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정의 시선]방역 완화 주도한 기모란, 밀려난 정은경
[출처: 중앙일보] [장세정의 시선]방역 완화 주도한 기모란, 밀려난 정은경
기모란 청와대 방역기획관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립암센터 기 교수를 방역기획관으로 발탁하자 '방역 사령탑'인 정 청장 위에 '옥상옥'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연합뉴스]오늘(12일)부터 오후 6시 이후에는 3인 이상 모임이 전면 금지된다. 사실상 야간 통금 체제에 들어가는 준(準) 전시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의 누적된 방역 및 백신 정책 실패가 급기야 국민 일상에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셈이다.
네 단계 제안 뒤 청와대 실세 입성
빗나간 백신 조언, 방역 완화 주장
국민 신뢰 쌓은 정 청장 입지 밀려
초유의 4단계 초래한 책임 물어야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가 처음 국내에 상륙한 이래로 누적된 고통도 헤아리기 어려운데 오늘 밤부터는 그동안 경험 못 한 고통에 직면할 것이다. 기존 다섯 단계를 네 단계로 축소한 새 거리두기 기준으로 보더라도 3단계를 뛰어넘는 충격적 4단계 조치가 시행된다. 단순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사실상 단절이 초래될 수 있다. 정부는 '굵고 짧게' 2주일만 견뎌보자는데, 델타 변이까지 극성인 작금의 4차 대유행을 단기간에 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해 2월 29일 사회적 거리두기가 처음 도입됐고, 3차 대유행이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23일 수도권에 5인 이상 모임이 처음 금지됐다. 5인 모임 금지의 충격도 작지는 않았다. '독수리 5형제'는 최근까지 생이별해야 했고, 5형제 중에 1명이 빠진 '4인방 시대'도 이제 끝이다.
우리의 일상에 비상계엄 같은 충격이 닥쳐온 것은 무엇이 잘못됐기 때문일까. 문재인 정부는 "20·30세대는 모임을 자제하라"고 젊은 층을 겨냥했지만, 전체주의 논란을 빚은 방역 조치에 따른 고통을 묵묵히 감내해온 국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온당한가. 수시로 K-방역을 자화자찬하기에 급급했던 정부의 정책 실패 때문 아닌가. 대형 참사 발생 전에 크고 작은 신호가 울린다는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번에 사실상 야간 통금 사태를 초래한 요인은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백신 접종이 진행되면서 방역에 대한 총체적 경각심이 떨어진 것이 가장 근본적 문제다. 백신은 만병통치약이 아닌데도 방역은 뒤로 밀렸다. 정부는 백신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무마하기 위해 마스크 착용 예외, 2주 자가 격리조치 면제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계속 내놨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지만, 코로나 종식 때까지는 방역과 백신의 투트랙을 유지해야 한다는 기본을 관철하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 3일 청와대에서 열린 `2차 코로나19 대응 특별방역 점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국립암센터 교수로 일하다 지난 4월에 발탁된 기모란 청와대 방역기획관.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9월 11일 질병관리청 긴급상황센터을 방문해 정은경 초대 질병관리청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발언하고 있다. 정 청장이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코드 인사'도 결정적 패착으로 지목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16일 없던 자리를 신설해 기모란(56·여) 국립암센터 교수를 청와대 방역기획관에 발탁했다. 당시 야당은 방역사령관으로 국민 신뢰를 쌓아온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제쳐 두고 옥상옥을 만들었다며 "정권 입맛에 맞는 코드 인사를 철회하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기 기획관의 부친(기세춘)은 대한민국 체제 전복과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한 지하조직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했고 『주체사상 노트』를 쓴 장본인이다. 그의 남편(이재영)은 더불어민주당 인재 영입 케이스로 지난해 4·15 총선에서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경남 양산 갑 선거구에 공천됐던 특별한 인연이 있다.
부친과 남편의 정치 성향과는 별개로 기 기획관이 쏟아낸 언행은 전문가의 자질이 의심스럽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스라엘·싱가포르 등 주요 국가들이 백신 확보 경쟁에 집중할 시점에 그는 “한국은 환자 발생 수준으로 보았을 때 (백신 구입이) 급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의 엇박자 조언 때문인지 문 정부의 백신 전략은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다.
더 큰 문제는 방역 완화를 사실상 그가 기획하고 주도했다는 점이다. 국립암센터 교수 시절이던 지난 2월 9일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주최 토론회에서 그는 기존 거리두기 다섯 단계를 네 단계로 줄이고 '4단계에서 3인 이상 모임 금지' 방안을 제시했다. 이 안을 토대로 3월 4일 생활방역위원회를 열었고, 이후 일부 수정을 거쳐 6월 20일 정부는 7월 1일부터 대폭 완화한 거리두기 개편 강행을 천명했다. 결국 기 기획관의 당초 제안이 대부분 관철됐고, 정 청장이 델타 변이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수도권의 방역을 오히려 강화하자고 외쳤지만, 목소리는 밀렸다.
집요한 방역 완화 추진 과정에서 문 대통령은 K-방역을 자화자찬했고, 홍남기 경제 부총리는 소비 쿠폰을 독려했다. 4차 대유행이 다가오던 지난 3일 민주노총이 서울 도심에서 80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불법 집회를 강행했지만, 청와대는 아무런 사전 경고조차 하지 않았다.
8000명이 참가한 불법 집회(3일)를 만류하러 민주노총 본부 청사를 지난 2일 찾아 갔다가 문전박대 당한 김부겸 총리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위로하며 대화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사진공동취재단
급기야 국민의 자유를 전례 없이 통제하는 4단계+알파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초래한 데 대해 정 청장과 김부겸 총리는 사과했지만, 기 기획관과 대통령은 정작 아무 말이 없다. 참담한 정책 실패를 기억하고 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장세정의 시선]방역 완화 주도한 기모란, 밀려난 정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