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의 제 1군은 닷새 후에 이곳에 닿을 것이다, 그 안에 우리는 얀진
을 함락한다."
아르바쿠는 쿤두스와 함께 타타르의 용장으로 서로 경쟁의식이 있었기도
했다. 그래서 양진 성의 몽골 군 전력이 두 배 가깝게 되었지만 정면 공격
을 하려는 것이다. 밤이 늦도록 진 막에서 공격 계획을 논의하던 아르바쿠
가 침소에 든 것은 자시 무렵이었다.
"왕 전하, 소노가 뵙습니다."
벽 쪽의 장막 구석에서 목소리만 들리는 바람에 마악 자리에 누우려던 아
르바쿠가 놀라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니, 그대가."
검정 장막 한 부분이 떼어지는 것처럼 나타난 사내는 왜소했고 평범한 얼
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위사대에 소속된 닌자 두목 소노였다. 소노
가 앞쪽에 소리 없이 앉았을 때 겨우 진정이 된 아르바쿠가 화난 듯이 물었
다.
"소노, 왜국의 닌자들은 이렇게 무례해도 되느냐?"
"폐하의 밀명을 받은 터라 밀행 해온 것입니다."
"아 아, 그런가?"
금방 머리를 끄덕인 아르바쿠의 눈이 번들거렸다. 잠이 다 달아난 것이
다.
"그래, 어떤 명이신가?"
"폐하께서는 정규전을 피하라고 하셨소이다."
소노가 입술도 달싹이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소인을 보내신 것이지요."
"아니, 그대가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이맛살을 찌푸린 아르바쿠가 묻자 소노의 생선 같은 눈동자가 조금 움직
였다.
"소인이 부하들을 데리고 얀진성 동쪽 수타산에 잠복했다가 모야쿠를 기
습할 것입니다."
"그대가?"
아르바쿠가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이봐, 소노, 모야쿠는 몽골 제일의 용장인데다 몽골 지리는 제 손금보
다 더 잘 아는 놈이다, 네가 만든 함정에 빠져들 것 같지가 않구나."
"소인의 부하는 10여명 남짓입니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소노가 아르바쿠를 보았다.
"모야쿠가 수타산 계곡에서 숙영을 할 적에 기습을 하려는 것이지요."
"으 으음."
마침내 아르바쿠도 정색하고 왜소한 왜인을 보았다. 소노가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도울 일은 없겠는가?"
"왕 전하께서는 천천히 서진해 가시다가 수타산 정상에서 봉화가 오르거
든 그 내용을 읽으시고 행동하십시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그, 그렇게 된다면야."
어깨를 치켜세운 아르바쿠가 소노를 보았다. 이제 그의 눈에는 소노가 전
혀 왜소하게 보이지 않았다.
"모야쿠가 없는 몽골 군단은 사분 오열이 되어서 혼란상태가 될 것이다.
당장에 승부가 난다."
"그럼 소인은 이제 떠나겠소이다."
"오, 그런가?"
소노가 머리를 숙여 절을 했으므로 따라서 시선을 내렸다가 들었던 아르
바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소노는 사라졌고 눈앞에 어두운 장막만 내
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왜인 닌자는 기묘한 족속들이다."
입맛을 다신 아르바쿠가 혼잣소리를 했다.
"폐하께서는 이상한 놈들을 심복으로 데리고 계시는군,"
그 사이에 벌써 소노는 아르바쿠의 진 막에서 20여 보나 떨어진 풀숲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주위에는 부하들이 그를 향해 부채살처럼 엎드린 채
눈만 반짝였다.
"내일 제 3군이 서진하면 모야쿠도 즉시 동진해 올 것이다, 우리는 모야
쿠를 수타산에서 친다."
소노가 입술만을 달싹이며 말했지만 부하들은 다 알아들었다. 그러나 20
여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아르바쿠의 위사들은 이쪽에 10여명의 사내가 엎
드려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자, 가자."
모야쿠가 몸을 일으키더니 소리 없이 달려나가자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짙은 어둠이 덮인데다 모두 검정 옷 차림이어서 풀잎만 조금 흔들릴 뿐 마
치 바람을 타는 것 같다. 제 3군의 숙영지를 빠져나온 일행은 이제는 황야
를 거침없이 달렸다.
"두목, 우리는 수타산이라는 곳에서 죽습니까?"
소노의 옆을 달리던 부 두목 오닌이 물었다. 거침없이 말한 것을 보면 뒤
를 따르는 부하들도 들으라는 것이다.
"보라."
달리면서 소노가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이 얼마나 광대한 땅이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천하를 보라."
소노가 목소리를 높였다.
"웅지를 품은 채 대륙의 복판에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한 행운이 있으랴?"
오닌은 입을 다물었고 부하들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아정이 진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 대금황제 이반은 활시위를 당겨보고 있
는 중이었다.
활은 철궁으로 사정거리가 300보나 되는 데다 화살은 넉자나 된다.
힘껏 활시위를 당겼을 때 활은 둥근 달처럼 부풀었으나 이반은 힘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가선 아정이 한쪽 무릎을 꿇고 이반을 보았다.
"폐하께 드릴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반이 시위를 늦추더니 활을 위사에게 건네 주었다.
"시윗줄이 조금 느슨하다, 단단히 매어라."
"예, 폐하."
위사가 나갔을 때 이반이 아정에게로 몸을 돌렸다.
진막 안에는 이제 그들 둘 뿐이었다.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가?"
"진중에 소녀가 대금 황제의 제 3부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얼굴을 굳힌 아정이 이반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명에도 소녀를 제 3왕비로 맞겠다는 사신이 갔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요."
"그렇다."
이반이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대는 몽골 대신으로 나에게 인질이 된 것이다, 다만 그것을 내가 정
했을 뿐이지."
"소녀는 싫습니다."
눈을 치켜 뜬 아정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어찌 소녀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럼 지금 묻겠다."
이반은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이다.
"내 제 3왕비가 되겠는가?"
"싫습니다."
"그럼 진막으로 돌아가라."
다시 머리를 끄덕인 이반이 옆에 놓인 장검을 들더니 칼집에서 칼을 빼내
었다.
그리고는 날을 살피면서 말했다.
"아마 네 아비 헌종은 내 사신을 맞아 혼인을 승낙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네 뜻으로 몽골에 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도 마찬가지."
칼날에 만족한 시선을 보낸 이반이 다시 칼집에 칼을 넣더니 정색했다.
"나도 너 따위 오만하고 방자하며 식량만 축내는 여자를 왕비로 맞을 생
각은 없다, 너는 그저 인질일 뿐이야."
이반은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아정을 쏘아보았다.
"명 왕조는 부패했다, 왕실도 마찬가지로 악취가 진동을 한다, 내가 명
을 치지 않는 이유는 무고한 백성들이 고난을 겪게 하지 않으려는 것 뿐이
야."
보료에 등을 기댄 이반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나는 몽골을 정복하고 서진을 계속할 작정이다, 그렇게 되면 명은 대금
에 비해 한줌밖에 안 되는 소국이 되지, 그때면 명은 익은 과일이 떨어지
듯이 자연히 대금에 복속하게 된다."
이를 악문 아정은 마침내 시선을 내렸지만 어느 사이에 고였던 눈물이 볼
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러나 이반의 말은 더 이어졌다.
"너로 인하여 명은 체면을 세우게 되었으며 나또한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
는 효과를 얻었다, 그러니 네 존재는 나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소녀를 어찌 하실 건가요?"
마침내 아정이 물었을 때 이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와 함께 서진을 하는 것이야, 사마르칸트를 지나 다시 사막을 넘어
백 안 인들의 땅으로, 나는 징기스칸보다도 더 넓은 천하를 정복 할 것이
다."
그리고는 이반이 다시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러면 너는 네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다음날 아침 황제가 친히 지휘하는 철기 제 1군이 타타르의 왕도를 출발
하여 서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가 지휘한다고 해서 깃발이 많거나 화려한 점은 어디에도 없
다.
친위군 1만이 따로 붙어서 타군에 비하여 전투 병력이 1만정도 많은 4만
이었고 따라서 예비마를 포함한 말이 6만필이 넘었다.
철기군의 치중 대 또한 기마 군이어서 발로 걷는 군사는 없다.
6만필의 말이 속보로 진군을 시작하자 곧 땅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흔들
렸다.
철기군의 부대 단위는 100인 장이 지휘하는 100기의 기마대가 기본이다.
그 10개 대를 1000인 장이 이끌며 1000인 장 2개 대를 2000인 장이 통솔
하고 2000인 장 2개 대를 5000인 장이 통솔했다.
5000인 장 2개 대는 1만인 장에 소속되었는데 1만인 장은 곧 대장군으로
불리었다.
아정은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본 진의 바로 뒤쪽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뒷모습이 다 보였다.
황제는 200보쯤 앞을 장군들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아가는 중이었는
데 검정색 가죽 갑옷에 허리에 두 자루의 장검을 찼고 등에는 화살 통을 매
었다.
100인 장의 무구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차림이었으나 아정에게는 금
방 눈에 띄었다.
아정도 투구 대신으로 머리를 감아 담은 두건을 썼을 뿐 엷은 가죽 저고
리 차림에다 가죽 장화를 신어서 미소년 같았다.
아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따르는 시녀 셋도 마찬가지였다.
"마마, 오늘 중으로 몽골 땅으로 들어 간다고 하옵니다."
시녀 화진이 옆으로 바짝 붙으며 말했다.
아정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동무 같은 시녀였는데 표정이 밝다.
"마마, 장관이 아니옵니까? 이만한 기마군을 소녀는 처음 봅니다."
"명은 이보다 몇 배나 많다."
했지만 아정은 자신의 억지소리를 화진이 알아채고 있다는 것을 안다.
과연 철기군의 진군은 장관이었다.
100기씩 무리를 지은 기마 군은 정연하게 몰려 나갔는데 좌우를 돌아보면
끝도 보이지 않았다.
"마마, 몽골을 지나 사막을 넘으면 백안인들의 땅이 나온다고 합니다."
화진이 다시 쪼잘대었다.
"머리칼이 황금색인 여자는 불에 던져져도 타 죽지 않는답니다."
"우둔한 년, 시끄럽다."
이맛살을 찌푸린 아정이 화진을 흘겨보았으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화진의 밝은 분위기가 전염이 된 것이다.
"마마, 폐하께서 오늘 아침에도 군사들과 같이 주먹밥을 드셨답니다."
다시 화진이 말했을 때 북소리가 울리더니 기마군의 진군 속도가 빨라졌
다.
아정도 보조를 맞추려고 말에 박차를 넣었다.
황제 이반에 대한 군사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황제가 불 속으로 뛰어 들라고 영을 내리면 아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뛰
어들 것이었다.
군사들은 황제의 따뜻한 말 한마디, 손짓 한번에도 몸을 떨며 감격하는
것이다.
그것을 황제 이반은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정은 아버지 헌종을 떠올리고는 숨을 내쉬었다.
대명의 황제는 말을 탈 줄도 모르는 것이다.
거기에다 환관들에 둘러 쌓여 궁궐에만 있는 터라 이제까지 백성이나 군
사들의 말을 듣기는커녕 얼굴도 본적이 없다.
"아아, 장관이다."
화진이 다시 감탄을 하는 바람에 아정은 시선을 들었다.
옆쪽의 밋밋한 능선 위를 철기 군이 달려가고 있었다.
새까맣게 능선을 덮은 기마 군은 대오를 정연하게 유지했지만 모두 활기
가 넘쳐흘렀다.
창날이 햇빛을 받아 무수하게 반짝였고 말굽소리는 지진과 천둥이 함께
닥쳐온 것 같다.
"수타산에서 숙영을 한다."
모야쿠가 자르듯 말했을 때 부장 효선이 손을 들어 전령을 불렀다.
기마군 5만에 보군 1만의 대군이었으니 전령 장수 휘하의 전령 군관만 해
도 50여 명이다.
"수타산에서 숙영을 할 테니 선봉군은 숙영지를 잡도록."
달려 온 전령 군관에게 지시한 효선은 머리를 돌려 모야쿠를 보았다. 그
들은 10여 년 간 손발을 맞춰온 사이인 것이다.
"장군, 선봉군은 숙영지를 탐색 시킨 후에 5리쯤 전방으로 진출 시켜야
하오."
"그리 하라."
모야쿠의 시선이 다시 뒤쪽으로 옮겨 졌다.
아르바쿠가 이끄는 금의 기마 군 3만이 서진해 온다는 간자의 보고를 받
자마자 모야쿠는 군사를 이끌고 얀진성을 떠난 것이다.
얀진성에는 보군 1만여 명만 남겨 놓았지만 모야쿠는 걱정하지 않았다.
수타산을 넘어 자운벌에서 금군을 궤멸시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군이 꽤 잘 따라오는군."
만족한 듯 입가에 웃음기를 띄운 모야쿠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자운벌에 도착하면 금군이 올 때까지 하루쯤 쉴 여유가 있을 것이다."
금군은 기마군 뿐으로 보군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금군의 최대 약점이
다. 기마군은 기동성이 뛰어나긴 하지만 안정성이 없다.
몽골군의 보기 합동 전법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이었다.
수타산 기슭에 닿았을 때는 유시 무렵이어서 주위는 어두웠다.
오늘 하루 80여 리를 행군해 왔으니 기마군은 아직 멀쩡했지만 보군은 지
쳐 있는 상태였다.
"장군, 진 막을 산 중턱에 치겠소이다."
효선이 말하더니 위사대를 이끌고 먼저 산길을 앞장서 갔다.
수타산은 암산으로 나무가 드물어서 매복하기에는 부적당하다.
거기에다 계곡이 깊지 못하고 물이 귀한 곳이라 성을 쌓지 못했다.
그러나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였으므로 숙영지로는 적당한 곳이
었다.
"주위 경계를 철저히 하라."
산 중턱의 평지로 다가가면서 모야쿠가 위사 대장에게 지시했다.
금군은 아직 나흘 거리에 있었지만 매사에 허점을 보이지 않는 성격의 모
야쿠이다.
그가 어둠에 덮여진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부장에게 달려가 위장 진을 만들도록 하라."
모야쿠는 40대 후반으로 20여 년 전에는 서역 원정길에 오른 적도 있는
데다 명과의 대 소 전투를 수 십 번 치른 역전의 용장이다.
숙영지에 닿았을 때 이미 효선은 위사대를 지휘하여 그 중 높은 위치에
대장군의 진 막을 세워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불은 밝히지 않았다.
조금 아래쪽에 여러 채의 진 막을 세워두고 주위에 환하게 횃불을 밝혀
놓았는데 그곳이 바로 위장한 진지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으므로 모야쿠는 만족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렸다.
"선봉군은 산 아래로 내려갔소이다."
효선이 다가와 말하자 모야쿠는 머리를 끄덕였다.
"숙영지의 불빛을 보이지 말도록 하라."
"위장 진에만 밝혀 놓았소이다."
"금왕 이반은 간계를 즐겨 쓰는 자이다, 타타르는 제대로 칼 한번 휘두
르지 못하고 멸망되었다."
진막 안으로 들어선 모야쿠는 불도 밝히지 않아서 어두운 터라 조심스럽
게 발을 내디뎠다.
겨우 보료가 깔린 안쪽 자리에 닿은 그는 허리에 찬 장검만 풀어 위사에
게 건네 주었다.
"장군, 저녁을 준비해 오겠소이다."
시종 위사가 말했을 때 모야쿠가 지시했다.
"대장들에게 전해라, 우리는 전장에 나온 것이다, 군사들에게 오늘밤은
불을 피우지 말고 마른고기를 먹이도록 하라."
진 막의 문이 열리면서 마른 쇠고기 냄새가 맡아졌으므로 모야쿠는 감았
던 눈을 떴다. 보료에 기대어 깜박 졸았던 것이다. 이제는 눈이 어둠에 익
숙해져서 쟁반을 받쳐들고 다가오는 시종 위사 두 명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
였다.
"으음, 시장했다."
자리를 세우고 앉은 모야쿠는 시종이 앞에 내려놓는 쟁반을 보았다. 불을
피우지 말라고 영을 내렸으니 말린 쇠고기는 돌처럼 단단해서 씹는데 힘이
들 것이었다.
"술은 가져 왔느냐?"
고기를 술에 불려 먹을 생각으로 모야쿠가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어느새
시종 하나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으므로 모야쿠는 눈을 치켜 떴다.
"술은?"
다시 그렇게 말한 순간 모야쿠는 눈앞에 흰 것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칼이다. 놀란 그가 입을 딱 벌렸을 때 목에 선뜻한 충격과 함께 불로 지지
는 듯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이, 이놈들."
모야쿠는 악을 썼지만 이미 성대가 잘려진 터여서 벌린 입으로 소리가 나
오지 않았다. 목이 반 넘어 베어져 뒤로 훌떡 꺾어졌으나모야쿠는 아직 앉
아 있었다.
"대단한 놈이군."
모야쿠의 머리칼을 움켜 쥔 소노가 다시 단검을 내리쳐 목을 떼었다.
"의외로 쉽게 처치했구나, 모야쿠의 너무 조심스런 처신 덕분이지."
쓴웃음을 지은 소노가 피묻은 칼을 모야쿠의 몸통에다 닦더니 허리를 폈
다.
"불도 켜지 않아 줘서 말이야."
시종 위사 차림의 그들이 대장군의 진 막을 나왔을 때 밖에 서 있던 위사
가 힐끗 그들을 보았다.
"어? 언제 들어갔던 거야?"
짙은 어둠 속이어서 위사가 그들에게 다가와 섰다.
"그대들은 누군가?"
그 순간 소노가 칼을 날려 위사의 목을 쳤고 부하는 뒤에서 혹시나 터질
지 모르는 고함을 막으려고 손바닥으로 입을 덮었다.
"자, 이쪽으로."
소노는 침착하게 발을 떼었고 부하는 뒤를 따른다. 대장군의 진 막은 위
사들의 진 막에 에워 쌓여 있는 데다 사방이 트였다. 위사대가 진 막 주위
로 정연하게 둘러 서 있어서 그 어느 곳에도 사각이 없다. 그들이 서너 걸
음 더 걸었을 때였다. 진 막 오른쪽의 위사가 그들을 불렀다.
"그대들은 어느 조인가?"
몽골 말이 서툰 소노가 발을 멈추었고 이번에도 위사가 다가왔는데 세 명
이다.
"어디 조냐고 묻지 않나?"
위사가 목소리를 높였을 때였다.
"불이다! 적의 습격이다!"
아래쪽에서 고함소리가 울렸고 놀란 그들이 머리를 돌렸을 때 바로 50보
쯤 아래쪽 진 막에서 불길이 오르면서 허둥대는 군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앗! 이놈들!"
이번의 고함소리는 소노를 검문했던 위사들이 지른 것이었다. 그들이 불
길로 시선을 돌렸을 때 소노와 부하는 어느 틈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상한 놈이 이곳에도 있다!"
위사 대장이 뛰어왔고 일대는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갔는데 불길이 크게
번지는 바람에 이쪽도 환해졌다.
"어디에 있느냐?"
위사 대장이 소리쳤을 때 대장군의 진 막 앞에서 놀란 외침이 들렸다.
"경비 군관이 죽었다!"
그러자 침착했던 위사 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리에 찬 칼을 빼 든
대장은 갑옷자락을 펄럭이며 미친 듯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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