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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목이 엉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한국교회를 보다니 이것은 엉뚱해도 너무 엉뚱한 것 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영국의 평론가 코울리지는 상상력이란 전혀 어울릴지 않는 두 가지를 연결시키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택시 운전사>와 한국교회를 연결시키는 상상력 놀이를 한 번 해보자. 모두들 <택시 운전사>가 진한 감동을 주는 영화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영화처럼 감동을 주는 교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큰 감동을 주는 교회를 만나기가 어렵다면 한 번 그런 교회를 꿈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이가 들다보니 힘들었던 옛날 일들이 꿈에 나타나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그런 불안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다. 그리고 꿈은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킨 5·18의 군부 세력과 부정과 부패를 저질러서 한국교회의 위상을 떨어뜨린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유사점이 있지 않는가? 내 눈에는 계엄령을 발동한 군부 세력에 항거해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일어선 광주 시민들이 한국교회를 타락으로 몰아넣은 주범들을 비판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리고 사명감과 정의감을 가지고 헌신하는 <택시 운전사>의 두 주인공에게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신실한 일꾼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1980년에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당시 방송과 신문에서는 광주의 실상과는 전혀 다른 군부 세력에 유리한 보도만을 내보냈다. 기독교 언론 매체의 기자들이 기자 의식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언론이 통제되는 한국교회의 상황이 5·18 당시의 언론 통제와 비슷해 보인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언론과 현재의 기독교 언론 매체는 모두 어용언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초교파를 내세우는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진보적인 성향의 칼럼을 실었다가 편집국장이 이사들로부터 질타를 받은 일이 있다. 국장은 그 신문이 초교파를 내세웠으니까 보수적인 성향의 글과 함께 진보적인 글도 실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이사들에게 항변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원이 없으면 신문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국장은 결국 보수 신앙을 견지하는 목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한국의 기독교 신문이 처한 현실이다. 그러나 <당당뉴스>는 다르다. 신학교, 교계, 목사 개인의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독교 언론 매체들이 교단의 엄격한 통제 아래에 있는 현 상황에서 이렇게 언론 매체의 본연의 기능을 확보하기까지 피땀 흘려 노력해 온 운영자들의 노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특히 한국의 감리교 교인들은 이러한 좋은 언론 매체를 갖게 된 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뿐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성원해야 한다. 모든 기독교 언론 매체가 자유롭게 보도하고 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는 날, 나는 그 날을 꿈꾼다. 모범택시 운전사 김만섭은 그가 광주 현장에 가기 전에는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군부 세력의 계엄령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저렇게 불만이냐고, 저런 철없는 애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 사우디에 가서 일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만섭의 이러한 방관적 태도는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여러 비정상적인 처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오히려 교회의 비리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교인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은 오래 참으라, 온유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성경 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면서 방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일부의 못된 목사들이 인간적 욕심에 따라 교회를 손 안에 쥐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무관심한 교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 현장의 만행을 목격한 후에 김만섭의 방관적인 태도가 적극적인 참여로 바뀐다. 그는 그곳에서 자행되는 군부 세력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구타당하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방관자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독일인 기자를 광주에 버려두고 서울로 올라가려고 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김만섭은 순천 도상에서 죽어가는 광주 시민들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그는 한동안 고뇌에 빠져서 신음하다가 서울로 향하던 차의 방향을 광주 쪽으로 휙 바꾼다. 그가 광주 쪽으로 차를 돌리는 순간 나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그가 석가 탄일에 놀러갈 수 없게 되어 미안하다고 딸에게 전화하면서 광주에 손님을 두고 와서 그를 데리러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떼어 놓고 혼자 온 것을 자책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미루어 볼 때, 외국인 기자는 한국을 위해서 몸 바쳐 취재하는데, 한국인인 그는 딸과의 약속을 위해서 그 기자를 버려두고 서울로 올라가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광주에서 고통당하는 그의 동포를 도와야겠다고 결심했고, 그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바로 독일인 기자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돈을 벌려는 택시 운전사, 딸만을 염려하는 아빠에서 광주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으로 변했다. 이러한 그의 변화가 없었다면 독일인 기자가 광주를 빠져나가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의 헌신적 도움이 없었다면 광주의 실상은 세상에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교인들이 이 택시 운전사처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방관자적인 교인들만 있으면 한국교회는 지금 당면하고 있는 부패와 퇴락을 벗어날 수 없다. 한국교회에는 교회를 바로 잡기 위해서 헌신하는 교인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일부의 목회자들, 장로들, 권사들이 교회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들만의 힘으로는 한국교회가 개선될 수 없다. 교인들이 헌신적으로 그들을 도와야만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광주로 돌아간 김만섭처럼, 뒤틀려 있는 한국교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교인들이 많아질 때 한국교회는 갱생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되는 날을 꿈꾼다. 군부 세력이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광주 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목사들의 욕심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누구보다 먼저 목사들이 바로 서야 한다. 목사들이 바로 서면 대부분의 교회 문제는 해결된다. 목회자는 우선적으로 겸손해야 하고 목회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목회자의 권위의식, 고집, 무책임, 소통의 부재에서 나온다. 나는 목회자들이 겸손과 사명감으로 무장되는 날을 꿈꾼다. 우리는 <택시 운전사>에 나오는 두 주요 인물이 자기들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자원해서 맡고 나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 주재 독일 기자는 다른 외국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동경에 가만히 앉아서 거기서 취재할 수 있는 범위의 기사만 본사에 보내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누구도 그에게 광주에 가서 취재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위르겐 힌츠페터가 자진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은 기자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택시 운전사 김만섭도 그 기자를 광주에 데려다 주고 그날 밤에 서울로 돌아오는 조건으로 광주에 갔기 때문에 다음 날 서울로 곧장 올라왔어도 그를 탓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시민들이 구타당하고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주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지만, 서울로 가던 길을 접고 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광주로 돌아갔다. 목회자들이 바로 서 있지 않는 한국교회에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인 기자나 택시 운전사처럼 교회 개선을 위해서 자원하여 나서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부패하여 지탄의 대상이 된 지금 이런 상황에 의분을 느끼면서 정의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 나서는 사명자들이 필요하다. 그런 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하며 나설 수 있다. 나는 많은 교인이 독일인 기자나 택시 운전사처럼, 그리고 이사야처럼 사명의식을 갖고 자원해서 나서는 날을 꿈꾼다. 택시 운전사 김만복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아무런 물질적 보상도, 칭찬도 원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관객들은 진한 감동을 느낀다.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가 한국인 운전사 김만섭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김만섭은 “무엇이 고마워, 내가 고마워해야지.”라고 중얼거린다. 그 독일인이 일본에 가서 취재한 기사를 본사에 보낸 다음 바로 한국에 나와서 택시를 수리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노트를 내민다. 이때 택시 운전사가 그 노트에 적어놓은 것은 무엇인가? 엉뚱하게도 그가 거기 적은 이름은 김만섭이 아닌 김사복이고 전화번호 역시 자기 것이 아니었다. 힌츠페터가 그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지고 그를 백방으로 찾다가 20여 년 후에 방송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김만섭이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지만 그는 힌츠페터를 만나지 않는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노년에 이른 힌츠페터의 사진과 더불어 그의 독일어 육성을 들려준다. 그는 옛날에 김사복이라는 택시 기사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가 성공적으로 취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그를 찾는다면 당장 한국에 가서 그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만섭은 이 말을 듣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한 소시민이 광주의 현장을 목격한 후 살육의 현장에 뛰어들어 외국 기자를 도운 것도 의외였다. 그런데 그가 아무런 손해보상도 사람드의 칭찬조차도 원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관객들은 다시 놀란다. 여기서 관객들은 힌츠페터가 일본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말하자 김만섭이 “무엇이 고마워, 내가 고마워해야지.”라고 중얼거렸던 말을 기억하게 된다. 이 영화가 마감하는 자리에서 한 소시민의 의분과 정의감 그리고 애국심이 함께 어울려서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이 택시 운전사야 말로 의인 아닐까?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는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동포를 돕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가 받을 만한 손해보상도 거부하는 사람,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선행을 인정해주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믿는 사람, 이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면 누가 의인이겠는가! 나는 극장을 나오면서 교회를 생각했다. 열심히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수고의 대가로 장로, 권사, 혹은 집사가 되고 싶어 한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일하고는 대가를 바란다. 이렇게 목회자들을 비롯해서 대다수의 교인들이 자신을 희생하기보다는 교회와 하나님을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한다. 이러한 한국교회에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이 찾으셨던 열 명의 의인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택시 운전사 김만섭보다 아주 작아 보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김만섭보다 더 커 보일 날을 꿈꾼다면 그것은 너무 큰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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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당당뉴스> 최재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