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8. 큐티
히브리서 11:11 ~ 16
믿음의 선진 – 사라, 본향을 찾아 나선 사람들
관찰 :
1) 사라의 믿음
- 11절a. “믿음으로” => 히브리서 11장은 확실히 믿음 장이다. 믿음으로 살아간 선진들의 믿음을 이렇듯 간단명료하게 요약하여 정리해 주는 것이 대단하다. 또 하나같이 믿음으로 살아간 생애들이기 때문에 복되고 놀라운 인생이 아닐 수 없다.
- 11절b.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 사라는 생리가 끊어져서 난자의 생산이 끝난 상황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자녀를 낳는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 11절c.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과 합방을 할 때, 아이를 갖고자하는 열망으로 합방을 했다는 것이다. 생리도 끊기고 더 이상의 잉태할 수 있는 소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가 ‘이삭’이 될 것이라는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자녀를 갖고자 남편과 합방을 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약속하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자신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사라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 여기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을 아브라함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살에 아들 이삭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생산했고, 사라의 죽음 이후에 그두라는 후처로 얻어서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등의 서자들을 낳았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와 방불하다는 의미의 생산이 끊어진 사람을 아브라함으로 보는 견해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이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사라를 명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 앞의 사라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문맥의 흐름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는 부분이 된다. 즉 사라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 또 영적인 의미의 믿음의 자손들이 그렇게 많이 생산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인 사라의 믿음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남편 아브라함이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서 날마다 함께 자고 합방을 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의 자손을 생산할 수 있었다. 마치 선악과가 먹는 문제로 인생의 삶 속에 기본적으로 깊숙이 붙어있었던 것과 같이 부부가 합방을 하는 일상의 삶 속에서 믿음을 동원한 사라의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렇기에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것 역시 자신의 정욕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되어야 함을 알게 된다. 반드시 자녀 생산을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절과 거룩을 드러내는 통로로서 한 남편이 한 아내와만 부부관계를 갖는 것 역시 믿음이 행위로 드러내야 하는 행위이다.
2) 본향을 사모하는 디아스포라적 믿음
- 13절a.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믿음의 자손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다가 죽었다.
- 13절b.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 이차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
- 13절c.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디아스포라가 되어 살아간 인생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심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본질이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신 것이다.
- 14절. “이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그렇게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게 하신 이유는 믿음의 본질이 이 땅과 이 땅의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이 되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 15절.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믿음의 선진이자 족장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자신이 나온 곳을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삶을 살았다면 자신이 나온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로, 이삭과 야곱은 자신의 아내의 고향인 하란으로, 요셉은 아버지의 집이 되는 가나안 땅으로. 실제 요셉은 자신이 죽을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언약을 맺는다. 자신이 죽지만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반드시 나갈 것을 약속하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막벨라 굴에 장사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들이 살아 생전에 본향으로 가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또 그들은 얼마든지 자신들의 열망하던 본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16절에 나온다.
- 16절a.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여기서 ‘사모하니’라는 말은 ‘강탈하기 위해 손을 내뻗다’는 의미이다. 즉, 무엇을 얻기 위해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좇는다는 뜻이다. 이렇듯 족장들이 사모한 본향은 자신들이 나온 바로 그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모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들의 믿음은 이 땅에서의 것들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연해있고, 그들은 그러한 믿음을 발휘하며 살았던 것임을 히브리서 기자가 변증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더 많은 계시가 드러난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인생의 바라보는 본질로 삼아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 된다.
- 16절b. “그러므로” =>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면 이제 하나님 편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을 정리하게 되는 말씀이다.
- 16절c.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되심과 그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됨에 대하여 분명히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족장들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셨다. 그 결과 하나님은 한 성을 예비하시게 된다. 이 성이 이 땅에서는 예루살렘이지만, 더 나은 본향이 되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하늘의 성막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부끄러운 분이 아니시고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가르침 :
1)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과 장래를 믿고 바라봄과 후대에 그 믿음을 전수한 것임을 정리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디아스포라적 본질을 사라와 본향을 찾아나선 사람들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2) 사라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아내로 뒤에서 묻혀가는 존재가 아니다. 사라 자신의 죽은 것 같은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믿음의 자손을 낳을 것임을 믿고 남편과 합방을 하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도 사라와 더불어 합방을 할 때, 해봐야 자녀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녀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합방을 한 것이고, 그 믿음이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믿음의 자손들을 생육하게 된 것이다.
3) 사라를 포함하는 족장들의 믿음의 본질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흩어짐, 즉 디아스포라됨이며 이 믿음의 핵심은 이 땅의 본향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 신앙 공동체의 믿음의 핵심도 이 땅의 본향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4) 그렇게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한 성, 새 예루살렘 성을 예비하시게 되는 것이다. 또 그 새 예루살렘 성이 되는 하나님 나라는 나중에 죽어서야 가게 되고, 그 때에라야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바로 지금 이곳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일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차원의 일들이 된다.
적용 :
1)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부분을 믿어야 한다.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을 향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별스러운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 사람의 유익을 넘어서는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내가 소망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나는 믿음에 대해서 갈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사역을 하면서 인간의 한계에 갇혀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기대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신앙의 선진들의 믿음은 여러 가지로 나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을 바르게 가슴에 담아내야 할 것이다.
2) 결국 내가 소망해야 하는 것은 이 땅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나에게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삶이 아니라 그것과 비교되지 않는 더 나은 곳을 향하고 소망하게 하셨다. 이 땅의 것들에 자꾸 마음을 빼앗기는 미련한 존재가 되지 말자.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과 족히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