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는 노래하고 춤추고 풍류잡지 말고 그런 데 가서 보고 듣지도 말라다. 요즘은 유행처럼 절에서 산사음악회를 연다. 아주 대놓고 수행처소가 문화공간 노릇을 자진해서 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 하나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 다 그러려니 한다.
수행자가 정도에 지나친 노래를 하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긴다고 아함경은 경고하셨다.
1. 자기 스스로의 음성을 사랑하고 탐착하게 된다. 2. 듣는 자들이 그 소리를 사랑하고 탐착하게 된다. 3. 듣는 자로 하여금 그 노래를 배우고 익히게 한다. 4. 세속인들이 자기들의 노래와 같다고 비웃는다. 5. 다른 곳에서 고요히 선정에 든 수행자를 어지럽게 한다.
대비바사론에 보면 500선인이 흥겨운 가무를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신통력을 잃었다고 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이 가무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도 요즈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미율의요락에 보면
고 하였다. 그래서 보운경에 수행자는 가무나 기악이 있는 곳에는 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사원마다 다 TV는 설치되어 있고 그런 가무 풍토는 이미 절 안에 깊이 들어와 버렸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문제 삼지 않는다. 다 뭐 그러려니 한다.
여덟째는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다. 평상의 높이는 정확히 50센티미터다. 평상은 단순해야 한다. 치장을 하거나 장식을 해서는 안 된다. 거기서 좌선이나 일상생활을 한다. 하지만 설법할 때는 완전 예외다. 그것은 그 스님보다 불법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높은 법좌에 앉을 때는 반드시 불법을 설해야 한다. 거기 앉아서는 개인사나 개인의 소견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법상이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경전에 위배되는 개인 소견을 불법처럼 말하는 스님이 있다. 청중이 그를 법상에 올린 것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듣고자 함이지 그 스님의 시답잖은 개똥철학을 들으려 앉힌 것은 아니다.
평상이 이 치수보다 더 높으면 문제가 있다. 오르고 내리는데 스님의 아랫도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비구는 내복이 없다. 즉 팬티와 셔츠를 입지 않는다. 三衣를 제외하고는 입을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없다. 하지만 북방불교에는 이것이 맞지를 않다. 그렇게 입다가는 겨울에 다 얼어 죽는다. 어쩔 수 없이 철마다 갈아입고 때마다 걸칠 옷들을 쌓아놓는다.
모자 안 쓴 스님을 본 적이 있는가. 비구는 어떤 모자든 쓰면 안 된다. 양말도 신으면 안 된다. 목도리를 해서도 안 된다. 여기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시비하지 않는다. 그런 계목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부처님은 물론 비구들도 다 맨발로 다니셨다. 그게 법이다. 그런데 지금은 남쪽나라 스님들도 걸식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샌들을 신고 다닌다. 환경이 다르고 기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첫댓글 긴 댓글에 법화경 말씀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_()_
제가 지금 꾸고있는 꿈은 불행히도 악몽이라 저는 이 장몽에서 하루빨리 깨어나고싶습니다.
사찰의 어원은 사찰伺察에서 시작되니 거기서 불상을 보며 불상너머 계신 부처님을 생각하며 못난 자신을 살펴보려합니다.
사찰은 온갖 도구를 사용하여 저를 세차게 흔들어 깨우고 각성시켜 주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니 부평초처럼 사바세계를 떠도는 방랑자의 삶을 그만 접고 한시라도 빨리 생사의 고통이 없는 근원의 자리로 환원하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오랫동안 수많은 설법을 하셨는데 그 영취산이 바로 사위성의 공동묘지라는 사실.
사찰은 무상한 이 삶 속에서 무섭도록 복없는 저를 각성시키는 곳입니다.
대승불교 권의 스님들은 5계와 10계조차도 조건과 환경에 의해 지켜내기가 힘드는군요.
그런데 5번째인 불음주는 왜 꼭 불음주여야만 하나 하는 취지인거 같은데 다음 편이 너무 궁금합니다.
계속 좋은 글 올려주십시오.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