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루즈 로트렉(1864-1901)
작은 드가라고 불릴 만큼 드가와 비슷한 화풍을 보여준다. 로트렉은 물랑루즈와 같은 유흥가에서 지내면서 물랑루즈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 형식이나 내용에서 모두 파격적이었다. 회화나 혹은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그의 그림은 어쩌면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가문의 뿌리가 중세까지 뻗어 있는 귀족 가문이었고, 부모는 이종 사촌간이었으므로 근친혼에 의한 유전질환으로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어렸을 때 사고를 두 번이나 겪고, 다리에 골절이 일어나면서 다리가 자라지 못하여 난장이로 살았다. 허리 위로는 일반 남성과 다를 바 없었으나 키는 152cm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기형적인 몸 때문에 사람과 단절한 체 평생 동안 어느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유흥가를 떠돌며 창녀들의 몸을 훔쳐보거나 만져보았고, 때로는 쾌락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꽁꽁 닫힌 체 외로운 삶을 살았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아들의 불구가 자신 때문이라고 느끼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면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아들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로트렉도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한 번도 사랑을 고백해보지 못했다. 실제로 로트렉을 호의적으로 바라 본 여인들도 있었으나 그가 마음을 열지 않자 돌아선 여인도 많다고 한다. 그는 잠간 동안 화가 위트릴로의 어머니 수잔 발라동과 동거도 했으나 사랑은 아니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의 부모가 귀족이었으므로 로트렉은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늘상 친구들과 어울려 물랑루즈를 출입하면서 화려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카페와 카바레를 떠돌면서 그곳의 여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몸 때문에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래서 퇴폐적이고 거친 몽마르트의 삶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가 몽마르트의 창녀를 그렸지만 어떤 화가도 볼 수 없었던 시선으로 여인을 그렸다. 하층 여인들이 삶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물랑루즈에서 왈츠를 추고 있는 두 여인’은 물랑루즈에서 일하는 여인 같지는 않다. 삶을 즐기러 찾아온 파리의 상류사회 여인같다. 당시에 물랑루즈는 동성애가 공공연히 일어나던 곳이었다. 로트렉의 그림에도 동성애자가 나온다. 그런 부류의 여인인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은 외설이나 변태로 취급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어느 그림에도 동정이나 연민은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생생한 삶의 순간을 그려냈다. 덕분에 그의 그림에는 매춘과 무희의 춤 또한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들임을 말해준다.
로트렉은 말했다. ‘나는 인물에만 관심이 있다. 풍경은 부과물에 불과하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만이 있다. 고독했던 자신을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로트렉은 싸구려 잡지 ‘프랑스 소식’과 ‘삽화가 있는 파리’, 그리고 브리앙이 발간한 ‘르 마들리통’ 등에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과 데생을 종종 실었다. 1888년과 1890년에 ‘브뤼셀 살롱’에 프랑스 작가로 초대받아 전시되었다. 1890년에는 앙데팡당 전에 쇠라, 고호, 루소 등과 전시회를 가졌다. 그러나 로트렉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91년에 게재된 ‘물랑루즈 포스터’였다.
1900년에는 국제 전람회 포스터 부문 심사위원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동안 잠도 잘 자지 않고, 몸도 돌보지 않은 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삶의 쾌락도 즐겼다. 늘 술을 끼고 살았다. 그의 삶 만큼이나 성격도 메말라 갔다. 정신병원에 갇혀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결국 로트렉은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몸을 망쳐 서른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의 작은 진주로 불렀던 그의 어머니의 가슴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