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27
7월23일[연중 제16주간 회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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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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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iTp-uzPMCg
[서울대교구 윤웅렬 하상바오로(등촌1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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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실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의 질서를 뒤바꿀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0년 세월 동안 이스라엘의 변방 나자렛에서 조용히 사셨습니다. 인간에게 명령하셔야할 만왕의 왕이신 분이 인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며 서른해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기쁘게 도와드렸습니다. 때로 요셉의 부탁으로 열심히 대패질도 하셨고 못도 박으셨습니다. 가사 일로 늘 바빴던 마리아의 일손도 거들었습니다. 때로 마늘도 까고 양파도 까면서 매워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어떤 자식보다 효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꽤 의아하게 다가옵니다. 효자이셨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48-50)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마리아와 요셉, 사촌들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 말씀에 가장 충실하셨던 마리아를 향한 극찬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씹고 곱씹고, 새기고 되새기던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만 머물며, 가족 친지들과 알콩달콩 한평생을 사셔야 할 분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 더 넘어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할 분,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결코 혈육이나 지연, 학연에 연연하시면 안되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을 지나치게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물론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도 중요하지만,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와 본당이 다 내 공동체요 우리의 공동체, 주님의 공동체라는 연대와 공유 의식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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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뜻’이 결정하는 ‘집’>
조선 말기 힘든 시절에 조선 땅에서 승승장구한 조선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완용입니다. 그는 항상 성공했고 자녀에게 성공하는 법도 알려주었습니다. 가장 강한 나라를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이 우리와 가까이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합니다.
그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 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습니다.
조선 땅에서 당시 가장 성공했던 이완용을 지금 누구도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선의 피가 흐르지만 그는 일본사람이고 러시아 사람이며, 미국 사람입니다. 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피 안에 흐르는 뜻이 더 중요합니다. 누구의 뜻을 따르느냐가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결정합니다. 가족임을 증명하는 것은 그 가족에 흐르는 피가 아니라 그 가족에 흐르는 뜻입니다.
‘뜻’은 ‘본성’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는 뜻에 갇혀 살아갑니다. 내가 육체의 뜻을 선택했다면 그 육체로부터 오는 ‘땅’에 갇혀 살아가고, 내가 하늘의 뜻을 택했다면 ‘하늘’에 살게 됩니다.
육체는 지옥의 본성이고 영은 하늘의 본성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살게 되느냐, 사탄의 본성 안에서 살게 되느냐는 내가 선택하는 뜻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이고, 육체의 욕망을 선택했다면 이미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육체의 욕망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런 사소한 죄들은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죄도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죄인 줄 알면서 그것을 선택한다면 그 순간은 지옥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따르는 뜻이 천국과 지옥,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뜻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자기 전에 다음 날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순서대로, 시간의 흐름대로 적되, 그 일들이 주님의 뜻이기를 기도하며 적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렇게 적힌 시간표대로 살았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네 살 된 아들과 맥도널드에 갔습니다. 아들은 버거, 콜라, 튀김 등 맥도날드 대표 음식을 시켰습니다. 아버지는 몸 생각을 해서 드레싱을 곁들인 따분한 샐러드를 시켰습니다.
아들이 먹는 것을 보고 입에 군침이 돌아 “아빠가 튀김 하나 먹어도 되지?”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네 살 된 아이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싫어요!”
아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나온 줄 모르는 것일까요? 이런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또 사주고 싶으실까요? 주님의 뜻대로 십일조도 내지 못하고 봉헌을 하더라도 아주 아까운 듯이 하면 하느님도 그런 섭섭한 마음이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 했던 것보다 더 바쳤습니다.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셨고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삼손의 뜻이 아니라 필리스티아인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몸은 삼손과 같이 있었지만 뜻은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결국 들릴라를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던 삼손은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리는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했습니다.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내 안에 머무시려 하시는 하느님의 눈을 뽑고 사탄의 소굴로 집어넣는 행위와 같습니다. 나는 두 뜻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실 때, 성모님은 오히려 칭찬으로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도 당신만큼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뜻’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예수님께서 핏줄을 배신한다고 여겼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 “내 뜻만을 따른 이들만 내 나라에 들어와라!”라고 명하실 때, 주저함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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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특별한 신호가 있습니다. 그 신호는 매일 바뀝니다. 군에서는 그것을 ‘암구호’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위병소를 지키는 군인이 상대방을 향해 ‘화랑’이라고 하면 위병소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그날의 구호를 말해야 합니다. 화랑이라는 암호에 대한 구호는 ‘담배’였다면, 담배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병소의 군인은 아군이라고 받아들이며 문을 열어줍니다. 그렇지 않고, ‘관창’이라고 말하거나,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하면 아무리 아군의 복장을 했어도 결코 위병소의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 온 사제가 댈러스 교구에서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목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받아야 합니다. 제가 속한 서울 대교구에서 저를 보증하는 서류를 보내면, 댈러스 교구에서는 서류를 받은 후에 제가 사목할 수 있다는 허가증을 줍니다. 그래야만 합법적으로 댈러스 교구에서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방법으로 ‘고고학과 고인류학’이 필요했습니다. 유골을 탐사해서 인류의 시작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고고학과 고인류학은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탐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지층이 흙에 묻히기도 하고, 지각이 융기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바다였던 곳이 육지가 되기도 하고, 땅이었던 곳이 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방법으로 ‘분자생물학’이 등장했습니다. 분자생물학은 인류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한 여인에게서 출발했음을 밝혀냈습니다. 현생 인류는 초원화 된 아프리카에서 적응하였습니다. 직립보행을 하였습니다. 털이 사라지고, 땀샘이 생겼습니다. 인류는 두 발로 걷게 되었고, 땀을 통해서 체온을 조절하였습니다. 지능이 발전하면서 의식이 생겼고, 언어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인류는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인류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종교의 기준이 있습니다. 창설자가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창설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이 창설자입니다.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창설자입니다. 유교는 공자가 창설자입니다. 경전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의 경전은 불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은 성경입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코란입니다. 유교의 경전은 ‘사서삼경’입니다. 사회성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는 사랑과 자비, 평화와 나눔을 통해서 공동선을 위해 연대합니다. 자신의 종교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이웃종교를 외면하거나 무시한다면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세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도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는 내세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은 없지만 조상에 대한 차례를 지내면서 죽은 조상과의 유대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질문에 답을 주고, 공동선을 위해 함께 연대하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암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밝히는 기준도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의 가르침과 조직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기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일까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종교가 다를지라도, 민족이 다를지라도, 언어가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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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고 반문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절)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되면 누구나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인간적인 혈연관계의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간의 정과 예의를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본분에 대한 완성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가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 즉 그리스도의 형제자매 모습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밝혀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고 성화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죄를 많이 짓고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형제자매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시는 말씀이 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였기에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온 당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형제도 될 수 있고, 자매도 된다. 그 어머니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을 낳아줄 수 있을 때,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낳아줄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그 순간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 이제부터 나 자신의 삶이 마리아가 될 때, 작은 마리아로서 진정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작은 마리아의 삶을 통하여 참다운 신앙인으로 사는 삶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듯이, 왜 성모님께서 계실 수 있도록 하지 않으신 이유를 우리를 통하여 마리아를 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어떤 분은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전해줄 수 있음을 잘 알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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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만이 혈연관계처럼 예수님과 아주 강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49,15)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를 모두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이 ‘말씀’ 안에 담겨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예수님께 “주님, 주님!”이라고 외치고만 있는 사람인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예수님의 어머니로 누구보다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 실천하신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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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이들이 있는데, 즉 앵무새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 반복하는 이들이 있는데, 참 딱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7-40)
마태오복음 18장에도 ‘아버지의 뜻’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해도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나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뜻의 실행’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2)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거나,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일 수도 있고, 진짜로 열심히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목표가 잘못되어 있다면, 또는 목적의식도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냥 취미생활입니다. 간절함이나 절실함도 없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나 성당에 가고, 바쁘면 안 가고... 겉으로 보기에는 착하고 성실한 신앙인으로 보이더라도 겉모습만 그런 것이고, 평소에는 주님을 찾지도 않다가 뭔가 아쉬운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기도하고... 그러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실망해서 기도를 중단하고...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그런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주님께서는 몹시 싫어하십니다(묵시 3,15-16).>
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나의 가족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4)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9-10.12)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행동으로’(온 삶으로) 실천하는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중으로 죄를 짓는 일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죄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루카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은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믿는다고, 또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말은 잘하는데 실천은 안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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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미카 예언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합니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카’라는 이름의 뜻이기도 한 이 표현은 하느님의 업적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잘 나타냅니다. 대천사 미카엘도 같은 뜻의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실하시며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전능하시면서도 자애가 가득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이런 하느님의 업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 안에서 지속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혈통이 중심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연결됩니다. 그 뜻을 따르고 실행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이자 새로운 가족입니다. 그들은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마태 7,21 참조), 삶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새로운 관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은, 나약하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런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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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오 12,5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는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가족을 밝히십니다.
사실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던 첫째 제자로 표현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아를 두고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이 다 훌륭하고 좋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마리아 역시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에 포함될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의 뜻의 실행'에 대한 것은 '주님의 기도'의 셋째 청원의 내용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친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누가 이루는가? 그것은 당연히 하느님이 이루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때 사용되는 동사는 ‘신적 수동태’라고 불리는 형태로, 뜻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그분의 뜻에 우리가 응답하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또 우리와 함께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를 당신 뜻을 이루시는 데 협조자로 삼으십니다.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당신의 그 구원 사업에 참여시키십니다. 당신의 구원을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하는 자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당신의 뜻을 아버지께 맡기심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요 공간인 셈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미처 헤아려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오 11,2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선하심’을 신뢰하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가족을 이루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우선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곧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당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당신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으나,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당신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만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나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요, ‘듣는 이’라 하더라도 그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진정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이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말씀을 반향해줍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7,21)
이처럼 무엇을 행하는지가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 아버지의 자녀이고 아버지께 속해 있으며, 사탄의 뜻을 행하면 사탄의 자녀이고 사탄에 속해 있으며, 자신의 뜻을 행하면 자신의 자녀이고 자신에 속해 있는 것이 됩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지금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지금 나는 누구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가? 나 자신의 뜻인가, 하느님의 뜻인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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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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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머니’와 ‘형제’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오는데도 매우 차갑게 느껴집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대하셨던 분께서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냉정히 대하십니다. 가족 관계를 부정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의도였을까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을 핑계로 가족을 뒷전으로 미루는 태도를 합리화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새로운 가족을 초대하십니다.
따라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예수님의 반문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자들을 첫 번째 가족으로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혈연과 혼인’이 아닌 ‘아버지의 뜻’으로 모인 이들입니다.
교회 생활이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고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말도 점차 듣기 어려워지니, 사목자들은 친목 단체를 통하여 관계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새로운 예수님의 가족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피조물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는 이들,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이가 예수님의 가족이요 우리의 가족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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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12,48)
저는 누군가를 만날 때 책방에서 책을 읽으면서 사람을 기다립니다. 책방에서 우연히 잡은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에서, ‘틈 그리고 튼튼함’이란 부분에 보면, 『어느 스님이 ‘탑을 만들 때 묘한 틈을 줘야 해.’라면서 ‘탑이 너무 빡빡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아. 어디 탑만 그렇겠나. 뭐든 틈이 있어야 튼튼하고 오래가지!』 물건도, 사람과의 관계도 틈은 중요하며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오늘 복음의 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달리 안에 있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틈의 의미를 새로운 시선에서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단지 밖에 있는 가족들과 안에 있는 군중들에 대한 당신과의 관계의 친밀성이나 관계의 끈끈함을 비교 우위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 역시도 젊은 날 고향과 고향 근처 본당에서 피정 지도할 때 제 어머니도 자주 제가 피정 지도하고 있는 곳으로 오셨기에, 오늘 예수님을 찾아오신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12,47)라고 전합니다.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고 자신의 가르침을 살려고 노력하는 제자들을 보고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12,49.5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혈연의 가족 관계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한 이상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며 가족이라는 역설적인 강조입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당신의 가르침을 들었음에도 아직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하고 말씀하셨던 것도 이런 의도에서 발설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7,24) 라고 가르치셨지만,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어머니 마리아 보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살려고 했고 살았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보면. 혈연이든 지연이든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영적 가족 구성원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 여부에 따라 안과 밖이 구분 짓게 되는 것이며, 관계의 친밀도를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인입니다.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 여부가 하느님 가족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물론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어떤 이유나 의도에서 찾아왔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형제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더더욱 예외일 수 없으며 날마다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분과의 영적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틈을 갖는 것이며 그 틈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여백이며 여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심력 보다 사랑의 원심력을 더 강조하시고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주님, 저희를 형제요 자매라 인정해 주시고, 당신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아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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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형제와 누이, 어머니를 얻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2024년 5,175만 명이랍니다. 그런데 2045년에 이르면 5천만 명 이하로 떨어진답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로 이제는 혈육으로서의 형제, 자매라는 관계도 형성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하셨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누이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시고 하늘나라의 가족관계를 새롭게 형성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4-15)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폐5,8).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에페 5,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형제라 부르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하느님께서 나에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히브2,11-13)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사이에 형제애의 관계도 돈독히 해야 합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실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분은 생각을 바꿔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묵주반지를 끼고 신자임을 드러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생각 없이 지니고 다닌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깊은 관계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학연,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뜻을 사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사는 가운데(갈라 2,20) 형제자매의 관계를 확고히 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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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가족>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주님, 저희에게 생명을 돌려 주시어, 당신 백성이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 85,7)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예수님의 참가족’이었고, 이에 착안해 강론 제목은 ‘참가족,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복음의 장면과 흡사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분들의 공동체요, 우리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바로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교회 공동체입니다.
새삼 혈연血緣의 가족 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하고 주님 안에서 신연神緣의 참가족 공동체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사실 요즘 1인 가족의 증가와 더불어 혈연의 가족공동체도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형성되는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해지는 보편적 현실입니다.
지난 주일 참으로 오랜만에 20-30대 성당 청년부 13명의 피정지도를 하면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생생합니다. 인생을 일년사계로 요약하면 모두가 봄철에 해당되는 싱그러운 젊음으로 밝은 얼굴에 밝은 웃음소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젊음 자체가 축복’임을 드러내는 분위기였습니다. 대부분 가을철 인생들이 피정을 자주 오는데 이렇듯 봄철 인생을 맞이하기는 처음입니다. 청년들이 요청한 강의 주제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였고 저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공동체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공동체는 예수님 중심의 질서있는 공동체입니다. 중심과 질서가 중요합니다. 중심과 질서가 없으면 무너집니다. 그러니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어울린 공동체여야 합니다. 조화가 중요한 것이지요. 서로 맞추려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이신 예수님께 맞추세요. 그러면 저절로 다양성의 조화로운 일치가 이뤄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한계입니다. 한계를 넘지 마시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세요.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합니다. 서로간에는 거리를, 자기 분수의 한계를 알고 지키는 겸손과 예의가 필수입니다. 이래야 예수님 중심의 참 좋은 가족 공동체의 형성이자 실현입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잡힌 삶이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유독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의 삶입니다. 공동체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들이요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 가장 가까이 있는 내 공동체 삶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은 날로 커집니다. 공동체로부터 받는 상처보다는 입는 은혜가 백배는 클 것입니다. 어제 읽은 두 편의 시를 나눕니다. 벨라루스의 시인 막심 박다노비치(1891-1917)의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라는 시입니다. 공동체 삶에 지혜를 일깨워 주는 시입니다.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
다 무덤으로 향한다
뚜렷한 희망과 두려움 없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쓰고 나면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만나겠지
그리고 자신에게 묻겠지
하필이면 멀고 험한 길을 택해서
왜 모르는 곳을 향해 외롭게 걸었을까?
그리고 왜 온 힘을 들여
그렇게도 급하게 걸어 왔을까?
조용히 기어가는 지렁이도 무덤 바로 앞에서
우리를 따라 잡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
노년에 쓴 시가 아니라 25세 결핵으로 죽어가며 쓴 깨달음의 시입니다. 죽음 앞에 참으로 겸허하라는, 너무 유별나고 힘들게 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조용히 평범히 작게 살라는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시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중심의 삶의 중요성을 자각케 하는 글입니다.
어제 70년대를 풍미하면서 여전히 영원한 현역으로 활약해온 ‘아침이슬, 상록수의 음유시인 김민기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7월21일 지병인 위암으로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분의 ‘아침이슬’과 ‘늙은 군인의 노래’는 지금도 제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떨어지는 나뭇잎들처럼 세상을 떠나는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자각이 오늘 지금 여기서 현재 공동체 삶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또 하나 정현종 시인의 오래된, 그러나 유명한 단 두 줄의 ‘섬’이라는 시에서도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이 상징하는 바 누구나 염원하는 외딴곳의 쉼터이자 동시에 서로의 소통을 매개하는 모두의 중심인 구원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들 한 복판에 섬처럼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입니다. 혈연의 가족이 당신을 찾는다는 소식에 당신 주위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기준이 혈연의 피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렇다 하여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에 대한 폄훼로 오해해선 안됩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평생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데 전념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자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의 뜻 자체이신 예수님을 보고 배우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미카 예언서는 미카 예언자가 이집트에서 탈출의 구원업적을 이뤄주신 하느님을 회상하며 기도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예루살렘의 기도는, 미카의 예언은 마침내 새로운 파스카 예수님의 공동체를 통해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대변한 미카 예언자의 기도와 고백이 혼성된 간절한 청원입니다.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십시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미카 예언자의 놀라운 일들을 보여 달라는 간청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달라는 간청이 마침내 오늘 복음의 파스카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통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를 죄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공동체를 이뤄주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시편8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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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동해 거진 성당에서 있었던 일>
동해 거진 성당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잠 때문일까 세 시간 자고 깼습니다.
일어나 복음을 읽고 묵상을 시작하는데 왕파리 한 마리가 제 방에 들어와 왱왱대며 방을 이리저리 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불을 켰기 때문에 들어 온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낯선 곳이었기 때문인지 왜 왕파리가 한밤중에 내 방에 들어왔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파리가 제 방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왕파리가 들어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 들어 온 것입니다.
이 왕파리는 그저 왕파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신 하느님의 사신일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행진 첫날부터 하느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신 것이라고.
왕파리가 들어왔네 하고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지나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저를 지나치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이 하느님께 머물지 않고 지나치는 것일 겁니다.
‘왕파리가 내 방에 들어왔네!’가 아니라 ‘왕파리가 들어왔네!’ 그저 그 정도이면 생각이 왕파리에 머물지 않고 지나치듯 하느님께서 왕파리와 함께 제 방에 들어오시고 저를 찾아오셨어도 제 생각이 하느님께 머물지 않고 얼마든지 지나쳐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놓친 왕파리가 얼마나 많고, 그렇게 놓친 하느님이 얼마나 많을까?!
하느님 말씀도 그렇게 많이 내게 오셨어도 그렇게 많이 놓쳤을 것입니다. 왕파리가 아니라 풀벌레와 함께 오셨을 때도 있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들과 함께 오셨을 때도 있고, 구름과 비와 천둥 번개와 함께 오셨을 때도 있었을 텐데 놓쳤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신 말씀도 이렇게 이해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수없이 많이 만난 남자와 여자들이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남자와 여자들이었거나 미친년 놈들이었지
내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고 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이 하느님께 미치지 못하고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말씀과 뜻도 지나쳤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누이들을 시켜서 말씀하셨는데도 웬 여자가 지껄인 말로 지나쳐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형제들을 시켜서 말씀하셨는데도 웬 놈이 씨부려댄 말로 지나쳐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았고,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한밤중 제 방에 들어와 이것을 깨닫게 해준 왕파리가 고맙고, 하느님께 감사 기도드리는 거진 성당의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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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12,49)
<회개의 메시지!>
오늘 복음(마태 12,46-50)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12,47)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12,48)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12,49-50)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있지만, 또 다른 가족들,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영적인 어머니와 형제들도 있습니다.
어제 '사무엘의 고별사'(1사무 12,1-25)를 필사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고별사 안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조상들은 주님께 울부짖었소.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 이제 저희를 원수들의 손에서 빼내 주십시오. ...' 그래서 주님께서는 ... 사방에서 에워싼 원수들의 손에서 여러분을 빼내 주시고 안전하게 살수 있게 해 주셨소."(1사무 12,10-11)
'주님께로 돌아와야 살 수 있다.'는 사무엘의 고별사가 전하는 회개의 메시지가 바로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나는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구원자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는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미지근한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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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마태 12, 50)
가족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마음을 통해
비로소 보게 되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입니다.
마음을 열면
모두가 가족입니다.
사랑을 나누면
모두가 고향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가족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새로운 가족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살게합니다.
가족의 참된 범위를
더 넓게 확장시켜줍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말씀과 실천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한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도 형제도 누이도
말씀과 실행안에서
더욱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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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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