사生死는, 곧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사실 온전히 사는 사람에게는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생명의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선포하는 과정에서 그 근거가 되는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커다란 희망의 근거이며, 모든 인류가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와도 같습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함께 숨 쉬고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죽음도 삶도 다 하느님의 생명이기에, 우리 눈에 죽은 이들 또한 하느님의 생명의 다른 쪽에서 되살아나서 참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인류 역사, 아니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으로 말미암아 죽어갔던 영혼들, 특별히 최근세의 희생된 영혼들이 역사의 하느님 안에서 되살아난다고 저는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희망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망입니까?
저는 다음의 고백이 정말 좋습니다. ‘하느님의 생명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가 이 땅에 살아 있든, 아니면 우리가 믿고 바라는 그곳에 살아 있든 하느님의 생명 안에 살아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지금의 저희까지 이어져 오는 믿음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이 점을 확실하게 선언하십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20,37/ 출애 3,6참조)하고 밝혀 주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앞에,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하느님을 돌아설 수는 있어도 하느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죽은 이들의 관해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를 상징하는 물 항아리를 조각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곧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 초대받는 것으로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 역시도 같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겪으신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3,10~11) 우리 모두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참으로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 있는 사람답게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오늘이 되도록 깨어 살아갑시다. “주님, 언제가 저희 모두 당신께서 호출하시는 날에 당신이 마련하신 집으로 되돌아갈 겁니다. 당신 집에 되돌아가기 전에 저희가 누구이며 저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아름답게 거룩하게 사는 것인가를 깨어 의식하며 살게 하여 주시고, 지금 주어진 이 시간에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 집에 도달하여 기쁨으로 당신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도록 지금 생명의 찬가를 여기에서부터 부르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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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저 세상 부활을 이 세상 선행에서 /
박윤식 [big-llight] 2024-11-22 ㅣNo.177837
주님 안에서 믿는 이들은 구원받아 부활할 것이라는 이 신앙은 가톨릭의 핵심중의 핵심일 게다. 우리가 부활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신앙은 단순히 죽은 신앙일 수도. 사실 못된 그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부활을 믿었단다. 부활은 믿음의 바탕이요 복음 그 자체이다. 부활 없는 믿음은 죽은 거고 복음도 거짓일 게다. 부활은 ‘삶’ 그 자체이리라.
예수님은 이런 사두가이들의 부활 신앙에 일침을 가하셨다. “저 세상에서는 더 이상 장가드는 일, 시집가는 일은 일체 없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온전한 사랑의 나라이기에 인간적인 에로스 사랑 따위에는 결단코 매달리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그곳에는 자신을 주위 모두에게 온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으로 충만해 있어, 천사같이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체험하고 이웃 관계를 터득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확신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단코 않을게다. 다행히 우리는 직접 체험하지 않는 것도 독서나 학습을 통해 우리 삶의 수준까지 이해시킨다. 또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세계인 부활후의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 그러기에 이 하늘 나라는 삶의 질적 행복은 물론, 늘 ‘새 삶의 지평’을 열어 준다.
그렇지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 사두가이는 현세의 이 삶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짝 만나 시집장가 가는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는 과연 어떻게 정리되는지를 예수님께 따졌다. 사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 나라는 죽음과 악연 등의 고통이 전혀 없는 온전한 기쁨으로 충만이 된 세계일게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감동 없는 그런 모습은 결코 아니란다. 우리가 전혀 상상도 못한 완전히 새로이 ‘변모된 삶’이라나.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서 더러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닌 깨달음이다. 부활이란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육신의 조건을 그대로 가지고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란다. 그것은 완전히 변화된 육신으로 또다시 되살아나서 천사들과 같아지기에 더 이상 세상의 연에 매여 있지 않을 것이라나. 어쩌면 건전한 상식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단다. 이 세상 인연과 삶의 흔적으로 저 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될, 이 간단한 걸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겸손해야 할 게다. 부활은 겸손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죽은 이가 다시 저 세상에서 살아난다는 믿음은, 하늘의 힘이 끌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를 게다. 겸손은 깨달음의 전제이기에.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분명히 이르셨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한 하느님의 자녀이다.”
이 세상 살면서 부활이 뜻하는 것에 대한 정신의 눈을 밝히는 것이 신앙이다. 이렇게 우리는 어쩌면 철학자의 모습을 한 조각씩 간직한 채 산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신을 통해 쌓은 행위들을 함께 지니고 부활한다는 거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루하루의 선행으로 영혼을 단련시켜 나아가자. 가슴으로 스미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또한 사소한 것에도 선행을 베풀며, 믿음을 단련시키자. 그러면 부활의 영광을 얻어 저세상 삶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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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는 두 증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두 증인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가리킵니다.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묵시 11,6)은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삼 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한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고(1열왕 17,1 참조),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묵시 11,6)을 가진 예언자는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킨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탈출 7,14-12,13 참조).
이 두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지만, 사명을 마친 뒤 지하의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도성 한길 가에 내버려집니다.
사흘 반 동안 무덤에 묻히지도 못합니다.
마치 악이 승리한 듯 보이고, 이 예언자들은 조롱거리가 됩니다.
불의한 자들은 예언자들의 죽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하늘로 불러올리시어, 그들의 승리를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실 하느님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결국 선이 승리하고 악이 심판받으며 모든 것이 질서 잡힐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해결하실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은 아무 쓸모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계심과 그분께서 이루실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우리의 노력을 의미 있게 합니다.
부활에 대한 전망은 이 세상에서 정의를 위한 작은 노력이, 비록 큰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완성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라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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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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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두가이들이 부활 이후의 삶을 묻습니다.
그들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아니라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의 삶이 지금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부활을 통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 청하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르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차이는 이어지는 말씀으로 해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살아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죽은 이후에 부활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앙을 통해 맺어진 하느님과의 관계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부활을 통해 더 깊게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삶의 모습은
이 세상과 부활 이후가 다릅니다.
혼인을 예로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관계라는 것이 나와 너가 맺는 것이라면
관계를 맺는 나는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기에
육체의 죽음으로 우리의 존재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관계를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으로
그 관계는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그 관계에 응답합니다.
관계는 상호적이기에
우리의 응답이 중요하고
그 응답으로 맺어진 관계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면서 시작하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 믿음을
그리고 그 관계를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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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위로로 가득찬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의 수명이 다하는 날, 우리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은혜롭고도 영광스럽게 주님 부활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게 된답니다. 육신의 허물을 벗은 우리 모두는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된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위령 성월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자주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의식은 철저하게도 차별화됩니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거부하고 도망치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다가오면 온 몸이 경직되고 살이 떨리며 두려움에 사지를 떨게 됩니다.
끝이요 멸망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의 순간은 그토록 간절히 고대해왔던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다시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니 기쁨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만 희망을 걸고 살아왔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천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고 나면 천사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것입니다.
주님 곁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지만,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 자비의 품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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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35절)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 있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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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성장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들입니다.
이들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이 집착하는 것을 잃기 싫어서입니다.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그래서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사두가이들을 피터 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라 여기고 싶습니다.
피터 팬은 어른이 되기를 원치 않는 대명사입니다.
피터 팬은 자신이 성장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말하는 부모의 대화를 듣고 집을 도망쳐 어린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그곳에 들어오기를 초대합니다.
왜냐하면, 혼자는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배리도 160cm에서 성장이 멈추었고 결혼을 해서도 부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옆집의 어린이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전쟁터에 나가서 죽거나 물속에서, 혹은 기차에 뛰어들어 죽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비극을 맞은 것이 배리의 탓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가 더 집착하고 사랑한 아이들부터 그렇게 죽었습니다.
자라야 하는데 멈추고 싶은 마음은 현세주의자라기보다는 실제로 현실도피자입니다.
제임스 배리가 그렇게 어린이들에 집착하였던 이유는 그의 삶이 어린 시절에 머물고 싶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배리의 형을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케이트 사고로 형이 사망합니다.
어쩌면 배리는 형이 죽은 탓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고 여겼던 것 같고 어머니도 매일 눈물로 큰아들만 찾았습니다.
어느 날 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데이비드 너냐?” 하고 물었습니다.
배리가 “저, 배리에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다시 등을 돌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배리는 강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그렇게 그의 성장은 멈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리는 “나는 형이 죽은 나이 13살이 되면서부터 일부러 성장을 멈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은 마치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해 그 생각만 하게 된 수전노처럼 어머니의 관심에 대한 집착만 남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되기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배리는 형의 흉내를 내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진짜 배리의 모습은 끝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아이들도 사랑을 갈구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배리의 집착에 시달리며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배리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태아의 부활은 무엇일까요? 태어남입니다. 태아는 어머니 태중에서 양식을 먹고 보호를 받습니다.
내가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말이고 성장한다는 말은 언젠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로 태어날 일이 없으면 내 손으로 양식을 벌어먹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부활은 무엇일까요?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어린이들도 양식을 먹습니다.
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양식을 준다는 말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야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어린이로 남으려고 하는 현세주의자들은 현실도피자입니다.
어른이 되면 양식이 필요 없을까요? 음식을 먹지 않고 40일을 버텨도 사랑을 먹지 않으면 4일만 지나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먹는 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태아는 어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도를 통해 사랑의 양식을 먹으며 그것이 없으면 살 힘이 없음은 압니다.
부활을 믿고 싶으면 이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부활할 것임을 직감합니다.
여러 번 해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피조물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창조자가 주는 양식입니다.
그러니 그런 양식을 먹으며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만 머물려고 하는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이면서 실제로는 현실도피자입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서도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영화 ‘암살’(2015)에서 이정재는 몸에 총알이 7개씩이나 박히고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헌병대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일본에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는 김구 선생 밑으로 들어가 정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일본에 팔아넘겼습니다.
김구 선생이 점점 의심하자 그는 자신의 동료들도 죽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독립투사가 희생됩니다.
하지만 독립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반민특위 법정에 세워졌고 증인들은 죽어갔습니다.
독립은 했지만, 일본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던 것입니다.
그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죽이고자 했고 죽였다고 믿었던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작은 골목길에서 이런 마지막 대화가 나옵니다.
“안오균?”
“왜 동지를 팔았나?”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16년 전인가?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고 안 믿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 따라 이 세상에서 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고 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야만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믿는 이들은 독립투사처럼 삽니다.
문제는 부활이 있고 난 뒤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먹어야만 산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다면 성장하여 부활하란 뜻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현세주의자로 살다가 태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성장하지도 못합니다.
부활은 성장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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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인정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루카 20,2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루카 20,34-40).”
1) 사도행전 23장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바리사이파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사도 23,6-9)”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믿었고, 유대교에 속해 있었지만, 부활을 안 믿었고, 천사나 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일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복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고, 현세적인 소원을 빌기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일부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세, 부활, 구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갖지 않고, 현세에서 복을 얻어 누리는 것만 생각하고, 눈앞에 있는 일에 대한 소원만 빌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7-19).”
<여기서 ‘불쌍하다.’는 ‘어리석다.’이기도 합니다.
현세만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 우리가 ‘부활’을 믿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것이 분명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아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
부활 신앙은 어떤 학문적인 이론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아주 생생한, ‘살아 있는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3) 예수님 말씀에서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이라는 말씀은, ‘아무나’ 다 부활하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인정받는 사람들만 부활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자격을 얻는 일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도 중요하고, 부활 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것,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자격을 얻지 못해서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면,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밖에서 구경만 해도 되는 나라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밖에서 구경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영원히 ‘소멸’됩니다(묵시 20,15).>
신앙생활은 구경만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삶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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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0,27-40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가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가 정한 ‘수혼법’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제가 죽은 이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여 형제의 후손이 끊기지 않고 유지되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만약 일곱 형제가 있는 집의 남자들 모두가 그런 식으로 죽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고도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본인도 죽게 되면, 나중에 그들 모두가 부활했을 때 일곱 형제 모두와 부부의 연을 맺었던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애매한 상황이 벌어지면 관계된 모든 이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해질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절대 원치 않으실 테니, 그런 점을 생각하면 부활은 없다고 여기는게 더 낫다는 것이지요. 죽은 이의 부활 자체를 못믿겠다는 거였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이런저런 ‘인간적인’ 이유와 핑계를 들어 ‘부활은 없어야 한다’고 ‘부활이 없는 게 차라리 낫다’고 우기고 있으니 그런 모습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도 참으로 난감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기들이 내세운 수혼법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죽은 이의 아내를 그 형제가 맞아들이게 한 것은 그저 그 집안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남편도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는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청상과부’들을 보살피기 위한 것이었음을, 즉 수혼법 자체가 그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선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몰랐던 겁니다. 그 율법에 담긴 근본정신이나 의미도 모르면서, 그것을 그저 글자 그대로 적용하기에 급급했던, 심지어는 자기들 이익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편협하고 고집 센 모습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 같은 영적 가치들은 부족하고 약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당신 사랑과 자비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두가이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니 당연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있다면, 이 세상 이후의 삶이 있다면, 그 내세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신경쓰여서 지금 이 세상에서 욕망하는 것들을 마음껏 소유하고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으로 남아계시길 바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축복을 베푸시어 큰 부와 권력을 누리게 해 주신건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자기들 삶에 감놔라 배놔라 하시는 건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부정한 것이고, 부활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부정한 것이며, 결국은 간접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마저 부정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지옥’을 택하는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분을 나와는 상관없는 저 먼 세상에 계신 분으로 오해하며 그분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려고 하지만,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자기 삶과 세상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을 따르는 이들만이 하느님과의 참된 일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을 살게 되지요. 그러니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 아무리 크게 느껴져도 그 유한하고 부족한 즐거움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모조리 포기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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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묵시록의 이번 본문은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당장 ‘두 증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서 학자들이 여러 해석을 내 놓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구약의 대표인 모세와 엘리야를, 다르게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바로 승천한 인물인 에녹(창세 5,24)과 엘리야 (2열왕 2,11)이라고 말기도 합니다.
더 넒은 해석은 모세와 엘리야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교회의 두 대료 사도인 베드로와 바오로를 가리킨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구약의 배경에서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모세와 엘리야의 가르침을 따르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을 배경으로 하는 표현인 ‘올리브와 등잔대’는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뜻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입에서 불이 나와’ 적대자들을 삼키는 것입니다.
불이 나온다는 이 표현은 이미 모세(민수 16,35)와 엘리야(2열왕 1,10)에서 나타납니다.
오랜 가뭄의 이야기는 엘리야(1열왕 17,1; 18,1이하)와 연결되고 나일강을 피로 물들게 한
기적은 모세와 연결되는 탈출 7,14이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보아 ‘두 증인’과 ‘올리브와 등잔대’도 직접적인 모세아 엘리아,
또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하에서 올라온 짐승은 두 증인을 죽인다고 합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박해자들에 의해서 죽고 큰 도성에 버려질 것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 도성을 상징적으로 소돔 또는 이집트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숨을 받아 발을 딛고일어 나고 그들을
박해하던 이들은 두려움에 싸일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두 증인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게 됩니다. 요한 묵시록 저자는 구약의 두 세계에서
비로소 부활의 삶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는 것입니다.
현실 위주의 가치관을 가진 사두가이 사람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님께 주장하려고
일곱 형제의 결혼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현실에서는 인간이 시집 장가를 가지만 부활의 세계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서 벗어 나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루카 복음을 통한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새겨 볼까요?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루카 20,34-35)
아울러 주님께서는 부활에 동참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죽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어떤 예언자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부활이 삶을 주님께서 이처럼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을 위시해서 구약의 일부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만 구체적이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외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봉헌으로 사람들을 죽음과 죄에서 구원시키시고
부활의 영원한 삶을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전체 주제는 박해와 세상이 주는 고통 속에서 순교한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시련을 극복하고 영원한 삶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때로는 눈물을 때로는 고통을 겪지만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얻은
주님께 대한 신앙을 끝까지 지키며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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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 사이에 있었던 부활에 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가이들은 유다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귀족계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순수 종교와 동떨어지게 살았으며 외적 신심에는 충실했지만 조상들의 전통은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율법을 근거로(신명 25,5-10), 어떤 사람이 아내를 남기고 죽어 그의 형제들이 차례로 형수를 맞아 대를 이으려다가 모두 죽으면, 부활 때에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받아들이는 율법을 근거로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십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으며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20,35-38)
예수님께서는 부활이란 육신이 되살아나고 영혼이 어떤 상태로 변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생명과 영원성을 살게 되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부활은 육체적인 차원,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 묶이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부활과 사후세계, 영원한 생명을 부인하거나 그런 것에 관심을 끄고 살아가는 현실주의자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고 복음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방향은 필연코 물질과 돈을 중시하고 현세의 쾌락과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데 몰두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몰두하고 현세에 대한 애착이 커 남의 처지에도 무관심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두가이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현실주의는 현실의 조건이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며 그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출발점이나 목표가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현상계인 셈입니다. 가시적이고 감각적이며 현상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니 영원성과는 동떨어진 피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적인 것에서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니 현세 물질이나 돈,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안달복달하지 않게 되지요. 부활의 삶은 어떤 처지에서도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가난하지만 영원히 풍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늘 하느님 앞에 있음을 자각하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포기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일상의 죽음을 살아갈 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성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은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의 ‘살아계신 하느님’이 되시며, 우리 또한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겠지요.
오늘도 ‘사랑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영원히 사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이런 믿음 속에 현세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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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결혼하셨나요?>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루카 20,34-35)
알타반의 말씀사랑
여러분은 결혼하셨나요?
아님, 미혼이신가요?
결혼은 했지만 사별이든 이혼이든 홀로이신가요?
결혼하셨다면 다음 세상이 있다면 또 결혼하시겠어요?
또 지금의 배우자와 살고싶나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하냐구요?
저는 결혼을 안 해 봤지만 다시 태어나도 꼭 결혼을 하고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아마 그런 인연이 맺어질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부질없는 이야기인 줄 잘 알지만
죽어서 다른 세상이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더 멋진 삶을 살고싶다는
작은 꿈들이 있기에 해 보는 소리일 겁니다.
내가 살아 온 삶이 멋지다 하여도
누구나 아쉬움과 미련은 있기에 저 세상이 있다면
더 멋지게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고싶다는 내면의 갈증이 그런 환상을 그리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꿈을 깨야 합니다. 환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미완의 현실에서 도망치며 죽음 이후의 새 세상만 꿈꾸는 것이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미래의 완성된 삶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는 현세에서
도망치면서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부활신앙은 현세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
줄 때만 올바른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의 처지와 신분 안에서 더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 부활신앙을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죽은 이둘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사랑합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인연을 맺어주신 이들을 더 치열하게
사랑하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내세의 부활과 천국의 삶을
벌써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기쁨을 누리시길 두손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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