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1992년 출간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특유의 신랄한 시선으로 인간의 내밀한 갈등의 기미를 포착해, 삶의 진상을 드러내는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박완서(1931~2011) 작가의 대표작이에요. 박완서 작가는 1970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단에 나왔지만, 쉼 없이 글쓰기에 매진하며 장편소설 15편과 80편 넘는 단편소설을 발표했어요. 작가는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내면의 은밀한 갈등은 물론,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성 평등 등 사회문제를 자신이 겪은 삶을 중심으로 풀어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어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주인공 ‘나’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박적골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죠. 엄마는 ‘자식을 어떻게든 서울에서 길러야 되겠다’는 유달리 강한 교육열을 신앙처럼 갖고 있었어요. 도회지에서만 살았어도 남편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거란 믿음 또한 강했죠. 집안의 반대에도 엄마는 오빠에 이어 결국 나까지 서울로 데리고 가요.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당시 서울이 아닌 ‘서울 문밖’ 현저동 달동네였어요. 물도 길어다 먹어야 하고, 화장실도 눈치 보며 써야 하는 고된 서울살이 때문인지 나는 고향 박적골에 지천이었던 새콤달콤한 맛의 싱아 생각이 더 간절했어요.
엄마는 억척스럽게 일했어요. 삯바느질로 서울에 집을 장만할 정도였죠. 오빠도 일본인이 하는 공장에 취직해 집안 살림은 좀 나아졌어요. 이내 해방이 오고, 오빠는 당시 유행처럼 번진 공산주의에 잠시 몰입해요. 하지만 곧바로 관심을 접고 중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결혼하고 애도 낳았어요. 1950년 스무 살이 된 나는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거뜬히 합격’해요. 나는 기고만장했어요. 당시 인문대와 자연대를 합쳐 ‘문리대’라 했는데, ‘순수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승할 때’여서 문리대를 ‘대학의 대학’이라 불렀거든요.
하지만 스무 살의 온갖 황홀한 꿈은 찰나였어요. 6월 25일, 전쟁이 터졌어요. 전쟁은 가족의 평화를 깨뜨렸죠. 오빠는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서울이 수복되고 난 후엔 ‘빨갱이’라는 의심을 받게 돼 가족은 온갖 수난을 겪어요. 엄마는 물론 나도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수모를 겪고 돌아와요. 오빠도 천신만고 끝에 돌아오지만, 총명한 예전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