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다시 읽어보고 교정하지 못했습니다. 오역 및 오타 많은 양해 바랍니다.
다니엘 코미에가 접이식 철제의자에 푹 주저앉습니다. 그는 뒤로 머리를 젖히고, 그의 코에선 피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컷맨은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큐팁을 그의 왼쪽 코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바로 전 코미에는 아메리칸 킥복싱 아카데미 케이지 안에 있었습니다. 거의 300파운드의 슈퍼헤비급 상대와 3라운드를 마친 후, 코미에는 매우 작은 미들급과 스파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의 스파링 파트너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가장 불만스러웠습니다.
그가 한쪽으로 움직이면 미들급 선수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고, 결과는 코미에가 바닥을 자신의 피로 물들이며 끝났습니다.
코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먼 길을 지나 여기에 왔습니다. 부상을 입는다면 정말 가슴이 메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루이지애나 라피엣 출신으로 오클라호마 주 대학과 US 올림픽팀을 거쳐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존 존스를 상대로 UFC 라이트헤비급 타이틀전을 치르려 합니다.
이것은 비극과 심적 고통으로 가득 찬 그의 여행의 정점입니다.
다니엘 코미에와 사촌 P.J
2003년 6월 14일 코이메와 그의 친구인 모하메드 로왈(킹모), 그리고 자밀 캘리는 코이에의 집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닭을 굽고 있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월드 레슬링 팀 트라이얼 일주일 전이었고 그의 삶은 이보다 좋을 순 없었습니다.
이때 셋 모두 국제대회 레벨에서 레슬링을 하고 있었고, 코미에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레슬러 중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연인인 로빈과 막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오클라호마 주립대학 시절 연인인 케롤린 플라워 사이에 3월에 새로 태어난 케이든이란 딸이 있었습니다.
바베큐를 하는 동안 코미에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텍사스 고속도로 경찰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플라워의 자동차의 에어컨디션은 작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케이든을 카싯을 친구의 차로 옮겨 달은 후 케이든을 그곳에 태우고 자신은 그 차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18개의 바퀴를 단 트럭이 케이든이 탄 차를 뒤에서 덮쳤습니다.
케이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의 3개월 된 아름다운 딸을 먼지로 자욱한 텍사스 고속도로에서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코미에는 전화를 끊고, 어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창문에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검은 커튼을 달고 낮도 밤처럼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는 레슬링 연습 이외에는 집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습에서 그는 화가 치솟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팀동료를 물어버리고 그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는 케이든의 죽음 일주일 후, 월드 팀 트라이얼을 그만두고 맙니다.
그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고 레슬링은 더더욱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 이렇게 잘못도 없는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녀는 인생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어요. 너무 불공평해 보여요.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일어난 일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게 인생인 거죠.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데로 일어나지는 않죠. 난 정말 미친 듯이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저는 이 공황에서 절대 헤어나올 수 없을 거라 느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내 인생이 영원히 머물 것 같았습니다." 라고 다니엘 코미에는 그 당시를 회상합니다.
사고 후 한 달 정도 후에 오클라호마 주립대학 레슬링팀의 전설적인 해드코치인 존 스미스는 코미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네가 지금 이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네가 딸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돌아와서 레슬링을 해야 한다. 이 스포츠는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이 스포츠가 너의 이 어두운 시간을 벗어나도록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네가 돌아와야 한다."
코미에와 그의 가족
케이든의 죽음이 다니엘이 겪은 첫 번째 비극은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 그의 어머니와 이혼한 그의 아버지는 그가 7살 때 살해를 당합니다.
추수감사절에 전화가 왔을 때, 코미에는 마조리 숙모 집에 있었습니다. 모든 가족이 모여서 TV에서 "컬러 퍼플"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지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다니엘이 그의 아버지에 관한 다른 기억들처럼 이 일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매우 어둡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새로운 가족들과 파티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언쟁이 있었고, 그의 새로운 장인이 싸움이 격해지자 총을 쏘아 다니엘의 아버지는 죽게 됩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죽음에 관한 첫 경험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너무 놀기에 바빠서 누군가 죽었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도 없죠. 저는 제가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살해 당한 지 일 년 후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너무 심하게 운 나머지 무자비한 두통으로 며칠 간 어두운 침실에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시절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단 하나뿐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내 기억이 그냥 희미해진 건지 아님 제가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서인지는 확실하지 않네요. 그 하나의 기억이 뭔지 아세요? 제가 소년 시절, 아버지는 배달 트럭을 모셨죠. 하루는 우리가 트럭야드에 있었고, 아버지가 트럭을 청소하고 계시는 동안 우리는 모여 않아서 여행이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게 제가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입니다. 내가 왜 그 기억들을 다 잊었는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을 하는 코미에
코미에가 10살이었던 어느 날 그는 그의 사촌 P.J.와 동네 길거리에서 풋볼을 하다가 둘은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곳을 지나던 지역 고등학교 레슬링부 코치가 이들의 싸움을 말렸습니다.
"그는 우리가 길거리에서 싸우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코미에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코치는 코미에의 삶을 영원히 바꿀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가 레슬링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어요."
다음날, 코미에는 어린이 팀, 주니어 바이킹스의 레슬링 훈련에 참여했습니다. 유일한 문제요? 코미에는 그가 하게 될 레슬링이 어떤 종류의 레슬링인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프로레슬링 같은 걸 할거라 생각했어요." 코미에는 웃으며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으로 갔고, 그들은 진짜 우리를 반쯤 죽여놨죠. 저는 '이런, 이건 내가 할만한 게 아니야.'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는 계속 레슬링을 했고, 점점 나아졌습니다. 레슬링을 시작한 첫 해의 반이 지났을 때, 그는 스테이트 파이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신입생 때 대표팀에 들었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난 팀에서 쫓겨났어요"
이게 그가 팀에서 내쳐진 마지막이 아니다. 두 번째는 그가 2학년 때 코미에가 친구와 함께 둘의 성공적인 레슬링을 축하하고자 팀 버스 안에서 연막탄을 터트렸을 때였습니다. 그는 팀에서 쫓겨났고 매일 오후마다 레슬링팀 동료들이 훈련하는 레슬링 룸을 허망하게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코치가 결국 기분을 풀고 코미에에게 다시 팀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는 데는 몇 주가 걸렸습니다. 그는 매 연습이 끝나면 매트를 닦아야 했고, 별도의 지구력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너무 간단히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연막탄은 코미에를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과 아테네, 그리고 UFC로 이끌었고, 만일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된다면, 그는 1월 3일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를 것입니다.
코미에는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에 절대 갈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고등학교 성적이 너무 나빴기 때문에 그는 콜비 커뮤니티 컬리지에 입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가 가장 가고 싶어하는 오클라호마 대학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코미에의 결정을 도운 것은 스틸워터나 오클라호마 주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코치 스미스였습니다.
스미스는 레슬러들이 오클라호마 주 대학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만일 그가 그렇게 해준다면 그들은 그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스카우터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스미스에게 놀랐지만, 그에게 흥미를 느끼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코미에에게 오클라호마 주 대학으로 와야 한다고 말한 후에 아무 언급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코미에게 카우보이(오클라호마 주 대학교 마스코트)가 될 정도로 잘한다고 요점만을 말한 후, 더 이상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겁니다.
오던지 말든지 둘 중의 하나. 바로 이게 스미스의 태도였습니다.
코미에는 스미스와 오클라호마 주 대학을 믿고 그곳으로 가기로 맘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단 카우보이의 레슬링 룸으로 들어간 후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레슬링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연습 후에 코치들은 팀을 3마일씩 뛰게 했습니다. 코미에는 자주 길가 옆으로 걸으며 뒤따라오는 차에 올라타야 했습니다. 그는 3마일을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코미에는 레슬러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Embrace the Grind"라는 표어인데 이것은 나중에 코미에의 마케팅에 사용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침 별도로 운동을 했고, 그는 경기에서 이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대학 레슬링 가장 위대한 케일 샌더슨을 상대하게 됩니다.
그는 샌더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샌더슨을 이기지 못하니까요.(샌더슨은 당시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학 동료들 사이에서 높은 순위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이 그가 최고가 되지 못한 고통을 더는 데는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전 대통령 조지 H.W. 부시를 만나고 있는 코미에
그의 딸의 사망 한 달 뒤인, 7월 5일 코미에는 다시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로왈(킹모), 캘리, 케빈 잭슨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그와 함께했습니다. 그의 새로운 부인 로빈은 하늘이 보낸 선물이었습니다.
사고 두 달 후, 그는 국가대표 레슬링팀에 들어가기 위해 놀스 다코다의 팔고에 갑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커리어 사상 가장 힘든 상대 중 하나였던 댄 모리슨을 만납니다. 모리슨은 세 번의 경기 중 첫 번째 경기에서 그를 클린치하여 자신의 뒤로 던져버렸습니다.
그 경기 후, 스미스 코치와 케니 먼데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우보이를 불러내서 일을 끝내야 해"라고 스미스가 말했습니다.
두 번째 경기에서, 코미에는 모리슨을 던진 후 핀승을 거둡니다.(레슬링에서 상대의 양 어깨 뒤쪽을 매트에 2초 동안 눌러 놓으면 승리합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경기가 누가 뉴욕시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는 2003년 세계 대회에 참가하게 될지 결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리슨이 재빠르게 2대 0으로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카우보이를 불러내라고 말했잖아." 라운드 사이에 스미스가 코미에에게 말했습니다. "나가서 니 팔이 올라가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마."
"그리고 그게 정확히 제가 한 일이죠." 코미에가 말했습니다. 그는 모리슨을 이기고 세계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합니다. "그때부터 2003년에서 2008년까지 국가대표팀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모든 미국 레슬러 중에, 오직 7명만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중 한 명이었죠."
코미에는 2004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합니다. 그는 가장 높은 레벨의 스포츠에서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경험과 느낌을 알게 됩니다. 그는 준결승전까지 올라가지만, 러시안 카지머드 갓살로프에게 패합니다. 그리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전 세계 챔피언 알리 리자 헤이다리에게 지고 맙니다.
"제 모든 레슬링 커리어 동안, 저는 저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진 거예요.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상대가 나보다 뛰어나면 뛰어난 거지요.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갓살로프는 저보다 뛰어났습니다. 샌더슨도 그랬고, 헤이다리도 저보다 뛰어났습니다. 이 친구들은 저보다 뛰어났어요. 그들이 더 잘하기 때문에 제가 그들에게 진 거지요. 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최고가 아니었고, 그게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2006년 초, 코미에는 그의 체중관리에 문제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인디펜스 컵에 참가하지만, 체중을 맞출 수 없어서 경기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 년도에 그는 그의 평체인 96kg(211.5파운드) 체급인 헤비급에서 경기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전조였습니다.
코미에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미국 주장으로 참가했는데 메달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습니다. 금메달도 가능했습니다. 레슬링 전문가이자 역사가인 마이크 리오단은 중국에서 코미에의 메달 가능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말합니다.
"가장 슬픈 부분은 코미에가 그 체급에서 누구도 이길 수 있었다는 겁니다. 코미에는 은메달리스트인 카즈스탄의 타이므라즈 치지브를 이겼었고, 동메달리스트인 케텍 가즈무브도 2005년 야르긴에서 이겼었죠. 더군다나 96kg의 왕 갓슬로프는 부상으로 베이징에 참가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코미에는 그가 레슬링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지 알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2008년 8월 20일, 그는 다음 날 경기를 위해 감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표 체중까지 줄였지만 몇 시간 후 그의 신장이 활동을 멈춰버렸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몸속으로 수분을 주입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USA 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코미에는 올림픽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의 올림픽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보다 더 뛰어난 상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몸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그는 선수 생활을 끝내고 다른 할 일을 찾았을 겁니다. 아마 진짜 직장을 찾아 나섰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금메달을 따지 못했고, 항상 그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경쟁 욕구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찾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코미에가 2014년에 살리나 델리온에게 청혼을 하고 있다.
2001년 전 대학 레슬링 선수인 드웨인 진킨은 밥 쿡과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를 설립합니다. 밥 쿡은 전 MMA 베테랑으로 "크레이지"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AKA 체육관에서 훈련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4시간이나 걸려 운전을 하며 다닌대서 얻은 별명이었습니다. 진킨 엔터테이먼트는 곧 하비아 맨데즈가 시작한 아메리칸 킥복싱 아카데미(AKA)에 깊은 뿌리를 둔 강력한 회사가 되었습니다.
진킨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에서의 코미에의 커리어에 관심이 많았고, 그는 코미에의 레슬링 스타일이 MMA로 전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신의 레슬링 커리어가 끝나면 저에게 연락 주세요." 진킨은 2002년 코미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코미에는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따는 꿈이 있었습니다.
진킨과의 첫 대화를 한 지 6년 후에, 코미에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의 레슬링 커리어는 베이징 올림픽 후에 끝났습니다. 그는 264파운드까지 몸무게가 불었고 다시 몸을 만들 준비가 되었습니다.
코미에는 진킨에게 전화를 해서 싸우고 싶다고 말했고 AKA에 합류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체육관에 들어온 지 이틀이 되던 날에, 코미에는 최고의 유망주 케인 벨라스케즈를 상대로 레슬링을 해야만 했습니다. 코미에는 벨라스케즈보다 더 높은 레벨의 레슬링 경지에 올랐지만, 몸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그가 헤비급 챔피언이 되기 오래전부터, 벨라스케즈는 이미 그의 심폐지구력으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주짓수 수업 이후에 오랜 레슬링 세션 후에, 코미에에게 탈수증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몸은 경련을 일으켰고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진킨과 쿡은 코미에가 이미 병실에 배치된 후에 도착했습니다.
코미에와 델리온 사이에는 두 명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들은 코미에의 옷을 벗기고 환자복을 입혔습니다. 제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코미에는 누워서 IV를 맞고 있었죠. 그의 배는 침대에 부착된 테이블 위에 놓인 어느 것보다 높이 치솟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엉덩이는 병원 밑으로 축 내려앉아 있었죠. 그리고 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우리는 정말 갈 길이 멀구나." 라고 쿡은 그때를 회상합니다.
코미에의 몸은 엉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를 최고 수준의 레슬링 경쟁으로 밀어 넣던 것과 같은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는 정신력을 보여줬어요. 그는 이미 파이터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쿡이 말했습니다.
탈수 사건이 있은 지 하루 이틀 후에, 쿡은 스트라이크 포스 소유주이자 프로모터인 스캇 코거엑 전화를 겁니다. 코커는 스틸워터에서대회를 준비 중이었고, 그는 코미에를 카드에 넣기를 원했습니다.
"병원에서 들것에 실려 있던 한 달 후, 그는 다시 트레이닝을 시작했어요. 그의 첫 경기는 텔레비젼에 나왔습니다. 그는 짧은 파이트 캠프를 가졌죠. 그리고 그가 첫 훈련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우리는 스트라이크 포스에서 중계되는 그의 첫 경기가 열리는 케이지에 그를 밀어 넣은 겁니다. " 코크가 말했습니다.
코크가 코미에와 함께 코미에의 첫 경기를 위해 케이지에 들어가는 도중 코미에는 멈춰 서서 그의 새로운 코치를 돌아보았습니다.
"밥, 걱정 말아요. 난 경기에 타고난 사람이에요."라고 코미에가 말했습니다.
그는 한 달의 훈련에 아마추어 전적도 전무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2009년 9월 25일 그날 밤, 코미에는 게리 프레이지어를 2라운드 TKO로 누르고 그의 첫 프로 경기에서 승리를 얻어 냅니다.
오늘날 AKA는 창단 멤버들이 모여있던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5년 전 AKA를 방문했다면, 아마 당신은 새 시설을 갖추며 들어 온 사람들 대부분을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존 피치와 조쉬 코스첵,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때 AKA의 무시무시한 선수층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요즘은 세 명의 아주 뛰어난 프로 선수들인 코미에와, 케인 벨라스케즈, 그리고 루크 락홀드를 중심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들의 거대한 포스터들이 여러분을 딱하니 쳐다보고 있을 겁니다.
"우리의 가드는 DC, 케인, 그리고 루크로 바뀌었습니다."라고 맨데즈가 말합니다.
모두가 AKA의 위대한 파이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AKA는 가족들을 위한 체육관입니다. 레슬링 수업, 주짓수그리고 컨디셔닝 수업. 이 모든 것이 자식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다시 그들 수업이 끝나면 데리고 오는 직장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가족 전체가 와서 스무디를 마시면서 로스터에 있는 프로 선수들과도 교류를 합니다.
코미에는 하루에 세 번 훈련을 합니다. 다른 프로 선수들이 정오 혹은 그 이후까지 잠을 자지만, 코미어는 보통 아침 6시, 7시면 문을 나섭니다. 그는 그의 첫 번째 훈련을 위해 차가 막히는 산타 클라라를 운전해 갑니다. 보통 그의 첫 훈련은 근력과 컨디셔닝 훈련인데 그 이후에 그는 더 막힌 교통체증을 뚫고 집으로 갑니다. 그는 몇 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12시부터 2시까지 있을 그의 두 번째 훈련을 위해 AKA로 향합니다.
그 이후 그는 집으로 와서 음식을 섭취하고 휴식을 취하고, 그의 약혼녀 살리나 델리온과 그의 두 자녀들과 시간을 보냅니다. 그는 몇 년 전 AKA에서 훈련을 시작할 당시 진킨의 집에 머물렀을 때 살리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저와 사진을 함께 찍어주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코미에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델리온은 그의 의도를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난 그게 좀 느끼하고 이상했어요. 난 그가 왜 나와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러자고 했지요. 그는 그의 친구 중 한 명에게 우리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어요. 아마 첫눈에 반한 사랑이였나보죠?"라고 델리온이 말했습니다.
코미에가 델리온과 잠깐 짧게 얘기를 나눈 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는 그녀의 직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그녀는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 그들은 항상 붙어 다녔습니다. 지난 6월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아내가 되어달라고 청혼했습니다. 그들은 존스와의 경기 후에 결혼할 계획입니다.
그 동안 그녀는 코미에의 스케줄에 맞추어 가족들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코미에가 매일 밤 돌아왔을 때 아이들이 깨어 있게 합니다. 라스베거스에서 경기가 있는 주에는 그녀는 그가 정신적으로 준비가 될 수 있게 거리를 둘 것입니다. 같은 MGM 호텔 안에서도 다른 방을 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필요하면 그녀는 언제든 그를 보러 올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녀는 이 일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전 한 때 훈련 캠프를 무서워 한 적이 있어요. 전 제 자신을 잘 추스려야만 했죠. 저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신적으로 준비를 해야만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우리가 꿈꾸던 그 모든 기회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코미에의 레슬링팀
저녁 5시 반까지 코미에는 AKA로 돌아가 그의 어린이 레슬링팀을 가르칩니다.
4살에서 11살까지의 지역 아이들로 구성된 팀을 가르치는 코미에에게 코칭이란 그가 스포츠에서 받은 그 많은 것들을 다시 나누어 주는 방법입니다.
그는 AKA 레슬링 룸에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코미에 레슬링" 로고가 벽에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벽과 그라운드의 매트밖에 없는 스파르탄입니다. 이 룸은 락커룸에서 냄새가 나는 것과 같이 냄새가 고약합니다. 이것이 바로 눈물과 고된 훈련의 냄새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어느 날 밤, 코미에가 룸의 구석에 서 있었습니다. 룸은 파이팅 운동바지, 티셔츠, 그리고 레슬링 부츠를 걸친 아이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샤크 탱크"라는 것을 할 예정이었는데, 이것은 아이들에게 지옥을 묘사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방의 양 반대 방향 끝에 아이들이 두 개의 원을 만듭니다. 원 한쪽의 중앙에는 한 아이가 서 있습니다. 그가 레슬링을 시작한 지 1년 정도 되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아마 그를 프로 선수로 봤을 것입니다. 그는 레슬러가 가지고 있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드기어와 신발 그리고 굽은 다리들 말입니다. 그가 만두 귀가 될 때를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는 뚜렷한 근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여섯 살입니다.
다른 원의 중앙에는 코미에 클래스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11살이고 주 챔피언입니다.
그들은 서로 누르고 던지며, 으르렁거리며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몇 분 후에, 혼이 울립니다. 원 밖에 잇던 아이들은 다시 돌아가고, 그의 자리는 밖에 있던 다른 아이가 차지합니다.
중앙에 있는 작은 레슬러들은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샤크 탱크의 룰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몇 분에 걸쳐 라운드 중간에 휴식 없이 여러 명의 상대와 연속해서 레슬링을 해야 합니다.
여섯 살 댄 게이블은 테이크다운에서 바로 일어나 바로 그의 무릎을 움켜잡습니다. 그는 울음을 참으려고 시도하지만, 고작 6살인 그는 실패하고 맙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떨구고 맙니다. 코미에는 전투적인 목소리에서 동정 섞인 목소리로 바꾸어 미니-게일이 괜찮은지 확인합니다.
몇 분 후(약간의 눈물 후에) 미니-게이블은 다시 무리 사이로 돌아가서 다음 상대를 위해 준비합니다. 코미에는 다시 소리 치기 시작합니다.
혼이 다시 울립니다.
레슬링 클래스가 끝나면 코미에는 AKA 라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그의 마지막 훈련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전략 세션으로 코미에, 맨데스 그리고 쿡이 모여 1월 3일 존 존스를 이길 작전을 세웁니다.
존스는 아마도 우리가 이제까지 본 최고의 MMA 선수일 것입니다. 그의 신체적 장점을 넘어서서 - 그의 긴 리치와 같은 신체적 특징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는 이 스포츠에 가장 영리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상대방을 연구하는 데 끊임없는 시간을 투자합니다. 각 경기 전, 존스와 그의 코치들은 상대 선수의 "플레이 북"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거기에는 상대 선수의 약점들, 강점들, 그리고 정신적으로 부주의한 점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경기에서 물고 늘어질 수 있는 허점을 찾아, 그의 끊임없는 창조력으로 상대방을 부수며 자신의 경기로 이끌어 갑니다. 그는 스포츠 역사상 가장 훌륭한 라이트헤비급 선수들을 모두 말도 안 되게 압도해왔습니다.
누가 료토 마치다를 쵸크로 보내 버리고 그의 얼굴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걸어나갈 때 존스의 표정을 잊을 수 있을까요?
이건 경기를 얼마 앞두지 않은 상태에서 조금 언더독인 코미에에게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힘든 싸움입니다. 하지만 쿡은 존스의 커리어에서도 이 경기는 가장 힘든 테스트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놀랄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 우리는 힘든 경기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니엘이 이 싸움을 아주 쉽게 이긴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 다니엘은 그의 모든 상대를 쉬운 상대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타고난 재주가 있습니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이긴 듯 이겨버립니다. "
진킨이 옆에서 이렇게 거듭니다. "두 무패의 파이터라고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코미에는 단 한 라운드도 빼앗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코미에는 양쪽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존과 제가 이룬 한 가지는 우리는 터프한 상대를 아주 별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버렸다는 거지요. 그래서 매 경기마다 그렇게 만든 두 선수가 나와서 붙는다면, 누가 이번에도 그렇게 하며 상대에게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지 보는 건 아주 흥미로운 일일 겁니다. 누가 상대방이 불편한 영역에서 싸우게 만들 수 있는지 보는 건 흥미로울 겁니다.
저는 여태껏 제가 할 필요가 없어서 하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더 강하게 몰아부쳐야 할 겁니다. 제가 들어가서 그를 완전히 제압하며 매 라운드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구요? 네 그렇습니다. 100% 그렇습니다. 제가 만일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제가 이길 수 있고 상대도 안 되는 경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힘들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걸 이루어내고 나면 분당 몇백 번씩 요동치는 심장을 가지고 그곳에 있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 경기는 그 어느 것보다 코미에가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의미합니다.
그는 미국 최고의 레슬러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레슬링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레벨에서 나라를 대표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최고라고 증명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뭔가 부족했습니다.
"전 아직 어느 것에서도 세계 최고가 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언가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35살이에요. 저에겐 아마 제가 무언가에 최고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많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제 꼬리가 잘려나갈 정도로 열심히 훈련해왔습니다."
그래서 코미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일 레슬링 클래스를 가르치고, FOX TV 일을 소화하고 그의 가족을 보살피며 죽어라 열심히 삽니다.
이건 그가 1월 3일 보상 받길 원하는 계획의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타고난 실력의 상대와 맞서야 하는 어려움에 관해서도 신선할 정도로 정직합니다.
"저는 제가 존 존스를 이길 것이 100% 확실하다고 말하진 못합니다. 저는 제가 이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모든 것을 겪어온 후에도 파이트 비지니스에는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일 그를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왜냐하면 전 제가 이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저는 무엇을 빼먹은 적도 없고 병가를 쓴 적도 없습니다.
저는 세계 최고의 P4P 선수를 이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했습니다. 만일 그게 실현되지 않는다 해도 그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출처: 블리쳐리포트(By Jeremy Bo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