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1945년 일본 교토 코류지(廣隆寺,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을 두고 ‘패전(敗戰)의 피안(彼岸)에 남긴 것들’이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모습을 표현한 여러 형태의 신상神像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들에는 어딘지 인간적인 감정의 자취가 남아 있어 절대자만이 보여 주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미륵상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반가사유상을 보고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평화로운 모습이다고 감탄했다 한다.
그런 것인가. 그 사유상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보이는가. 그것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까 라고 했을 때 잃어버린 팬티 생각을 한다 라고 하는 말과 같다.
나의 눈에는 그 반가상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어떻게 하면 고해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구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깊은 생각에 젖어 있는 자는 평화롭지 않다. 풀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반가사유라고 했다.
반가半跏는 반가부좌를 말하고 사유는 깊은 생각이다. 그러니까 반가사유상은 반가부좌 자세로 깊이 생각하고 있는 보살상이라는 뜻이다.
보살은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택한 운명이다. 그들에게는 깊은 원력이 서려 있다. 보살은 그 원력이 미완성된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생을 어떻게든 제도해야 하는 마음의 짐이 있다. 그것이 숙제라는 거다.
그래서 야스퍼스가 그 보살을 제대로 보았다면 그분의 숭고한 원력에 말할 수 없이 숙연해질 뿐이다고 했어야 한다.
''반가사유상이 불상 아닙니까?''
''턱도 없는 소리. 보살상입니다.''
그 원력이 완성되어 부처가 되면 이제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운명의 짐이 없다. 중생을 제도하는 데 의무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뒤바꾸어 말하자면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으로 중생이 부처에게 제도되는 것이다.
첫댓글 보살의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깊은 원력.
미완성된 그 원력 속에서도 지혜와 복덕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와 수행자의 시선......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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