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마라톤은 예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마라톤대회로 인정받는다. 특히 케냐의 독주체제가 굳어지기 이전에는 보스턴마라톤 우승자가 곧 당대 최고의 마라토너로 여겨질 정도였다. 때문에 아시아권 마라토너들에게는 올림픽 무대 만큼이나 벽이 높은 대회이기도 했다. 서윤복은 1947년 제51회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해 2시간 25분 39초로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는 100년이 넘는 보스턴마라톤 역사에서도 매우 진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일반인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마라톤 영웅 서윤복은 1923년 서울 은평구 용암동에서 태어났다. 가까운 인왕산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며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그 덕분인지 현소보통학교 시절부터 달리기에 재능을 보이곤 했다. 그는 보통학교에 다니던 1936년 손기정의 올림픽 재패를 계기로 육상인의 꿈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엔 그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제2의 손기정이 되겠다며 뛰어다니던 때였다.
서윤복은 보통학교 졸업 후 낮에는 사환으로 일하고 밤에는 경성상업실천학교(4년제 중등학교, 현 숭문고) 야간부에 들어갔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형편이었기에 운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1학년 때 교내 6km 대회에 출전하여 4학년 선배들을 누르고 손쉽게 1등을 차지하면서 그의 운명이 결정돼버렸다. 비범한 재능을 눈치챈 육상부 선배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결국 육상부에 입부하게 된 서윤복은 국민단련경주대회(역전경주 전신)에 나가 구간 신기록을 내는 등 활약을 보였다.
손기정 사단의 에이스가 되다
졸업 이후에도 운동과 일을 병행하던 그는 1945년 광복을 맞던 해에 손기정이 만든 ‘육상구락부’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활약상은 같은 해에 열린 해방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부터 두드러졌다. 10마일(16.09km) 경주에서 당대의 스타 유장춘에 이어 2위를 차지했던 것. 이 대회에는 은퇴를 준비하고 있던 남승룡 선수도 참가했는데, 그는 도깨비처럼 나타난 신인에게 뒤져 3위를 하고도 오히려 ‘좋은 인재를 발굴했다’며 기뻐했다. 베를린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의 칭찬을 받은 서윤복은 크게 고무되어 진지하게 세계무대를 목표 삼게 되었다.
이후 1946년에 열린 중앙일보 전국마라톤대회에서도 2위와 15분여 차이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과 오류동을 왕복하는 난코스였기에 기록은 저조했지만(2시간 39분 30초), 육상계의 주목을 받기에는 충분한 성과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 열린 전국체육대회 마라톤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 무렵 서윤복은 ‘너무 가늘고 빈약한 몸을 가졌다’는 평을 듣곤 했다. 사실 그는 말랐을뿐 아니라 키도 160cm에 불과해 운동선수답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까지 보스턴마라톤대회사상 최단신 우승자) 손기정은 그의 신체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숙식하도록 하면서 체력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다고 한다.
이념 대립조차 무너뜨린 보스턴 승전보
괄목할 만한 실력을 보인 서윤복 선수는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는 선발전도 치르지 않고 바로 대표가 되었는데, 기록이 출중한데다 경쟁자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수단은 손기정, 남승룡을 포함하여 세 명이었다. 그 중 손기정은 선수로 등록만 되어있을 뿐 감독 역할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당시 국내 상황은 해방 후 질서가 잡히지 않은 상태여서 그들의 미국행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미군정청 직원들이 돈을 걷어 마련해준 여비를 가지고 군용기로 일본과 하와이 등을 거쳐 무려 5일 만에 보스턴으로 입성했다. 현지에서도 교포 백남룡 씨와 임영신 여사(해방 후 초대 상공부장관, 중앙대학 설립자)의 도움을 받아 겨우 대회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해 보스턴마라톤에는 히테넨(핀란드), 코티(케나다), 카이라(그리스) 등 쟁쟁한 선수들이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서윤복에게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지만, 시합이 시작되자 그는 조금씩 선두권으로 올라오며 경합을 벌였다. 노장 남승룡도 동반주자로 나서 투지를 불태웠다. 서윤복은 정신력과 패기를 앞세워 히테넨과 선두다툼을 벌인 끝에 2시간 25분 39초로 당해 최고기록을 내며 힘겹게 우승을 차지했다. ‘작은 거인’ 서윤복이 보스턴에서 보내 온 승전보는 한반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고 있던 시기라 사회 분위기도 잔뜩 경직되어 있었지만, 그의 우승은 잠시나마 이념의 벽을 잊고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승전보가 전해질 당시 민족의 영웅 서윤복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부족한 예산 탓에 귀국할 차편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딱한 사정을 들은 임영신여사의 도움으로 동남아와 일본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오는 화물선을 얻어탈 수 있었는데, 무려 18일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인천항은 그를 환영하기 위한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서울 시민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환영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김구 선생은 그에게 족패천하(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라는 휘호를 써주며 크게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서윤복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도 참가했지만, 컨디션 난조와 심적 부담, 외국 선수들의 견제, 국내 선수들 간의 과잉경쟁 등으로 말미암아 27위에 그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후배사랑 남달랐던 마라톤 영웅
서윤복은 은퇴 이후 공군 육상팀과 숭문고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당시 육군에는 손기정, 해군·해병대에는 최윤칠이 코치를 맡아 그야말로 쟁쟁한 실력가들이 후배를 길러내고 있었다. 서윤복이 당시 지도한 선수로는 송길윤(보스턴 2위), 송삼섭(로마올림픽 대표), 이상철(로마올림픽 대표), 정교모(중거리, 멜버른올림픽 대표) 등이 있다. 지도자 생활을 마친 뒤에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동대문운동장장을 지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육상경기연맹 전무이사와 부회장을 맡으며 육상계에 몸담기도 했다.
서윤복은 재능과 인품을 겸비한 희대의 스타였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작은 키를 극복한 마라토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의 체격조건은 키를 제외하고는 타고났다 할 만큼 유리한 것이었다. 군살이 없고 날렵한 몸매며 신체의 55% 이상을 차지하는 긴 다리, 두꺼운 흉곽은 마치 요즘 아프리카 선수들의 체격 조건과도 흡사했다. 만약 동시대에 그를 위협할 만한 라이벌이 있었다면, 그는 더욱 놀라운 기록을 작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체육인답지 않게 꼼꼼하고 행정능력이 뛰어났음은 물론, 가정적이고 점잖으며 후배와 제자를 아낄 줄 알아서 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재물에 대한 욕심도 없어서 선수시절 그토록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용해 재산을 모으려 하지 않았다. 운동선수라기보다는 선비 같은 성품의 소유자인 그는 소박한 노년을 보내다가 현재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어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