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원래 군자가 마시는 음식이다. 졸장부가 마시면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은 권력과도 같다. 군자가 권력을 가지면 만백성이 편안하지만 소인이 권력을 가지면 천하가 위태롭다.
풀린 동공 게슴츠레한 눈빛, 흐트러진 옷매무새, 불그스름한 얼굴, 횡설수설하는 말투, 꼬인 혀, 역한 입 냄새, 술을 마셔서 무엇 하나 좋을 것이 없다. 이런데도 술을 마실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것인가. 어느 정도만 마시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하겠지. 좋은 말이다. 제대로만 마시면 분명 삶에 활력을 얻을 수는 있다.
칸트가 말했다. 술은 입속을 경쾌하게 한다. 술은 마음속을 터놓게 한다. 이리하여 술은 하나의 도덕적 성질이며, 마음에 솔직함을 운반하는 물질이다고 했다. 그도 술을 잘만 마시면 생활에 활력을 넣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전적으로 동감한다.
사찰은 절이다. 절은 절도가 있고 절제가 있는 곳이다. 그렇게 내려진 금주라도 절도 있는 자세로 절제 있게만 마시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다.
현우경에 부처님이 빔비사라왕과 술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나온다. 거기에 부처님이 어느 정도만 마시면 이것은 하나의 음식이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소인들이 술을 마셨을 때다. 그가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술이 그를 마셨을 때 문제가 일어난다. 절에다 불을 지르던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지 하는 꼴불견의 추태와 망신적 행태를 부린다.
그런 인간들이야 세상에도 다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상적인 인간들에게 술을 금지시키지 않듯이 그런 이상한 하류스님들 때문에 다른 스님들의 자유까지 얽어맬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남쪽나라 스님들은 고기를 먹고 담배를 피운다. 일본스님들은 거기다가 술까지 마신다. 그래도 모두 존대하고 존경한다. 자기들 불교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불교는 어떠한가. 사실 우리나라 불교는 없다. 신라와 고려에 이어 이조까지 중국불교의 지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한국불교다.
그럼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도 스님들이 술을 마시는 데 대하여 난리부루스를 치는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이씨 조선을 세운 정도전과 권근 같은 성리학자들은 사대사상과 충효정신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반역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기존 왕조에 있던 모든 제도와 관습을 성리학의 기준으로 새롭게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려면 신라와 고려를 지탱해 온 불교의 정신문화와 사상기조를 완전히 뒤엎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규격화된 틀로부터 자유를 부르짖고 부모의 효를 넘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조사불교의 기치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그래서 불교의 씨를 말리려고 이조 500년간 줄기차게 모질고도 악독하게 불교를 탄압하였다.
5년도 아니고 50년도 아니다. 무려 500년 동안 불교를 아작내려고 작정했었다. 마지막에는 스님들을 팔촉 천민으로까지 끌어내려 출가의 자유는 물론 도성출입도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런 숭유억불 정신과 계급사회로 인한 하대사상이 사람들의 피에 은근히 녹아들었고 그들과 함께 생각했던 잔여의식으로 스님들을 멸시하다보니 이제까지 스님들이 공개적으로 술 한잔 마시는 것조차 마뜩찮게 여기게 된 것이다.
ㅡ계속ㅡ
출처: 대승기신론 해동소 혈맥기 7_공파스님 역해_운주사
첫댓글 엉뚱한 말이지만,
이씨 조선이라든가
이조라는 말은 일제시대의 잔재...
신라,고려,라고 하듯..
조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ㅎㅎ
불교가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어떤 부침을 겪어왔는지를 제대로 알고 신행활동을 이어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숭유억불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수많은 고승들이 승병을 조직해 임진왜란를 일으킨 왜적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
팔촉천민으로 도성 출입까지 금지되었다고 하니 정말 슬픔과 노여움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럴리는 없겠지마는 이 글 저자스님께서 조선에 대한 서운함이 아직도 남아있는듯 합니다. ㅎㅎ
오죽이나 불교를 괴롭히고 박해를 했어야 좋게 불러주기라도 했겠지요.
불교쪽에서 보면 그시대가 치가 떨리고 소름끼치는 5백년었으니까요.
그 모진 과보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지요.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 바람에 스님들도 팔촉천민에서 해방되어 도성출입이 자유롭게 허용될 수 있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