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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가 워낙 많아 통보가 늦는 걸 수도 있어.”
엄마는 연신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듯했다.
“연락해 줄 사람한테는 이미 며칠 전에 연락이 갔을 거야. 난 일찌감치 기대 접었는데 엄마는 아직도인가 보네.”
엄마에게 체념을 강요하는 소은이지만 속마음은 엄마보다 더욱 아쉬웠다.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나무컵만으로 행운을 기대해선 안 되는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아쉬움을 잊고자 했다.
소은이는 방에 돌아와 책상서랍을 열어, 간직하듯 넣어두었던 나무컵을 꺼냈다. 이제는 책상서랍에 넣어두기보다는 장식물처럼 책상 위에 놓아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컴퓨터를 켠 소은이는 인터넷으로 레이첼 데이비스를 검색했다. 프로필조차 나와 있지 않은 그 이름은 그저 [해결사가족] 드라마에 관련된 기사와 웹문서 몇 개에서만 검색될 뿐이었다. 레이첼이 [해결사가족] 이후에 출연하는 드라마를 찾아보기엔 아무래도 너무 이른 것 같았다.
다음날 학교에 간 소은이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교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미나가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지난번에 네가 보여준 레이첼의 나무컵 잘 가지고 있지?”
미나는 은밀한 눈빛으로 소은이를 쳐다보았다.
“응, 잘 가지고 있지.”
“어쩔 거야?”
“어쩌긴, 지난번에 얘기 했잖아. 레이첼에게 돌려줄 거라고.”
“레이첼 볼 기회가 앞으로 영영 없다면?”
“그 앤 [해결사가족] 촬영 끝나면 곧바로 다른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얘기했다니까.”
“다른 드라마 출연 할지 안 할지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냥 레이첼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미나야, 근데 그건 왜 물어본 건데?”
“그 나무컵 말이야, 혹시 나한테 팔 생각 없니?”
“뭐? 너한테 팔아?”
“응, 값은 후하게 쳐줄게. 10만원 어때? 그거면 두 달 치 용돈이야.”
좀 어이가 없는, 아니 너무 어이가 없는 미나의 말이었다.
“미나야, 그 얘긴 그만하자. 그걸 어떻게 값으로 따질 생각을 해?”
“소은아, 너도 어차피 그 컵 도둑질 한 거잖아.”
“도, 도둑질이라니?”
소은이는 당황하여 미나를 쏘아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엄마 친구들 땜에 어쩔 수 없이 TV 못 본 거라고. 넌 내가 볼 수 있는데도 나무컵 가지려고 일부러 TV를 안 봤다는 거야?”
소은이가 극도로 흥분한 것이 재밌는지 미나는 능청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말이 좀 심하긴 한 것 같은데, 암튼 잘 생각해 봐. 그 컵을 어떻게 하면 좋을 건지. 내가 생각하기에 레이첼은 계속 배우로 남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미나는 일어서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미나가 언제부터 저렇게 능글맞게 변했을까. 소은이는 미나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디션 합격자 통보는 이미 9월 중순경에 끝났다고 했다. 그것도 모르고 보름을 넘게 혹시나 하며 전화가 오길 은근히 기다렸다니, 소은이는 자기 자신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소은이는 아역배우를 뽑는 다른 오디션은 없는지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당분간 계획이 잡혀 있는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 내년 초반이 돼야 공고가 나올 것 같다.
이럴 때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나 형제가 유명 연예인인 아이들의 그 선택받은 행운에 대한 부러움이 이렇게 쓰린 거였다는 걸 소은이는 절감했다.
합격자 통보기간 두 달 후인 11월 중순의 어느 날, 소은이는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보세요.”
“김소은 학생이죠?”
“예, 그런데요. 누구세요?”
“저는 영상물제작사 와이프로덕션 대표 박한수라고 해요. 학생이 지난 달 아역배우 오디션 참가했던 영상을 보고 연락드리는 거거든요.”
영상물제작사 대표라고? 소은이는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 쳐졌다. 무슨 일일까?
“아 예, 무슨 일이신데요?”
“학생을 좀 만났으면 해요.”
가슴은 방망이질이었지만, 소은이의 머리는 일단 의심부터 하자였다.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엄마 역시 전화를 건 그 사람이 진짜 제작사 대표인지 믿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전화가 온 이상 일단 만나볼 필요는 있다는 것이 소은이와 엄마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유혹이 한편으로 일었기 때문이다.
“믿겨지지 않으시겠지요. 저희도 그 점 이해합니다. 충분히 저희가 의심스러울 겁니다.”
만나자고 한 장소로 소은이와 동행한 엄마에게 박한수 대표라는 사람이 명함을 건네주며 말했다.
“우선 소은 양 만나자고 한 배경을 말씀드리면, 저희 프로덕션에서 다음 달에 영화 촬영에 들어가거든요. 그 영화에 아역이 필요한데 마침 엔터테인먼트사로부터 오디션 영상을 협조해 줄 수 있다고 해서 저희가 그 영상들을 다 보고 난 다음 저희 영화에 출연할 아역에 가장 적합한 얼굴이 소은 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드린 거구요. 실제로 이렇게 보니 만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자리에 응해주신 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다음 달에 영화를 촬영하는데 우리 소은이를 거기에 아역으로 출연시킨다 이 말씀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무슨 영화인가요?”
“그냥 뭐 평범한 멜로인데 제목은 [미워도 다시 한 번]입니다.”
“예에?”
소은이와 엄마는 순간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엄마는 다시 박한수를 보며 물었다.
“옛날 그 한국고전영화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면 소은이도 알고 있는 영화였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아주 유명한 옛날영화라는 것과 지금까지 수차례 리메이크돼 온 신파조의 아주 슬픈 한국의 고전영화라는 것 정도는 웬만한 애들도 다 알고 있을 터였다.
“예, 뭐 리메이크라면 리메이크인데 현대식으로 해석해서 전혀 다른 내용으로 재탄생하는 그런 영화라고 알고 계시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 영화라면 아역도 상당히 비중이 있겠네요.”
“그런 만큼 소은 양에게 거는 기대도 상당히 큽니다.”
소은이의 영화 캐스팅은 그렇게 거짓처럼 쉽게 이루어졌고, 또 거짓처럼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술술 진행되었다. 엄마는 소은이를 위해 옛날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저장된 USB를 주었고, 어린이용 화장품 및 메이크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며칠 후 소은이는 감독과 출연 배우들을 만나 소개가 이뤄졌고, 제작사로부터 출연료 일부가 엄마에게 지급되었다. 배우들은 전부 소은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저예산 영화라서 무명배우를 섭외한 거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소은이가 가장 궁금한 시나리오는 받지 못했다.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대본을 보여줄 거라는 다소 애매한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어쨌든 소은이는 이 뜻하지 않은 사실을 학교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은 순식간에 퍼졌고, 학교 아이들은 같은 학교 6학년의 신슬기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은이에게 몰려와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영화 캐스팅 배경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신기해했다. 아직 영화는 찍지 않았지만, 소은이는 유명해진다는 것이 대충 이런 기분이구나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학교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소은아!”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미나였다. 미나는 저만치부터 소은이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다가와 소은이 앞에 섰다.
“영화 찍니?”
“어.”
“무슨 영화?”
“옛날 영화 리메이크작이야.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고......”
“미워도 다시 한 번! 나도 들어본 영화인데. 어떻게 캐스팅됐어?”
“지난번 오디션 영상 보고 영화제작사 사장이 나한테 연락한 거야.”
“그래? 잘됐구나. 행운이네.”
“행운?”
그래, 행운이었다. 문득 나무컵이 생각났다. 그 컵이 예외 없이 나에게도 행운을 가져다 준 거구나. 소은이는 속으로 감사했다.
“그런데 영화 찍기 전에 거기가 어떤 제작사인지는 알아 봤어?”
“알아 봤지. 계약금도 받았어.”
“기대 많이 되겠네.”
“영화가 대박나기만을 바랄 뿐이지.”
“그래, 대박나면 너도 TV 드라마에 진출할 길이 트이겠지.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수 있고 말야.”
미나의 말 자체는 덕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소은이의 귀에 왠지 말투가 비꼬는 투로 들렸다.
“잘해봐.”
미나는 인사인지 뭔지 모를 말을 던지고 저만치 문구점 쪽으로 앞질러갔다.
영화촬영하기로 돼 있는 날은 학교에 통보하고 그 날은 결석처리를 할 수 있었지만, 소은이의 촬영 첫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소은이의 매니저가 된 엄마와 함께 소은이는 제작사 사장이 알려 준 장소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소은이는 자신의 가방에 나무컵을 챙겨 넣으며 첫 촬영을 무사히 끝낼 수 있기를 맘속으로 빌었다.
그런데 소은이는 아무래도 이해가 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적어도 영화를 찍기 전에 그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을 만나 리딩 연습을 하면서 호흡도 맞추고 감독으로부터 전달이나 지시사항도 듣는 등 촬영 전 치러야 할 어떤 절차가 있어야 할 텐데, 소은이에겐 전혀 그런 거 없이 그저 촬영이 있으니 촬영 장소에 도착하기만 하라는 거였다. 엄마도 그 점이 의심스러워 감독에게 연락해 궁금한 사항을 말했다.
감독은 뜻밖의 말을 했다고 했다. 이번에 촬영할 현대판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옛날 영화와는 다르게 아역의 비중이 크지 않아서 소은이가 출연하는 분량이 적고 대사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절차를 생략하고 촬영 장소에서 감독의 말에 따라 지시된 연기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대체 얼마나 분량이 적기에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영화 시나리오 정도는 미리 줬어야 되는 거 아닌가.
엄마와 소은이는 감독의 태도가 영 개운치 않았지만, 촬영장에 가 보면 뭔가 확실히 알겠지 싶어 약속된 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고속도로 IC 부근에 있는 한 광장에 도착하니 소은이와 엄마를 기다리는 한 승합차가 서 있었다. 승합차에서 감독이 내리더니 엄마와 소은이에게 인사하고는 둘을 차에 태웠다. 차 안에는 다섯 명의 출연배우가 이미 타고 있었다. 배우들은 엄마에게 목례를 하며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했다.
“안녕, 난 네 엄마야.”
젊은 여자배우가 소은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소은이는 씩 웃어보였다. 엄마치고는 너무 젊은데. 소은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난 아빠구나. 반갑다. 아침은 많이 먹었니?”
나이 지긋하게 보이는 남자배우가 소은이를 보며 눈을 실룩거렸다. 이 분은 아빠치곤 너무 늙었잖아. 하지만 영화 속 배역이 그러니 내가 상관할 건 아니지. 소은이는 남자배우에게도 미소로 응하며 살짝 목례를 해줬다.
승합차는 고속도로를 한참을 달리다가 한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2차선 국도로 들어섰고, 거기서 다시 어느 정도 달려, 언덕으로 난 비포장도로로 빠지더니, 그 언덕에 지어진 한 전원주택의 널찍한 마당에 정차했다. 마당엔 이미 스텝들이 먼저 와 있었다.
“오늘 촬영은 여기서 할 겁니다.”
감독이 엄마와 소은이에게 알려주고는 스텝들 쪽으로 가서 뭔가 지시사항을 얘기했다. 스텝 중 하나가 카메라를 들고 주택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스텝들도 곧 촬영에 돌입하려는 듯 채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2층 테라스에 카메라가 설치됐다.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배우들은 마당에 설치된 파라솔 의자에 앉아 얼마간 휴식을 취했다. 그러는 동안 코디가 다가와 소은이의 옷매무새를 살피고는 머리 모양을 다듬어주었다. 조금 후 감독이 소은이에게 다가와 대문 쪽으로 소은이를 이끌었다. 엄마도 소은이 뒤를 따랐다.
“여기서부터 저쪽 현관 출입문까지 울면서 가는 씬이거든. 대사는 없어. 지금 저 테라스 카메라 보이지? 자, 바로 촬영할 거니까 한번 연습한다 생각하고 해 봐.”
갑작스런 감독의 지시에 소은이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애초에 시나리오를 미리 봤으면 그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가 파악이 됐을 거고, 울더라도 어떤 느낌으로 우는지 마음의 준비가 다 됐을 텐데 뜬금없이 무조건 울면서 가라니. 소은이는 감독을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