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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전도여행 보고
행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행 14:19-28 /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에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이 그 도시 사람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쓰러뜨린 후 성밖으로 끌어다 버렸다.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20) 신도들은 마음을 졸이며 바울을 둘러쌌다. 그러나 바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성으로 들어갔다. [제1차 전도여행 완수] 이튿날이 되자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다. 21)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신도들을 얻은 후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거쳐 안디옥으로 되돌아왔다. 22) 두 사람은 들르는 도시마다 모든 신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어떠한 박해가 오더라도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23)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교회에 장로를 임명하고 그들을 위해서 금식기도를 드린 후에 그들이 믿음으로 의지하는 주께 장로들을 맡겼다. 24)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비시디아 지방을 거쳐 밤빌리아로 갔다. 25) 버가에서 다시 복음을 전한 후에 앗달리아로 내려갔다. 26) 그곳에서 배를 타고 그들은 드디어 안디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디옥은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받고 그들이 처음 길을 떠났던 곳이다. 27) 두 사람은 신도들을 모아 놓고 전도여행 보고를 하는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신앙의 문을 열어 주셨음을 알렸다. 28) 그리고 오랫동안 안디옥에서 신도들과 함께 지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로 가 복음을 전한 후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받는 박해(19-20a) 성도들은 나태해 지기도 하고 영적 잠을 자는 경우가 있으나 대적 마귀의 공격은 틈을 주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쫓아내는데 앞장섰는데 이제는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고 성 밖에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온 신이라고 여겨 제사를 드리자고 했던 무리들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짧은 시간에 감탄에서 격멸로 급격히 돌아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죽은 줄로 알고 버려진 바울을 보며 둘러섰을 때에, 그는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튿날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그 사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죽는 법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더베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오며 제자들을 굳게 함(20b-22) 돌에 맞았던 바울은 이튼날 바나바와 함게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며 제자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인내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환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할 때 이길 힘도 영광도 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을 세움(23-28) 바울은 각 교회에 장로를 택하여 세웠습니다. 금식 기도하며 장로들을 주께 위탁하고 약한 자들을 잘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파송을 받은 안디옥 교회에서 제 1차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 했습니다. 감격과 감사 그리고 찬양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오래 머뭅니다. 우리가 인생여정을 끝내고 드려야 할 보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적용: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고통과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를 통해 세상은 구원의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며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됩니다. 당신의 삶의 현장이 선교지가 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기 원합니다.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 에리카 라인. 이 책에서 저자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매길 때 우리는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지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전파를 제일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수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다시 일어서 복음을 전파하며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에게 핍박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삶의 장애물을 뛰어넘고 천국 소망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축복 안에 있는 함정은
사도행전 14:14-19 / 박지온 목사
본문을 보면, 축복 안에 실패와 고난과 어려움도 있는데, 이들을 모두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엄청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함정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받을 수 있는 엄청난 그릇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이 때에 언약을 확실히 붙잡아야 합니다. 축복이 크면 클수록 사단은 더 큰 함정을 파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98년도는 참으로 어려운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붙잡게 되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여러분들을 큰 그릇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엄청난 기회요, 섭리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경제적 타격 속에서도 우리 교회를 붙잡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도와 선교로 세계를 살릴 길 위에 세우셨음을 감사합니다. 99년도에는 더욱 힘있게 발을 내디뎌야 되겠습니다.
1. 축복에는 함정이 따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함정을 뛰어넘든지, 이겨내든지 하는 지혜와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배경에서 우상에 찌들린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나바를 "쓰스"라 하고, 바울은 "허메"라고 했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는 기적 속에서 사단의 함정이 나온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교만'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할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바나바에게 붙였던 "쓰스"라는 말은 그리스의 신들 중의 신인 제우스 신을 가리킵니다. 메시지를 전한 바울에게 붙였던 "허메"라는 말은 대변인이라는 말입니다. 즉, 루스드라 사람들이 훤칠하게 생겼을 바나바는 제우스 신으로 여겼고, 그 보다는 볼품없었지만 메시지를 전했을 바울은 제우스 신의 대변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신의 대변인으로 여겨진 바울도 신과 같이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 때에 바나바와 바울이 고개만 끄득였더라도 굉장한 추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러한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무리를 말려서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들에게 핍박이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죽이게 했습니다. 이것도 함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잡으면 이러한 것에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성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정말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 잡은 바울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셔서 다시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아팠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그리고나서 성에 들어가서 일으킨 자가 바로 평생 잊지못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입니다. 너무 견디기 힘든 순간에도 성령의 은혜로 그 모든 함정들을 느끈히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들의 상황을 보고 받고 장로님들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IMF를 통해 받은 충격과 고난도 모두 더 큰 축복의 그릇을 위해 준비하는 함정들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일으켜야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가난하기도 하고, 사고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기의 때에도 약속을 잡고 나가면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남미 사역 이후에 한국에 합숙을 받으러 나오려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신년도에는 일본, 미국 뿐만 아니라 남미에까지도 확장하여 세계적 살림을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알아들으실 줄로 믿습니다. 혹 목사님께서는 교회의 사정도 모르신다고 하실 분이 계실수도 있겠지만, 복음 전하다가 10억쯤 빚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복음을 받아야 할 갈급한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2. 함정을 뛰어넘든지 이겨내든지 해야 됩니다.
성경을 보니까 축복을 받았는데 이어서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함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시험에 들지말게 하옵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함정을 뛰어넘든지 이겨내든지 해야 됩니다.
1. 요셉은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축복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축복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님에게 축복권이 있고, 더 나아가 장로님에게도 축복권이 있습니다. 즉, 부모와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목사님이나 장로님들과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사이가 벌어지면 축복의 통로가 막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셉에게 당장 나온 것이 '가출'의 문제였습니다. 집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즉, 요셉의 가출은 축복하여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한 함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요셉의 가출은 요즘의 청소년들이 하는 가출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청소년들과는 달리 부모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습니다.(혹시 가출한 자녀들이 있습니까? 그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위해 끈기있게 기도하십시오. 그들은 세계 복음화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저도 한 때 가출을 하지 않았었더라면, 지금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진학 문제를 앞두고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가출을 했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이 강단에 서는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마음에 가출의 결단은 참으로 어려웠었습니다. 가출을 해서 큰형님 댁으로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축복을 받았으나 가출이라는 엄청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때에 창세기 37:1-11에서 받았던 가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의 인도를 계속 받았습니다. 그 축복의 인도 속에서도 노예로 팔리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이로 통해 요셉의 마음이 세계적인 마음으로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게도 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죄수들과 전옥들에게까지 가슴을 둘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함정들을 통해서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IMF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잡고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축복을 위한 준비들이었음을 확신합니다.
2. 신약에서는 초기의 사도들이 바리새파의 혹독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기까지 핍박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던 유대인들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즉, 핍박의 함정이 유대인들을 유대 안에서 유대 밖으로 밀어내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 여기에서 다락방이 왜 이단으로 결정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락방은 교회론에서 이단의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즉, 너무 전도가 안되니까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다락방이 교권 속에서 나와서 하나로 뭉쳐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권 밖의 현장이 너무 급박하다보니까 교권 안의 현장인 기관이나 주일학교나 구역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 교회와 현장 교회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니까 이단으로 결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전도해야 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이 땅의 교회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축복을 받아서 세계 복음화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강조해야 합니다. 새끼를 낳지 못하는 1,000마리의 양보다 새끼를 낳는 두 마리의 양이 더 귀합니다. 1,000마리의 양은 계속 줄어들 것이나, 새끼를 낳는 두 마리의 양은 계속해서 새끼를 낳아 1,000마리가 되고, 2,000마리가 되고,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성장 원리입니다.)
3. 세계를 살리기 위하여
물질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세계를 살리는데 쓰임받기 때문에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건강, 재물, 일꾼을 주십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요셉은 약속을 받자마자 즉, 축복을 받자마자 계속해서 엄청난 함정이 따랐으나 그 함정에서 연단되어 세계를 살리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복음이 유대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외국으로 수출할줄 모르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잘 아시고, 복음을 받은 유대인들을 핍박 속에 몰아넣어서 견디다 못해 밖으로 달아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운 것이 안디옥 교회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안디옥 교회의 후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을 잡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지혜, 지식, 일꾼, 힘, 건강을 다 부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정주영씨의 글을 좀 읽게 되었습니다. 글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도 가출을 여러 번 했었는데, 세 번째까지는 아버지에게 붙잡혔으나 네 번째는 드디어 성공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산골에서 열심히 일하시지만 늘 식량난을 겪어야만 했던 곳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그러한 어려움 속에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철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정말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는 사상을 통해 오늘이 있게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사상만 있어도 엄청난 부자가 되었는데,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사상이 들어가고, 어려서부터 이 언약을 잡게되면 세계의 재벌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없습니다. '십일조만 가지고도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십의 구조는 주님을 위해 쓰게 하옵소서.' 이러한 고백이 양심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바울은 장막을 지으며 돌아다녔습니다. 그것에서 엄청난 재정이 나왔습니다. 전 세계를 위한 언약을 잡고 나갈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정주영씨의 글에 '빈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빈대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다가 판을 깔고 자니까 하루 이틀은 괜찮았는데 삼일째가 되자 또 빈대가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야에 물을 받아서 침대 다리마다에 받쳐놓자 빈대가 달려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다시 빈대에게 시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을 켜고 확인을 해보니 벽을 타고 천장으로 기어와서 자기 몸 위에서 낙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무리 큰 문제가 생겨도 길은 있다. 사람에게는 머리가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 잡고 나갈 때에는 오죽하겠습니까? 당연히 지혜를 주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곤충에게도 살아나갈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언약을 잡으면 끝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없습니다. 정주영씨는 그렇게 해서 한 번 간판을 내 걸으면 '한국을 위해서'라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결국은 모두 해결해내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 부닥치는 사업에서는 실패를 맛보았지만 값비싼 수업료를 치루는만큼 수입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신념만으로도 낙심치 않고 재벌이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잡고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계를 살릴 재벌이 되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재벌이 되기까지는 낙심하고 낙망할 이유들이 수없이 있을 것이지만, 결코 낙심과 낙망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 언약을 잡고 믿음만 바로 가지면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함정은 수업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릇을 넓히는데 필요한 수업료입니다. 신앙의 훈련입니다.
4. 사실적인 기도
이러한 엄청난 언약을 잡고 기도가 사실로 나와야 합니다. 불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묵주를 돌리는 것처럼, 우리는 24시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가 사실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세수하면 세수를 하면서 사업을 하면 사업을 하면서 계속 하나님께 이야기를 하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면 지혜를 주십니다. 빈대에게도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승리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도가 있어야 되고, 믿음으로 십일조에 더하여 헌금을 향한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선교사 파송을 위한 십이조가 되고, 십삼조는 앞으로 지역에 투자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짜 전도할 사람들이 지역을 살려야 합니다. '십일조만 써도 풍족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십시오. 십의 구조는 세계를 살릴 돈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조금만 약속이 바로되면 세계 살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 속에서 경제난을 극복하고, 올바른 헌금관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 또한 믿음의 부분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세계 살릴 사람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먹여 살리실 권능의 하나님께서 99년도에 축복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하며 살아가는 기쁨(1)
행 14:19-20, 27-28 / 이정익 목사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사람은 행복과 보람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행복과 보람은 외부로부터 주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주어집니다. 사람이 하는 일들 중에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들을 통해서 행복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때 사람들은 아주 건강한 삶을 살게 되고 건강한 신앙의 삶을 이루어 나가게 됩니다. 앞으로 신앙인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고 그 소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고 행복을 누리며 보람을 얻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을 주신 것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도바울의 전도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가서 전도를 합니다. 내용을 보면 생생한 간증형식으로 현장감 있게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생생한 현장 목격자는 루스드라 출신인 바울의 제자였던 디모데였을 것입니다. 당시 루스드라는 로마 식민지로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고참 직업군인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군인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유대인들도 소수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도바울이 와서 전도를 합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찾아와 집요하게 전도를 방해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이웃 마을인 안디옥과 이고니온 지역의 유대인들까지 불러와 방해를 합니다. 싸움은 대부분 상대적입니다. 양쪽이 똑같으니까 싸움이 발생합니다. 한 사람이 싸울 의지가 없으면 싸움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부싸움도 쌍방이 똑같으니까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웃 동네 유대인들까지 불러와 합세하면서 싸움이 치열해 졌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고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대로 전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몹시 약이 올랐을 것이고 1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은 바울은 졸도했고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끌어냈다고 했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치열했습니까.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시내에서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얼마나 흥분하였으면 돌로 쳐 죽였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날 사도바울은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몸이 부러지고 찢어지고 피가 나고 상처가 컷을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바울이 기절한 것을 알았으면 빨리 응급처치를 하려 애를 썼을 것인데 본문은 “제자들이 둘러 서 있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바울이 이미 죽은 줄 알고 장례 절차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20절을 보면 그때 사도바울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기절했다가 정신이 깨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내로 들어가 하루를 보내고 그 몸으로 다음날 더베로 떠납니다. 루스드라에서 더베까지는 30km의 길입니다. 그 말은 다음날 그 몸으로 70리 되는 길을 걸어서 갔다는 말입니다. 그 장면을 본문은 아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더베로 가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2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충고를 하고 (23)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내 금식기도하고(23) 다시 비시디아, 밤빌리아, 버가를 지나 배타고 안디옥으로 가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24)고 했습니다. 이 일을 누가 시킨 일입니까. 돈이 생기는 일입니까, 누가 강제로 시킨다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순전히 자기 스스로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일이 행복하고 즐겁고 할수록 더 보람을 느끼니까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생활입니다. 철학자 칼 힐티가 말한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이나 사명이나 은사나 좋아하는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고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아이들 입시 때가 되면 아이들 방을 지키고 앉아 밤을 새웁니다. 그런다고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시키면 방문을 지키지 않아도 밤새워 공부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그 아이에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해 주는 일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 보람은 일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건강한 신앙인의 삶은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맡은 일을 하고 사역을 하고 열심히 일하는 태도는 좋은 태도입니다. 사람은 일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직장에서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밤새워 일하는 사람은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는 결혼을 포기하면서까지 일하려고 애를 씁니다. 일에서 기쁨을 얻고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 일도 그냥 일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고 그 일에 매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 발견
먼저 내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기쁨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하며 살아갈 때 삶이 행복해지고 이 세상이 건강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사람은 일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나 사명이나 은사를 발견하지 못하면 허탄한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연예인들이 도박과 마약에 몰두하는 경우가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좋은 재능을 가지고 소중히 역할을 못하고 허탄한데 열정을 쏟는 것입니다. 돈을 좀 벌었습니다. 주머니가 넉넉해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할 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도박으로 마약으로 타락으로 탕진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중년에 이르렀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더 이상 할 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편안한 생활을 하며 매일 누워 살아갑니다. 그리고 먹는 일에 몰두하고 마시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니까 삶에 불균형이 오는 것입니다. 이 삶의 불균형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이 중년의 위기로 나타납니다. 중년의 때에 각종 질병이 몰려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삶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빨리 죽게 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체중을 늘리게 하라, 허리띠 길이와 수명이 반비례하니까. 술을 많이 마시게 하라, 좋아도 마시게 하고 언짢아도 마시게 하라 그래야 간 기능이 떨어져 일찍 죽으니까. 일없이 편안하게 해 주라, 운동부족으로 수명이 단축되니까. 육식을 많이 하게 하라, 동맥경화나 성인병에 걸리니까. 음식을 짜게 만들어 주어라, 커피로 배를 채우게 하라 특히 자판기 커피를 부지런히 빼 주라. 담배를 계속 피우게 하라, 담배 한 개피 피우면 5분씩 생명이 단축된다고 하니까. 특히 타르나 니코틴이 우리 것 보다 배 이상되는 양담배를 사 주라.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자게 하라, 연속극을 보게 하고 끝나면 곧 바로 비디오를 보게 해 주라. 휴가 없이 일하게 하라, 스트레스로 지레 죽도록. 바가지를 계속 긁어 신경을 곤두서게 하라. 이것이 불균형의 삶입니다. 균형이 깨지면 어느 날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균형이 깨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순간도 멈춤이 없었고 앉아있을 시간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 삶에 날마다 새로움이 있었고 의기충천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 다 달려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은 주어진 일과 은사와 사명의 삶을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이루는 존재입니다.
일의 철학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일에 대한 철학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감사함입니다. 현재 주어진 일터에 대한 감사입니다. 건강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좋은 가정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일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이 발생됩니다. 오늘 사람들이 일터가 없어서 난리입니다. 모두 일 자리를 찾으려고 안달입니다.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톨스토이는 할 일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분주할 때 싫도록 잠을 자 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하루만 싫도록 잠을 자 보십시오. 잠도 정도껏 자야 합니다. 그 이상을 자면 리듬이 깨져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일할 때 보람을 느끼도록 만드셨습니다. 오늘 내가 일하도록 일터를 주신 것이 무엇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푸념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사람은 아침 출근시간이 행복합니다. 흔히 월요병이라고 해서 월요일만 되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또 출근해야 하나, 지겹다,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이 있다면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뜻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뜻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사도바울은 전도하다가 조금 방해가 오면 금방 자리를 접고 다른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매일 그렇게 보냈다면 무슨 전도의 열매가 주어졌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의 전도과정을 보면 방해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 방해 정도는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그의 앞길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전도하는 일을 너무나 행복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런 마음이라면 매일 일터로 출근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한발 앞서 나서고 섬기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삶에 보람과 기쁨과 행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행복함이 주어집니다. 어느 부목사님이 다 가기 싫어하는 신안 앞바다에 있는 조그만 교회로 임지를 맡아 갑니다. 모두 염려하는데 그는 고집스럽게 그곳을 선택하여 갔습니다. “해외 오지로 선교사로도 가는데” 그 마음으로 갔습니다. 정신이 좋습니다. 영적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생각이 건전하고 사명감이 분명합니다. 마음이 그런 상태이면 하는 일이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보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사역하는 교회는 부흥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하겠습니까. 그것이 성공하는 삶이고 건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요즘 TV에 달인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견을 가진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들이 수년 동안 외진 주방에서 연마하고 수고를 합니다. 남들은 밝은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애를 쓰고 땀을 흘리는데 그 주방장들은 그런 화려한 생활에는 뜻이 없습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재능을 보유하려는 것이 뜻이고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는 일에 행복이 있고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한 가지만 잘하는 일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음식 뭐 잘해요” 하고 물으면 “다 잘해요” 하고 대답한다면 그 말은 한 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오디션에서 심사위원이 한 말이 있습니다. 응시자에게 "하고 싶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노래 춤 연기도 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어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불합격입니다. “다 잘하는데 셋 중 춤을 더 잘합니다”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며 일을 하면 미래는 절로 풀려나갑니다. 성공으로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일부러 성공해야지 한다고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한 가지 일에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그런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일터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향상의 삶이고 발전의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오늘 현재 일하는 일터에 대해서 불만족합니다. 그래서 자꾸 옮겨보려고 안달합니다. 그러니까 삶에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직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만족함, 행복함, 즐거움은 외부환경에 있는 것 아니고 내 마음에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먼저 뜻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농촌에서 목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농촌의 환경이 아주 열악합니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현실은 열악하고 고민도 많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불만족해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역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니까 목회 현장에서 마음이 떠나고 사역이 제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농촌목회에서 떠나지 못해 안달하게 됩니다.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농촌 목회를 하려면 먼저 농촌 운동가가 되어야 합니다. 농촌에는 노인들만 있고 젊은이가 없고 비전이 없다고 투덜댈 것이 아니고 노인만 있으면 노인목회를 해야 합니다. 노인 목회는 모드가 간단합니다. 농촌의 노인들에게 년 간 3일 추석날, 설날, 생일날만 되면 고무신 한 켤레와 소고기 한 근을 들고 3년만 찾아가면 끝납니다. 모두 감동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감동이 없는 시대인데 상대가 감동을 받았다면 끝난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내 마음이 행복해야 그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내 마음이 행복하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섭리의식 그리고 소명의식이 내 마음에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때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일을 수행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때 거기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며 살아가게 되면 그 일터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주어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청지기들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일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나는 선교사다”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직장에서 나는 이 직장에 파송받은 선교사다라는 의식이 있습니까. 그리고 직장에서 누군가에게 전도를 해 본 경험이 있는가 물어보십시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감히 누구에게 전도하지 못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야 직장인들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어버이 날 부모와 형제들을 앞에 놓고 효도에 대해서 설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고향에서 목회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과거를 잘 아는 내 친척들이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내 부모와 형제들이 여기에 와 앉아 있습니다. 얼마나 힘든 상대들입니까. 그들을 앞에 놓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어떻게 큰 소리로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의 목회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내 목회에 잡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없는 목회자들은 다른데서 신앙생활 잘 하는 형제들과 부모들과 친구들을 다 불러들입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직장에서 주님과 지금 동행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직장에서 주님을 증거하며 전도를 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으면 나는 왜 전도를 못하고 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를 물어보십시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행복을 먹어야 살고 기쁨을 누려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행복은 내게 주어진 사명과 소명과 은사를 잘 발휘하고 이루며 살아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소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났고 회심자가 일어났고 영접자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삶이 가장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믿음의 문을 열어 주소서
행14:19-28 / 이윤재 목사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추석은 가족끼리 모여 사랑을 나누는 날입니다. 그런데 사이좋은 가족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가족도 있습니다. 한 가정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부인의 생일날 무엇을 선물할까 하다가 마침 공원묘지 싼 것이 있어서 그것을 선물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생일선물로 공원묘지 하나 분양받았다”. 아내가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아니 날 보고 빨리 죽으란 말이야?”. 남편은 매우 서운했습니다. 돈 들여서 샀는 데 아내가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일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또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선물할 생각도 않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생일인데 선물 안 줘요?” 그러자 남편도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선물? 당신 작년에 선물한 것도 안쓰고 있잖아?”. 작년에 선물했던 것은 묘지였습니다. 부부가 이래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나이먹으면 별 차이가 없어집니다. 남는 것은 부부만 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써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 나이가 40대가 되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50대가 되면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60대는 남편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아진다. 70대는 남자나 여자나 똑같아진다. 80대는 가진 사람이나 안 가진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90대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합시다. “있을 때 잘 합시다”.
그러나 나이가 얼마든 배웠던 안 배웠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죽어 하나님 나라 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믿음은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합니다. 첫 번째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요 두 번째 믿음은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첫 번째 믿음은 영적인 믿음이요 두 번째 믿음은 생활속의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마치 문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 27절 보실까요? 행14: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다같이 “믿음의 문”. 왜 성경은 믿음을 문으로 표현했을까요? 예루살렘은 문이 많은 곳입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현재 8개의 문이 있습니다. 남쪽에 2개, 서쪽에 2개, 북쪽에 3개, 동쪽에 1개입니다. 하나 하나가 다 역사성이 있는 문입니다. 저는 예루살렘에 있을 때 서쪽에 있는 욥바문을 지나 학교로 갔습니다(사진). 문은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요 출구입니다. 문은 사이에 있습니다. 문은 사이에 있고 중간에 있습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문은 목적지가 아니고 통과지입니다. 누구나 문을 통해 들어가지만 문으로 가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문을 통해 들어가려고 문으로 들어갑니다. 최종 목적지는 문이 아니라 따로 있습니다. 믿음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믿음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문이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듯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믿음 갖기를 원합니까? 여러분도 믿음을 통해 언제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때는 주후 46년에서 48년, 사건은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할 때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터키 남부 안디옥에서 출발했습니다. 키푸로스 섬을 지나 지금의 터키 남쪽 버가에 상륙하여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를 들려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온 코스였습니다. 성경으로는 사도행전 13장, 14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3장에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받고 출발했지만 미신과 우상숭배로 쪄든 키푸로스 섬에서 첫 번째 시련을 당합니다. 마술사 엘루마가 바울 일행을 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고 육지로 올라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도착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울이 이고니온으로 쫓겨납니다(사진2). 그런데 그 이고니온에서도 핍박합니다. 14장 5절입니다. 행14: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돌려드니”. 여러분, 바울의 고난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선교를 떠나는 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교하는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선교하면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시련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왔는 데 거기까지 사람들이 와서 괴롭힙니다. 오늘 말씀 19절입니다.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설령 종교가 달라 마음이 안 맞았다 해도 사람이 떠나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따라 쫓아 왔습니다. 요즘 원정 도박, 원종 출산 하는 데 원정 핍박을 한 것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루스트라까지 17km,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는 42km가 됩니다.
지금같이 교통이 좋은 때도 아닙니다. 터키는 산이 높습니다. 그 높은 산을 넘어 수 십킬로를 바울을 쫓아 왔다면 그들을 얼마나 악심을 품은 것입니까? 바울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결과 바울이 과연 죽었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이 죽었고” 했는 데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현재완료형입니다. 이미 죽은 것입니다. 폭도들이 돌에 보니까 이미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죽은지 알고 밖에다 버렸습니다. 결국 바울이 일어났지만 바울은 이 정도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 칠흙같은 고난의 때에 바울이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27절,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왜 바울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믿음을 말합니까?
믿음은 고난속에서 생겨납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은 고난속에서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아무데서나 생기지 않습니다. 고난속에서 생깁니다. 우리 중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지만 고난이 없다면 믿음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까?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여기 “환란”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환란의 헬라어는 “들립시스”입니다. 이 말은 외부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고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 심적, 육체적 고통, 영적 고통,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환란”은 밖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을 통과해야 합니다. 환란을 통과하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에게 불가항력적 고통이 오면 누구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때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을 절대 자기가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하지 하나님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고난을 통해 믿음을 갖게 하는 방법입니다.
한번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가장 좋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고난당할 때입니다. 제가 제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믿음이 좋았던 때는 역시 고난당할 때입니다.
한번은 고3때 연탄가스 먹고 병원에 있을 때입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데 자취방에서 가스를 먹었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먹었습니다. 뒤늦게 친구들이 송장을 메고 병원으로 갔는데 얼마 있다 제가 깨어났습니다. 내일 모레면 시험보는 데 시험도 못보고 병원에 누어있으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때는 그래도 공부를 잘해서 시험만 보면 일류대학에 붙는다고 할 때입니다. 사람의 미래가 사람 마음대로 됩니까? 마음대로 안 됩니다. 처음엔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의 폭풍이 지난 후 깨달았습니다. “아, 인생이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제가 하나님께 부름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좋은 말로 불러서는 안되는 고집센 사람인 것을 알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저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한 문을 막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또 한 번 역시 병원에 있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교통사고로 입원했습니다. 사실 그 정도 사고를 당했으면 죽었어야 합니다. 지리산 골짜기 낭떨어지 위에서 두 자동차가 충돌했습니다. 설날, 부모님 뵈러 고향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저 뿐 아니라 네 식구가 다 차에 탓었습니다. 사고 나기 10분전까지도 가족끼리 웃고 떠들었습니다. 누가 인생의 10분 후를 압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 제사지내고 밤새 못잤던 한 남자의 차가 골짜기 저 쪽에서 죽음의 질주를 하고 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차를 보았지만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죽음을 알고도 피하지 못합니다. 몰라서 못 피한 것이 아닙니다. 알아도 못 피합니다. 평소에 운전 잘한다고 큰 소리 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서 몇 달을 있는 사이에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때는 제가 목회할 때고 그나마 한참 잘 나갈 때입니다. 누가 막습니까? 누가 인생에 불쑥 찾아오는 환란을 막습니까? 못 막습니다. 그러나 막을 수는 없어도 받기에 따라 유익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유익입니다. 자기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유익입니다.
제가 작년 안식월에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목사님 몇 분과 유대 광야를 횡단했습니다(사진). 사실 유다광야는 제가 오랫동안 횡단해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유다광야는 이스라엘 한 복판에 남북으로 90킬로, 동서로 20킬로 되는 작지 않은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영적 훈련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도 다윗도 예레미아도 아모스도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이곳에서 훈련받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다윗이 숨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샅샅이 뒤지지 시작했습니다. 엔게디. 하길라, 마온, 성경에는 다윗이 광야에서 겪었던 이야기가 15개 나옵니다. 삼상에서 삼하까지 다윗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피해서 숨었던 동굴 이야기만 네 번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죽을 뻔한 이야기도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시편이 모두 150편인데 그 중 1/3이 다윗이 광야에서 체험한 고난을 배경으로 쓴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다윗을 오랫동안 광야에 두셨습니까? 다윗이 미워서 그랬겠습니까?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시편의 그 많은 고백은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안정되고 다윗은 편안해졌습니다. 그때 그 편안한 왕궁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다 안 좋은 사건이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둘 다 다 다윗이 편안할 때 일어났습니다. 편안하면 다툽니다. 편안하면 범죄합니다. 그 중에서 밧세바 사건은 다윗을 망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하면 망합니다. 편한 데도 하나님도 잘 섬길 수만 있다면 최고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에 믿음의 다섯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 “신뢰”입니다. “여혼아를 신뢰하라”. “신뢰”는 “몸을 기댄다”는 뜻입니다. 어린아기가 엄마품에 몸을 기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몸을 기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의지”입니다. “의지”는 지팡이나 보조기를 몸에 끼고 걷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두번째입니다. 신뢰와 의지는 갖되 갖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명철”입니다. 명철은 우리의 지적 능력입니다. 지식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지식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4.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인정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럴 때 주어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네 길을 지도하리라”. “지도”란 말은 “길을 곧게 한다”는 말입니다. “I will make straight your paths”. “내가 지그 재그로 난 네 길을 반드시 펴주겠다“.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인생 광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계 3대 종교가 광야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십니까? 유대교는 모세를 통해 시내 광야에서 나왔습니다. 기독교는 세례요한, 예수님을 통해 유대광야에서 나왔습니다. 이슬람교는 모하멧을 통해 아라비아 광야에서 나왔습니다. 광야는 고난을 의미하지만 거기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만 광야에 있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믿음의 요소가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말씀 속에서 자라납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이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엄청난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박해당하고 돌에 맞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고난은 바울과 그 일행으로 하여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 자체가 자동적으로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면 그 음성에 순종하게 됩니다. 14장 1-9절에 구원받은 앉은뱅이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기자 “일어라 걸으라” 소리쳤습니다. 일어나 걸으라 소리치자 일어났습니다. 9-10절입니다. 행14:9-10,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많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여기서 “들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들었다”는 말은 “듣다”의 미완료과거로서, 단지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잘 이해하고 수용했다는 뜻입니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온 그가 이제 막 살 기회가 생겼는 데 집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살고 죽는 순간인데 대충 듣겠습니까? 집중해서 들은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바울의 말입니다. 바울의 무슨 말입니까? 사도행전13장과 14장에서 자주 나온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주님의 가르침”, “율법과 선지자”, “복음”입니다. 모두 15번 나옵니다. 13장에서 10번, 14장에서 5번 나옵니다. 바울은 다른 말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주님의 가르침”, “율법과 선지자”,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이고 그 말씀이 들려올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오래전 교회에 한 신자가 나왔습니다. 세상 일로 고난을 많이 당하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돈도 많이 벌고 학벌도 높은 여성이었습니다. 이 분이 하도 인생고가 많고 되는 일이 없으니까 누가 교회나 나가보라고 해서 자기 발로 교회 나왔습니다. 얼마동안은 잘 나왔습니다. 얼굴도 밝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나자 한 두 번 빠지더니 점점 안 보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무 어려워 누가 교회나가보라고 해서 교회 나왔는데 나는 하나님이 금방 나에게 행복과 마음의 기쁨을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가도 그저 그렇고 마음의 기쁨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종교를 믿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 모든 종교가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혹시 제가 성경을 펴고 말씀드려도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4장을 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서 시험받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두어번 읽은 후에 물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머리가 좋은 그 분은 금새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시네요”. “그래요. 세 번 유혹받았죠. 한번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또 한번은 높은 산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내가 받아주겠다. 마지막은 나에게 절해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네게 주겠다”. “이 모든 유혹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지름길로 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방 잘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지요. 돌이 금방 떡이 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금방 받아주고 절만 하면 천하의 모든 영광 금방주고. 마귀는 뿔달리고 삼지창들고 서 있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빨리 성공하는 길로 유혹하는 그 무엇이죠. 지금 성도님이 서 있는 자리는 인생 광야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 있었죠. 누구나 광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 있을 때 우리가 받는 유혹은 있죠. 그것은 제발 빨리 이 광야에서 자유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성도님이 지금 그렇지 않습니까?“ 그 분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신앙의 세 요소가 있습니다. 우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어요, 마귀의 지름길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아요. 예수님이 마귀에게 했던 세 마디는 모두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복종했죠.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께 복종하고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을 이르셨죠. 성도님은 교회 나오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한 6개월이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마음에 담았나요?” 아니요.“ ”말씀을 모르니 순종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니 믿음이 안 생긴 것이죠“.
그때부터 그 분이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좋아하는 조급증을 버리고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그 말씀으로 믿음을 키워갔습니다. 그 분은 후에 권사님이 되었고 새가족 양육, 일대일양육등에 큰 힘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최고 유혹은 한번에 모든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유혹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망합니다. 쉬운 길, 지름길을 좋아하지 말고 정도로 가야 합니다. 정도는 이것입니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고 또 한 구절이 있습니다. 히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나니”. 하나님의 아들도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복숭아, 사과나무도 3년은 자라야 열매맺고 중국산 대나무는 5년 되기 전에는 아무 변화도 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5년동안 쉬지 않고 거름주고 물주면 5년이 된 날, 갑자기 2주만에 15미터가 자랍니다. 믿음은 말씀속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본래 바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니 어디를 가서도 전도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믿음은 점점 자라고 ㅇ있었습니다. 믿음은 정체적인 것이 아니라 성장지향적인 것입니다. 엡4:13절에서 바울이 말한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최고로 믿음이 자랄 때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믿음은 어떻게 자랐습니까? 사용함으로 자랐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사랑도 사용하면 커지고 믿음도 사용하면 자랍니다. 천하의 바울이라도 선교여행을 떠나지 않고 안디옥에만 앉아 성경을 연구하고 있었다면 그는 좋은 믿음의 사람을 되었겠지만 위대한 순교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시인”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시인입니다. 내가 수백개의 진리들을 알고 있어도 “그렇게 말할 때 까지는”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말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믿는대로 말하고, 둘째 말한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말은 반드시 표현되고 표현하면 그대로 됩니다. 사랑은 사랑한다 말하게 하고 사랑한다 말하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망설임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자신없슴의 표시입니다. 부끄러움을 이기고 말하면 부끄러움이 사라집니다. 우연히 시편을 읽다가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시107: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아무에게나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아의 속량을 받은 자”. 속량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말해야 합니다. 말하면 좋은 것은 우선 자기 자신입니다.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 장애물을 뚫고 나오는 비결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말씀했습니다.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내가 아는 진리를 나만 알고 있으면 나만 살립니다. 한 불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나와 구원받았습니다. 그가 구원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예수믿고 구원받고 보니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다. 왜 예수믿는 사람은 자기 혼자 믿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 작년 영국 런던에 갔을 때 세인트 폴 성당(St. Paul Cathedral)을 방문했습니다. 그 성당에서 홀만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입니다(사진). 이 그림은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을 그린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예수님은 문밖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문은 여태껏 열린 적이 없습니다. 문앞에는 잡초가 자라고 손잡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있고 손에는 못이 박혀 있습니다. 옷은 제사장의 옷을 입었고 초를 들고 계십니다. 이 그림을 한참 바라보는 데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눈입니다. 그 눈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입니다. 이 발을 자세히 보면 방향이 돌려져 있습니다. 마치 지금 떠나려고 몸을 돌린 모습입니다. 충분히 기다린 것입니다. 오래 기다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잡초가 무성한 우리의 심령 앞에서 주님은 너무 오래 기다린 것 아닙니까? 문을 여십시오.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교회 나와 몸만 앉아 있지 말고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믿음의 문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족의 믿음의 문은 열렸습니까? 여러분 아파트의 믿음의 문은 열렸습니까? 판교 영혼들의 믿음의 문을 열렸습니까? 이번 가을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번 새생명축제가 바로 그때입니다. 시107: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문들아, 열릴지어다.
사명자의 길
사도행전 14:19-28 / 김경년 목사
여러분, 미국의 유명한 시사 잡지 타임지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선정했는데 그중에 1위는 여성 토크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어림잡아서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한가지는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 그녀가 가난한 보육원을 방문하여서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10초만 이야기하면 다음날 수십억의 기부금이 들어옵니다.
* 그녀가 어느 책을 읽었다고 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다음날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녀의 이런 영향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녀는 혼혈아로 태어나서 가난과 아픔 속에 자랐지마는 혼자 공부하면서 성경의 모세를 통해서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는 책에 보면 윈프리의 네 가지 인생철학이 있습니다.
❶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❷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❸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❹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여러분, 사명이 무엇일까요
사명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생명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생명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사명은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본문 19절 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을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여기 보면 유대인들이 무리를 초인(招引)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페이산테스’라는 말로 무리를 설득하다, 충동질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 했습니다. 마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처럼 그렇게 죽이려 했습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하자 그들은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버렸습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 11:23~27)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좌절에 빠져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서 다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더베로 향했습니다.
*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리빙스턴이 한번은 아주 무서운 짐승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졸도를 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깨어나 보니까 몸에 발톱자국만 몇 개 나있고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왜 살고 있습니까?
나이가 젊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사명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명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도행전 14:11-13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이 내용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 동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착각하고 경배하려 했을 때입니다.
이때 모른 체 하고 그대로 두었더라면 아마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큰 대접을 받고, 위대한 스타나 영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찢으면서 간신히 말렸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그 이유는 ❶ 사람이 지나친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요, ❷ 또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 행위요, ❸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저들의 잘못된 행동을 강력하게 저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의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2:21-2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영광을 가로챈 헤롯 왕이 세균 감염으로 죽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 회사에서 승진을 했거나, 병을 고침 받았거나, 사업에 성공을 했거나, 집을 구입했거나, 취직을 했거나, 결혼을 했거나, 아이를 낳았거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오직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가끔 어떤 일이 잘 안되면 조상 탓을 하거나,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리고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 시골에 어떤 교회에서 할머니 한분이 세례를 받게 되었답니다. 이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반드시 본인의 신앙고백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살고 있는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머님, 목사님이 질문하시면 대답을 잘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 죄 때문에 돌아가셨나요?”그러면 “예,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이렇게 대답하세요. 그래서 세례를 받기 전에 목사님이 묻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나요?” 그 때 할머니는 두 번도 생각지 않고 “예,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이렇게 대답을 해서 모든 교인들이 박장대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이 잘 안되면 내 탓인 줄 알고 더욱 성실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거쳐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은 바울과 바나바가 돌에 맞아서 죽을 뻔 했던 곳이요,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한 곳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고 싶을 것인데 두 사람은 다시 그곳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여기서 ‘권하고’라는 말은 파라칼룬테스인데 이 말은 격려한다, 세운다는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친구들 간에, 성도 간에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어떤 교회에 화재가 나서 예배당이 불에 다 타버렸습니다. 경찰은 화재의 원인이 방화인지, 전기 누전인지 알기 위해서 교인들과 목사님을 상대로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수시로 찾아와서 목사님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교회가 불이 난데가가 조사까지 받으니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그 때 장로님 한분이 찾아와서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장로가 책임을 지는 곳이니 제발 목사님께 부담을 더 이상 드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모든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도록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나중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회를 다시 건축하고 날마다 아름답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는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로가 세워주고 격려하는데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없겠습니까?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