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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자평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조
癸 丁 甲 癸
卯 酉 子 巳 乾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80 70 60 50 40 30 20 10
어느 분이 이 사주에 대해 속시원히 한번 풀어 주실 분은 없는지?
1. 이 사주가 과연 모택동 사주가 맞는지?
2. 용신, 약신이 무엇인지?
3. 정사대운에 왜 문화혁명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역사에 길이 오명을 남겨야 하는지?
4. 비슷한 원세개의 사주에 대해서도 아직 제대로된 설명을 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
5. 모택동과 한글자만 다른 명조도 있는데 천양지차인데 그 원인은...
丁 丁 癸 己
未 巳 酉 未 乾 원세개
丁 戊 己 庚 辛 壬
卯 辰 巳 午 未 申
(사주정설 뱍영관저 214 페이지 첫번째 사주)
[책속의 설명]
이 사주는 청나라 말년 청군을 근대화시킨 원세개의 사주이다.
일주가 강하고 월지에 재관이 상생하여 용신이 계수 즉 편관이 될 듯하나
계수는 기토에 의해 파극되어 실상 식신생재격이다.
사주에 습토가 없으므로 계수가 대신 조토를 습루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신기가 불첨함은 면치 못한다.
경오대운에 야관 이십여세의 나이로 북양대신 이홍장의 명령에 의해
사실상 구한국의 총독으로 행세하였다.
그후 대운이 식상운이라 관계가 누진하여 청군총사령관이 되어 손문의
혁명군과 대적하다가 돌변하여 손문과의 타협아래 중화민국 초대총통이 되고
일시 稱帝까지 하다가 정묘대운에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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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정설에 나오는 모택동과 한자만 다른 명조]
癸 丁 甲 癸
卯 酉 子 亥 乾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사주정설 백영관저 196 페이지 첫번째 사주)
[책속의 설명]
정화가 자월에 생하였고 사주팔자의 대부분을 관살이 차지하고 있다.
월간에 갑목이 있어 정화를 생조하므로 종살격도 되지 못한다.
고로 신약사주에 해당하고 갑목 즉 인수가 용신이다.
그러나 묘유충이 되어 갑목은 무근하다.
비록 천간이 연연상생하여 사업은 잘 되어 갔으나
<일주가 약하고 관살이 중하고 재성이 미미하며 인성이 있으면 여식이 많다>
는 법칙에 해당되어 처가 딸 여덟을 낳고 첩 또한 딸 여덟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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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조의 푸념]
우리나라 역학계의 수준이 중국에서 이 명조에 대해 엉터리로 해석한 것을
또 그대로 번역하거나 배워서 그대로 가르치니... 이것이 현 수준인 것이다.
왜 이런 쉬운 명조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는가?
세암인가 하는 젊은 역술인이 자기방에 원세개의 사주에 대해서 똑같은 논리로
금용이 어쩌고 하면서 베낀 논리를 미사여구로 치장하여 설한 것을 보았는데...
천년자평이라 하지만 논리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의 천년 공부의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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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렇게 명조만 올려서 생각을 해 보시도록 하고, 이후에 이 명조에 대한
저의 견해를 올리면 더 재미가 있을 것도 같네요
(힌트 : 간지체성론에서 정화와 계수의 관계를 주목해 보면 어떠하실지?)
마오쩌둥 [ 毛澤東(모택동) ] 이력
자 룬즈[潤之].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사오산[韶山]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8(庚子)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3세(癸亥大運 乙巳年)까지 《논어》와 《사서(四書)》 등을 읽었다.
16세(戊申)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己酉,17세)년 둥산[東山]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長沙]의 샹샹[湘鄕]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民立報)》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反淸論)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19세)년 10월 辛亥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壬子,20세)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壬戌大運,丁巳)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다.
1918(壬戌大運 26세 戊午)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 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기미년 27세)년 5 ·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경신)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갑자년:신유대운 32세)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2(임술년:30세)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그 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갑자년 32세:신유대운)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병인 34세)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정묘 35세)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경오년 38세)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경신대운 갑술년 42세) 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무인년 46세)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 경진년 48세)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기미대운 을유년 53세)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병술 정해 무자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己丑 癸酉 甲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기축 57세)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경인년 58세)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무오대운 정유년 65세) 반우파(反右派)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무오대운 무술년 66세)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폈다.
1959년(기해년 67세)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갑진년,72세,정사대운) 4월 《마오쩌둥어록[毛澤東語錄]》을 간행시켰고,
1965(을사년,73세)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무신년,76세,정사대운 후반) 10월, 1959(기해)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켰다.
1969(기유년,77세,정사대운 후반) 마오쩌둥-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신해년,79세)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경술년 78세,정사대운 후반)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병진대운 전반 84세)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첫댓글 ...고서에 나온 명조의 신빙성은. 여러번 느끼지만 믿거나 말거나.. 인경우를 자주 봅니다. 알기론 모택동 경우엔.. 당시 수세에 밀려 잇을때,. 당시 실권자중 누군가가 . 모택동의 사주를 보고 자신의 정적이 될만한지 아닌지 당대 촤고의 역술인에게 문의... 알려진 모택동 사주론 도저히 자신의 정적이 될수 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엿다는 내용을 본적 잇읍니다.(근데 결국 모택동이 승리했죠 -_-) 그내용이 맞는지 아닌지도 에메하지만... 요즘 정치인들 및 재벌들 사주..알려진거 태반이 짜가란건 잘아실겁니다. 현대 고관대작들 경우에도 그런데 외국의 옛날사람들 사주 신빙도는.. ...개인적으론 이사주로 믿기 어려워 보입니다.
위 사주의 주인공이 정말 모택동의 원명인지는 몰라도...제가 보기에는 극신약이며 또한 운로가 초년에 서쪽이라..단명할 사주입니다... 참고로 음의 일주는 비겁이 꼭필요합니다....그리고...신빙성없는 사주가 많다는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