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28
7월24일[연중 제1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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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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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R2TK8uqEyo
[서울대교구 배우석 리노(중앙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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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실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의 질서를 뒤바꿀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0년 세월 동안 이스라엘의 변방 나자렛에서 조용히 사셨습니다. 인간에게 명령하셔야할 만왕의 왕이신 분이 인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며 서른해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기쁘게 도와드렸습니다. 때로 요셉의 부탁으로 열심히 대패질도 하셨고 못도 박으셨습니다. 가사 일로 늘 바빴던 마리아의 일손도 거들었습니다. 때로 마늘도 까고 양파도 까면서 매워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어떤 자식보다 효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꽤 의아하게 다가옵니다. 효자이셨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48-50)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마리아와 요셉, 사촌들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 말씀에 가장 충실하셨던 마리아를 향한 극찬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씹고 곱씹고, 새기고 되새기던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만 머물며, 가족 친지들과 알콩달콩 한평생을 사셔야 할 분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 더 넘어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할 분,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결코 혈육이나 지연, 학연에 연연하시면 안되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을 지나치게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물론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도 중요하지만,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와 본당이 다 내 공동체요 우리의 공동체, 주님의 공동체라는 연대와 공유 의식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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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올려다볼 곳은 오직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가혹하다 싶은 부르심을 받고 두려워해 본 적이 있는지요? 너무나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은 주님의 초대 앞에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던 적은요?
때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그는 볼이 발그레한 미소년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 그리고 자신감이 없었던지 예레미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그러나 주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한번 정했으면 그만이다. 일단 한번 가보자.” 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 7-8)
그렇게 해서 요즘으로 치면 중학생 나이의 소년 예레미야의 고달픈 예언자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린 예언의 내용이었습니다.
“가서 유다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에게 말하라.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축복하셔서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 같은 듣기 좋은 말을 전하라고 하면 저라도 흔쾌히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해야 할 예언의 내용은 유다 민족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이 사라진 빈껍데기 같은 이스라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음이 완고한 이 백성, 이 땅은 철저하게 유린되고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얼굴을 돌려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예레미야 예언자가 유다 고관대작들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 내리신 예언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뭐 이런 애송이가 와서 헛소리?’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 가서 외치니 반응은 더 심각했습니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마저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치도 무리로부터 쫓겨난 한 마리 들개처럼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광야를 떠돌던 슬픈 예언자였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쓴소리를 자꾸 내뱉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두고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버리자.”(예레 18,18)
예언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혹독했던지 나중에는 자신이 태어난 까지 저주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이렇게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의 생애 내내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 앞에 서있었습니다. 오로지 올려다볼 곳은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민족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지, 친구들도 그를 멀리했지, 사방이 원수요 적군이지, 그가 바라보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주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그가 온종일 하는 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주님께 자신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했고, ‘어떻게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실수 있냐?’며 그분께 따졌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울부짖고 기도하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선은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족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심각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는 훨씬 크다는 진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욱 힘차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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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Y0KFgwDE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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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와 이단, 그리고 정통은 이렇게 구분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잘 알 듯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열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길과 돌밭과 가시밭과 같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잉태하시고 광야에 나아가 40일 동안 세속-육신-마귀의 욕망과 싸우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받을 때 받은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길과 같아서 말씀이 떨어져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겨 십일조를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육신은 그러한 강론을 들을 때 잠깐 할 생각을 하지만, 막상 내려고 하면 아까워서 내지 못합니다. 세속은 가시밭처럼 돈에 대한 걱정으로 몇 번 내고 있던 십일조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은 사이비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단과 무엇이 다른지, 또 정통 종교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이비는 우선 종교가 아닙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이를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구원’에 있습니다. 구원은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사랑의 수준’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독사가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수준은 어떻게 증가할까요? ‘믿음’으로 증가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자랄 수 있도록 ‘은총과 진리’를 내어줍니다. 이 은총과 진리로 아이는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고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전의 자신은 ‘생존 욕구’에 지배당하며 모기와 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 성장의 과정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숫자 ‘40’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평생이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비는 항상 성적인 부분의 행동(정명석)과 폭력적인 성향(오대양),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적 행동이 보입니다(다미 선교회). 그런데 그런 사이비의 성향이 밖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열매를 맺는 목적보다는 세속-육신-마귀의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입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범죄를 다룹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실로 밝혀졌고 이는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사제가 되어 동성애를 즐기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와 신학교가 폐쇄된 일도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제가 고해성사를 빌미로 성추행하려고 한다면 그 사제는 사이비입니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모르고 세속-육신-마귀를 이용해 종교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예 말씀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단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한번은 개신교의 가이드가 바티칸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랑스럽게 바티칸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 보이는 큰 성당이 바티칸 대성당입니다. 면죄부를 팔아서 지은 성당이죠. 교회의 타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장은 마치 수레바퀴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교회가 이방신인 태양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인들의 종교에서 쓰던 것인데 남자의 성기를 상징합니다. 이것들을 보면 천주교가 얼마나 이교들과의 혼합주의가 심한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히 성체를 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이비는 삼구를 섬기는 이들이라면, 이단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줄 수 없다고 여겨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거부합니다. 부모도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고 어떤 잘못도 덮어주는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실 정도로 자비롭지 못하실까요?
그런데 가톨릭 내에서도 제가 인간이 성모님처럼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가 되고 곧 하느님이 된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교리서에서도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도록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있는데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단적인 생각을 지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은 사이비와 이단들입니다. 이들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 우리 교회도 끊임없이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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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리랑을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랑의 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분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는 어릴 때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한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선율이 무척 아름다웠고, 서정적이었습니다. 그 뒤로 북한의 악단이 연주한 ‘아리랑’도 들었습니다. 선율이 장엄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인터넷 검색에서 아리랑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아리랑에 대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아리랑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그런데 혹시 ‘아리랑’의 참뜻을 알고 계신지요? 우리는 ‘아리랑’의 뜻에 대해 외국인이 물으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뜻과 의미를 제대로 답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알고 숙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무슨 뜻일까요? ‘아리랑’은 작가 미상의 우리나라 민요로써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알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아리랑’을 흔히 사랑에 버림받은 어느 한 맺힌 여인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로 대충 그리 알고 생각하는데, ‘아리랑’ 이라는 민요 속에는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 참뜻은 <참 나를 깨달아 인간 완성에 이르는 기쁨을 노래한 깨달음의 노래>입니다. ‘아’(我)는 참된 나(眞我)를 의미합니다. ‘리’(理)는 알다, 다스리다, 통한다는 뜻입니다. ‘랑’(朗)은 즐겁다, 다스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리랑(我理朗)은 참<된 나(眞我)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나를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고,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피안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의 뜻은 진리를 외면하는 자는 얼마 못가서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진리를 외면하고 오욕락(五慾樂)을 쫓아 생활하는 자는 그 과보로 얼마 못 가서 고통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아리랑’의 이치(理致)와 도리(道理)를 알고 나면 ‘아리랑’은 '한(限)의 노래'나 저급한 노래가 아님은 물론이요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아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지만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 때가 있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이의 비유”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먼저 깨달은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세례자 요한도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었던 것처럼 말씀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들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자갈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여 마음이 움직였지만 세상의 것들에 곧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마음입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지만 성당을 나서면 곧 세상 사람들의 마음처럼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가시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평소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로 변화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했던 바오로 사도의 마음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진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의 마음입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의 마음입니다. 좋은 땅은 직책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좋은 땅은 신분과 재산이 아닙니다. 좋은 땅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갈망입니다. 좋은 땅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헌신입니다. 좋은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저는 아이입니다.’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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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린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절)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절)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신앙인은 가치관이 올바로 서 있어야 한다. 이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제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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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씨앗은 고르게 뿌려집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에도 그리고 좋은 땅에도 뿌려진 씨앗은 모두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맺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땅’에 달려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위로와 감동만을 주고자 주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구원을 위하여 온 삶을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복음의 질서를 우리 마음 안에 ‘세우고 심기’를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하는 말씀일수록, 생각의 틀과 가치 기준을 완전히 뒤엎게 하는 말씀일수록,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말하며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 또한 구원을 위한 은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도,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 사로잡혀도, 하느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은 삶 가운데 머물더라도, 주님께서는 오늘도 구원의 열매를 맺어 줄 말씀의 씨앗을 고르게 뿌리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믿음의 밭에 뿌려 주신 말씀으로 우리 삶이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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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모두 원래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1-9)
1) 뒤의 19절에,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하늘나라에 관한 말’은 ‘예수님의 복음’, ‘구원에 관한 가르침’ 등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또는 사도들과 선교사들, 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모든 신앙인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겉으로만 보면, 씨를 뿌리는 사람이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로 씨를 뿌리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는 좋은 땅이기 때문에 뿌리는 것이고, 많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니까 뿌리는 것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곳에 씨를 뿌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길, 돌밭, 가시덤불’은 처음에 씨를 뿌릴 때의 땅의 상태가 아니라, 추수 때의 상태를, 즉 심판 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좋은 땅이어서 많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고 씨를 뿌렸는데, 결과를 보니 열매를 맺기는커녕 뿌려진 씨를 죽이기만 한 나쁜 땅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처음에 씨를 뿌릴 때의 상황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열매를 거둘 때의 상황에 관한 비유, 즉 복음 선포 활동의 결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처음부터 나쁜 땅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복음을 안 믿고 거부하면서 스스로 나쁜 땅이 되거나, 믿더라도 끝까지 가지 못하거나 가지 않는 예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이 되거나 나쁜 땅이 되는 것은 각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는 말씀에서, 개들과 돼지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우상숭배와 미신에 빠져서 그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2)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은’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ㄱ)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사람이고, 또 당신이 보시니 참 좋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원래는 전부 다 ‘좋은 땅’으로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죄를 짓거나 죄에 오염되면서 좋지 않은 땅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인 성녀들은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해서 좋은 땅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많은 열매를 맺은 분들입니다. <누구든지 좋은 땅에서 나쁜 땅으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쁜 땅이 되었더라도 회개하면 좋은 땅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좋은 땅으로 서는 사람은 좋은 땅인 것이고, 나쁜 땅으로 서는 사람은 나쁜 땅인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누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3) “말씀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맞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라는 ‘씨’가 내 안에서 ‘구원’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면,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씨’가 저절로, 또는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또 자기 안에 미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비유의 맨 끝에 있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는 말씀은, “알아들었다면,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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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마태오 복음 13장에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소개합니다. 이는 ‘예수님 삶의 신비’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의 신비’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농부들은 밭을 갈기 전에 씨를 뿌렸기에 씨앗이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 또는 좋은 땅에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어디든지 뿌려질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을 선별해서 말씀을 뿌리지 않으시기에 말씀이 떨어지는 곳은 준비가 안 된 곳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때문에 혜택을 본 사람들은 아닐까요?
예수님 말씀이라는 씨앗이 좋은 마음에 뿌려질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씨앗을 뿌리신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열매로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우리 각자 안에도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지 않으시고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에 대한 희망으로 씨를 뿌리십니다. 그 열매는 씨 뿌리는 과정의 수고와 손해를 모두 보상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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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예언자는 한계가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미야 예언서 1,5)
하기야 누구도 태어나기 전의 존재에 관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모태에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자를 예언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말할 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심으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시공간에 갇혀 있는 인간과는 달리 그 존재 이전에 이미 그를 당신의 사람인 예언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으로 가는 길은 하느님의 도우심도 있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성실한 대답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가로 가시어 한 자리에 앉으시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비유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하십니다. 이번에 들려주시는 말씀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였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들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보통 흙을 갈아 고른 다음 씨를 뿌리고 흙을 덮는데,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틴 농사법은 먼저 씨를 뿌리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비유 말씀을 하신 대로 사람들이 다닌 길바닥이나 돌밭에, 또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가 있는데 정도 차이는 있어도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서 아예 뿌리도 내리지도 못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돋아나기는 해도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리지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나중에 숨이 막혀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배 육십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내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얼핏 보기에는 씨가 떨어진 환경에 따라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해석하는 학자들 중에 운명론적인 구원관을 펴는 이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구원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극단적 해석을 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 중에 ‘자유’를 꼽듯이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람의 자유롭고 성실한 대답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구원은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대답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구원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에서 주님께서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성실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세우십니다. 그는 인간의 연약함을 비추기는 했어도 일생 하느님께 성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께 늘 감사하며 때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흔들리 않고 성실하게 좋은 땅을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심고 기르며 결실을 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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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오복음 13장에서, 예수님서는 하늘 나라의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둘째는 뿌려진 씨에 대한 이야기, 곧 열매인 결실에 대한 이야기요, 셋째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이야기, 곧 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첫째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서 밭을 구별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며, 둘째로는 그 씨앗은 열매를 맺고 실현되고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며(이사야 예언서 55,11),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밭을 잘 가꾸어야 할 하느님 자녀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13,8)
그렇다면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내가 좋은 땅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이 뿌려지기 전의 땅의 상태가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진 후에 땅을 갈고 가꾸는 것에 의해 그 땅의 성질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의 씨를 가꾸는 농사법’은 먼저 밭을 잘 쟁기질 한 다음에 씨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땅이든 상관없이 먼저 씨가 뿌려진 다음에 그 밭이 쟁기질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13,9) 그러니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진 채 여전히 묻혀 있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며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 열매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보다 타인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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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 밭의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일구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씨앗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시고,
뿌려진 씨앗으로 제가 거룩해 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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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13,8)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의 그림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이 그림의 전체적인 모습은 오늘 복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의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씨앗을 뿌리는 농부 위로 대지를 비추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태양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입니다. 색조色調를 보면, 씨앗을 품고 키워주는 대지를 보랏빛으로 그려 태양의 노랑 빛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밭고랑 사이로 농부가 뿌린 씨앗을 쪼아 먹으려는 까마귀들이 검게 날고 있습니다. 이는 씨앗이 많은 수확을 얻기까지 서로의 역할이 다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떠오르는 태양, 보랏빛 대지, 농부, 뿌려진 씨앗들 모두가 다 희망을 상징하며 특히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태양의 노랑 빛은 그런 희망을 더 밝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이며, 다만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바는 씨 뿌리는 사람의 자질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씨가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사실 작황을 결정짓는 것은 토양의 상태라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씨 뿌리는 사람이란 작은 제목은 적절하지 않은 듯싶지만, 복음의 행간을 깊이 이해할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농사의 측면에서 보면, 본디 농사꾼은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부터 잘 가꿔, 준비된 밭에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농사법은 우리와 전혀 다름을 전제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농사꾼은 실패를 감수하면서도, 다만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최선을 다할 뿐 모든 결과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 내어 맡기며 아울러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열린 마음에 맡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는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의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비유에서 훌륭한 작황을 결정짓는 것은 분명 토양의 상태이며, 그 토양은 바로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임을 유추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농사법이 이 비유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가장 적합한 환경이라고 봅니다. 하늘나라의 씨는 선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뿌려지지만, 그 씨가 발아할 수 있고 발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 사람 영혼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은 구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나타난 것처럼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습니다. 이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영혼에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또 어떤 씨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 해가 솟자마자 말라 버렸습니다. 이는 곧 깨달음이 깊지 않아 힘듦을 이겨내지 못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숨이 막혀 죽어버렸습니다. 이는 곧 지나치게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산만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 곧 준비된 영혼에 떨어져 그 수확이 30배, 60배, 백 배를 거두어 드렸습니다.
100배의 결실을 거두어들인 농부처럼 우리네 삶과 신앙도 이렇게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런 삶은 정말 놀랍고 풍성한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렇듯 좋은 땅, 옥토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땅을 갈아야 하고, 흙덩어리를 부수어야 하며, 성장을 저해하는 깊이 박힌 돌멩이를 하나하나 제거해야 하며, 양분을 빼앗는 잡초를 일일이 뽑아내야 합니다. 아울러 무기물을 공급하려면 나뭇잎, 잔가지, 나무껍질 등이 제때 제 방식대로 찢기어 땅에 떨어져 지나가는 동물들이 남긴 거름과 함께 섞여야 합니다. 습기와 곰팡이에 썩어야 하며, 벌레에 덮이고 세균에게 먹혀야 합니다. 이처럼 풍성한 삶을 위해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렇게 토양을 비옥하게 분해된 유기물을 부식토腐植土라고 합니다. 여기서 humus는 겸손humility과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좋은 땅 곧 부식토가 되기 위한 과정처럼, 우리 역시도 하느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많은 결실맺을 수 있는 마음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바로 ‘겸손’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게 하시려고 사용하시는 과정입니다. 100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이길 원한다면, 토양과 같이 ‘이런 과정’을 거쳐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여러분은 준비되었으며, 이런 과정을 거칠 각오를 가지셨나요.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서정주의 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을 보고」라는 시를 함께 나눕니다. 『칼국수 만들려고 밀가루 반죽해서 방망이로 펴 놓은 듯한 멧방석만한 노오란 달 하나 먹음직하게 나즈막히 뜨시고, 역시 프랑스에서도 만고절색인 그 나이 이슥한 살구나무에 몇 송이 살구꽃도 좋이 피었네 분홍 구름도 몇 줄 동녘 하늘엔 들러리 섰나니, 이 봄날의 대지에 씨 뿌리지 않고 어이 견디리? 베레모 쓴 청년 하나 밀 씨를 뿌리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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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형제님이 종합검진을 받고 나서 자기에게 갑상샘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암 치료가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암 자체가 심각한 병이기에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친한 친구를 만나서 자기 걱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갑상샘암은 거북이 암이라며? 별것 아니래. 괜찮아.”
형제님께서는 과연 친구의 이 말에 위로받았을까요?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 형제님 본인은 괜찮지 않았습니다.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결국 ‘나’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후에,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울먹이면서 아내가 갑상샘암에 걸렸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다급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예전 자기에게 했던 말이 떠올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별것 아니라고 말해주려고 했지만, 자기가 전혀 위로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괜찮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일이 될 때는 별것 아닌 일이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말했어도 상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와 같지 않음을 우선 인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온전하게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판단하지 않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분명 그에게 큰 힘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중요함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이야기해 주십니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땅에 생명을 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담는 땅의 상태에 따라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전혀 열매를 맺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새들이 쉽게 쪼아 먹을 수 있는 길, 흙이 많지 않은 돌밭, 또 제대로 숨쉬기 힘든 가시덤불에서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은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땅은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겸손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간직하고 있으면 오히려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상태의 마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더 크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마음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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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고와 땀의 열매>
이상기후로 걱정이 많습니다. 적당한 햇빛과 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장맛비라고 하기엔 너무 길어서, 우기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랍니다. 음성 감곡의 특산품은 복숭아인데 당도가 높고 맛이 있어 인기가 좋습니다. 과수원에 가보면, 어느 나무 밑에는 풀이 베어져 있고, 어느 밭에는 제초제로 풀을 죽였습니다. 여기서부터 튼실한 열매, 제맛을 낼 수 있는 복숭아가 구별됩니다. 수고와 땀을 쏟은 정성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으로는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 미사참례, 성체조배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튼실해야 하고 땅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맞은 기후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제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씨앗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졌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좋은 씨앗이 아니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맞은 기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필요합니다. 김매기를 하는 인간의 협력입니다.
좋은 땅이 아니라면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어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또한 좋은 씨앗을 구하려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후를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관리하고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있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씨앗인 말씀이 있어도 무관심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인 마음이 있어도 전해주는 말씀이 없으면 또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면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푀멘). 그리고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에 접하게 되고 서운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실은 내 생각대로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변의 풀은 우리가 뽑아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4. 뿌린 씨 전부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5. 뿌린 것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7. 종자는 남겨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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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씨를 뿌리시게나>
마태오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씨를 뿌리시게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3)
씨
지닌
그대여
그리
움켜줘
어쩔 겐가
어디든
늦기 전에
뿌리시게나
곱게
싹 띄워
열매 맺는
씨
다운
씨 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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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시편71,5)
오늘부터 시작되는 마태복음 13장은 하늘나라의 비유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살아 있는 보물창고를 발견한 듯 마음 부자가 된 듯 뿌듯한 느낌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필두로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들로 가득합니다.
이 하늘 나라의 비유들을 보면 예수님의 삶이 보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은연중 헤아릴 수 있고 하늘 나라의 신비를 살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죽어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어제 예수성심자매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자매들의 모임으로 2004년 태동됐으니 올해로 무려 20년이 됩니다. 20여년 동안 한결같이 신망애의 삶을 살아온 자매들의 성숙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신비를 사는 모습들입니다. 함께 찍은 사진안에서 평화로 빛나는 모습이 이를 입증합니다. 사진 밑에 달아드린 댓글입니다.
“모두가 꽃처럼 아름다워요! 모두가 멋집니다. 감사드리며 축하드립니다! 날로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빛나는 신비롭고 거룩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새삼 하늘 나라의 신비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내야 할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 첫 번째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의 삶은 바로 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임을, 결코 현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경거망동하는 삶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그대로 하늘 나라를 살았던 예수님의 삶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씨뿌리는 사람처럼 한결같이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평생 묵묵히 씨뿌리는 자세로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저 역시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의 자세로 묵묵히 평생 매일 강론을 씁니다.
저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대할 때는 프랑스의 장 지오노가 1953년 발표한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동화가 생각납니다. 이 동화는 프로방스의 알프스 끝자락에 있던 어느 황량한 계곡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보아주지 않아도 양치기 노인이 반백년 동안 꾸준히 나무를 심어 결국에는 울창한 숲으로 변모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할 목적으로 묵묵히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모범이 되는 주인공으로 그대로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주인공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던중 떠오른 두 편의 자작시입니다. 먼저 ‘봄觀’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
삶은 흐른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가을의 황홀과 겨울의 적요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 건강과 병듬
강함과 약함, 아름다움과 추함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다”<1998.11.4.>
예수님의 멀리 넓고 깊게 보는 시선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결코 현 상황에 비관도 일희일비도 없었을 것입니다. 매사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의 긍정적 삶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든 원망도 절망도 실망도 않는 삶입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고인이 된 노대통령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한치도 내다볼수 없는 삶,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씨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길바닥 같은 환경도, 돌밭같은 환경도, 가시덤불같은 환경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바로 언젠가 좋은 땅의 풍요로운 수확도 이러할 것이란 희망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꾸준히, 묵묵히 알게 모르게 행했던 선한 삶의 행적들은 어디선가 지금 풍요로운 열매를 맺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론하여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 마지막 말마디도 강렬합니다.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하늘 나라가 펼쳐지는 삶 전체를 볼 뿐 아니라, 마음의 귀를 열어 침묵중에 들려오는 하느님 섭리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본기도 말씀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자는 것입니다. 이래야 주님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늘 힘께 계시기에“<2023.10.21.>
하느님 사랑의 섭리를 믿는 다면 매사 낙관적이고 희망적일 수 있겠고, 언제 어디서나 펼쳐지는 하늘 나라의 삶일 것입니다. 새삼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섭리 은총안에 있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제1독서는 예레미야서의 주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소명’에 관한 감동적인 내용이며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 불림 받아 하늘 나라의 신비를 살았던 예레미야 예언자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 받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내가 너를 세웠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어디서나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이,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신망애의 삶에 충실함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의 신비를 살게 해 주십니다.
“어미의 품안에서부터 님은 나의 힘, 모태에서부터 님은 내 의지시오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믿었나이다.”(시편7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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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근심 기도>
오늘 복음은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로 시작되는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이의 비유라고 할 수 있는데 제 눈에는 씨 뿌리는 이가 뿌릴 데와 안 뿌릴 데 가리지 않고 아무 데나 마구 씨를 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라면 열매를 내지 못할 땅에는 씨를 뿌리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씨 뿌리는 이는 주님이니 주님께서는 저보다도 현명하지 못하신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씨를 아무 데나 마구 뿌리시니 현명하지 못하실 뿐 아니라 씨를 낭비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현명하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시고, 사랑을 낭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시는 겁니다.
친엄마와 계모를 비교하겠습니다. 주는 대로 밥을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어린애는 보통 까탈스럽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 받아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이기 위해 애를 먹는데 그럴 경우, 계모는 먹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며 밥 먹이기 위해 그리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엄마는 그렇지 않지요. 어떻게든 먹이려고 하고 쫓아가 입에 넣어서라도 먹이려고 하지요.
안 먹으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으면 성장에 크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친엄마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 사랑이 낭비된다고 결코 생각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 당신 말씀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에서 우리는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다른 한편 우리의 말씀 밭 상태에 대해서도 봐야 할 것입니다.
나의 마음 밭은 밭이라고 할 수 없는 길바닥이 아닌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돌밭이거나 가시덤불 밭은 아닌지.
어제 행진을 마치고 나눔 시간에 한 얘기이기도 한데 저는 이번 행진을 근심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래서 어제의 행진은 근심과 기도의 행진이었습니다.
비유에서 가시덤불 밭이란 근심으로 덮인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잘 성찰하고 식별해야 합니다.
나의 근심이 어떤 근심인지. 근심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쓸데없는 세상 근심이라면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라는 노래처럼 털어 버리고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쉽지 않지만.
그러나 어제 저의 근심은 그런 쓸데없는 세상 걱정 근심이 아닙니다. 공동체에 생긴 문제를 어떻게 정상화할까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해야 할 근심 걱정이며 사실은 공동체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근심과 걱정은 털털 털어 버릴 것이 아니라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름하여 근심 기도입니다. 엄연히 있는 근심, 해야 할 근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근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주님, 이런 근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여쭙고 하느님의 답을 듣는 것, 이것이 근심 기도입니다.
그러면 근심도 사랑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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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자,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3ㄴ)
<말씀의 씨!>
오늘 복음(마태 13,1-9)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들입니다. 오늘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뿌려지는 '말씀의 씨'와 말씀이 뿌려지는 '마음의 밭'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늘 우리에게 뿌려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나의 마음의 밭은 어떤 모습일까?
뿌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이 악한 영에게 빼앗기는 '길의 모습'인지?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고 마는 '돌밭의 모습'인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는 '가시덤불의 모습'인지? 아니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모습'인지?
한번 각자의 모습을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뿌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매일 묵상하고,
이 소박한 묵상글을 많은 형제자매님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른 새벽(05시30분)에.
가끔씩 들려오는 기쁜소식에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의 복음묵상글을 받아본 냉담 교우가 돌아왔습니다."라는 기쁜소식!
"신부님도 성경을 필사하시니 저도 시작해 보겠습니다."라는 기쁜소식!
"멈춰버린 성경 필사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는 기쁜소식!
이러한 기쁜소식이 말씀이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모습'은 아닐까?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예레 1,9-10)
이것이 우리에게도 주어진 소명이자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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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마태 13, 8)
열매 앞에서
겸손을 배운다.
그냥 이루어지는
열매란 없다.
열매는
여정을
필요로 한다.
열매로
새로운 세상을
우리는
보게된다.
익숙해져 있던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의 삶을
이제는 버리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움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씨앗이
죽지 않고서는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씨앗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결국
씨앗과 열매는
하나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씨앗 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참된 기쁨이다.
씨앗은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땅에
과감히
뿌리는 것이다.
삶이란 밭에
씨를 뿌리는
실천이 바로
살아있는
우리들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은
도전이며
모험이다.
확실하지 않기에
희망하고
두려워하기에
간절히 기도한다.
말씀의 씨앗은
깨달음의
열매로
결실을 맺는다.
씨앗은
간절하기에
열매를 맺는다.
씨앗의
엄청난 신비는
우리를
좋은 땅이
되게한다.
좋은 열매를
맺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씨앗이
이미 뿌려졌다.
간절함과
부서짐과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할 뿐이다.
씨앗은
십자가의
좋은 땅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씨앗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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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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