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세상의 모든 길은 이야기가 있어야 흥미롭게 여행을 할 수 있다.
아무리 자연 경관이 수려할 지라도 거기에 숨어 있는, 즉 그 속에서 살아온 옛 사람들의 애환이 섞여
있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면 그 여행은 사막의 여행이요 북극 설원의 여행일 뿐이다.
보령 앞바다에 떠 있는 섬들은 조선시대에는 홍주(洪城)의 관할 하에 있었다. 서해를 통한 조운선의
경로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안면도 부근의 섬들은 해미읍성을 중심으로 오천현의 충청수영성과
함께 국가적인 중요한 요충지로서 관할권이 보령현과는 달리 하였다. 일제강점기 보령과 남포,
그리고 오천현이 보령군으로 통합이 되면서 그제서야 보령의 관할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삽시도는 당집이 옛당산(낡은 당산)에 있었는데 1907년 경 홍주를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녹도로
쫒겨가자 토벌군들이 들어와 당산을 불질렀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마을 뒷산에 신당을
세웠는데 많은 광천사람들이 기부를 하였다고 한다. 이는 광천사람들과 삽시도 사람들 사이에는
어물을 팔고 사는 주객간으로 밀접하게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당집을 짓는데도 힘을 보탯다고 본다.
당집은 여자당이라 여자옷 2벌이 걸려있고, 작은 말 같은 조각품이 대여섯개 놓여 있었다고 한다.
(보령문화원 삽시도 답사자료 참조. 2019.07.29)
삽시도의 오천초등학교 분교에 들어서면 교문 옆 왼쪽으로 조그만 공덕비 한기가 서있다.
'박주사 영삼씨 장학기념비(朴主事 英三氏 奬學紀念碑)' 라고 쓰여 있다. 한국전쟁 당시 당진경찰서에
근무하던 박주사의 사위가 당진경찰서의 경찰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피난을 왔었다고 한다. 이에 안면도의
공산주의자들이 삽시도에 들어와 경찰들과 박영삼씨를 체포하고 섬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경찰들과
주민들은 술수를 써서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죽이고 외연도로 도피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박영삼씨는 이 섬의 유지이면서 섬 안의 지도자 역활을 하였던 것 같다. 장학기념비는 학교를
유치하는데 터를 기부한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이다.
삽시도에는 염전터와 논밭이 일부 술등에 있는데 작은 소류지가 한 곳에 있어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술등의 해변에는 박영삼씨가 살았던 옛집이 덤불 속에 누워있듯 스러져가고 있으며, 그 옆 느티나무
아래로 그의 공덕비와 미륵불 같은 돌이 엇비슷하게 세워져 있다.
'박주사영삼공기념비(朴主事英三公紀念碑)'에는 섬을 위해 일신하고, 마을을 위해 헌신하였다는 등의
공적을 기록을 남기며 비의 갓에는 세월에 의한 흔적들이 시커맣게 덕지져 있었다.
그 옆에 세워진 돌은 사암(沙巖)으로 언뜻 인간의 힘에 의한 조각이 이루어진 듯하다. 팔부분의 소매가
있는 듯하고 위로는 얼굴의 형상이 마모 되거나 떨어져 나간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미륵불 같은 돌은
옛날 어느 어른이 납작섬에서 겨드랑이에 끼고 헤엄쳐서 가져 왔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이 미륵불은
박영삼씨 집에 간이학교를 운영했을 때 간이학교 교문으로 쓰이다가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내륙쪽을 향한 술등의 바닷가는 비교적 바람이 적어 마을을 형성하기에 적당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섬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에 학교도 세워지고 관공서도 자리를 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 쓰러져 가는 스레이트 지붕이 애처롭기만 하다. 덤불을 헤치며 집안으로 들어가 보려
했지만 대문이 무너져 내려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간이학교자리는 흔적이 없고, 다만 양조장으로
쓰였던 창고 같은 건물만이 안으로 들어 가볼 수 있었다. 상랑보를 보니 단기4289년으로 쓰여 있으니
1956년에 건립한 건물이다. 다음에 이곳을 방문하면 이 상랑보 마져 볼 수 없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술뚱'. 이지역의 동네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표현이다.
술뚱은 원산도를 향해 육지쪽으로 펼쳐진 해안의 사구 언덕으로 형성 된 마을이다.
문화원장의 입을 빌리면 '술'은 가장자리를 말하는 고어로 입술, 눈시울 등으로 나타나는 낱말이며,
'등'은 몸체의 등허리를 나타나는 낱말의 합성어로 보고 있었다.
'뚱'으로 표현 되는 낱말이 언덕, 둔덕을 나타내는 데 '둔'에서 나온 말임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면 '순음은 입시울 가비야븐 소리'라는 표현이 있기에 '술'의 고어가 '시울'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울이 그대로 살아있는 낱말은 눈시울에서 볼 수있겠다. 입술은 입의 가장자리,
눈시울은 눈의 가장자리, 즉 눈가를 말하듯이 '술'이 옛말에서 흘러 들어 왔다면, 등의 가장자리라고
하였다면 '등술'로 쓰였어야 타당하지 않을까?
'술'의 'ㅅ'은 옛 반치음이 분명하다. 반치음은 'ㅅ'과, 'ㅇ'으로 변하여 '술' 또는 '울'로 표기되었다.
만약 '울'에서 왔다면 '울(鬱,亐)'에서 온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 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