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개국한 지 겨우 2년째인 태조 2년(1394) 6월 14일, 밤새 내시 이만이 남대문 밖에서 효수되고
세자빈 유씨가 친정으로 쫓겨난 일을 두고 궐 안팎이 벌집을 쑤셔놓은 듯 웅성거렸다. 도성의 민가에
까지 온갖 유언비어가 파다하게 퍼지자 보다 못한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와 형조에서는 사태의
내막을 알려달라는 연명상소를 올렸다. 이에 태조는 신하들이 왕실의 일에 관심이 지나치다며 상소
에 연명한 양사와 형조의 관리들을 모조리 하옥시켜버렸다. 좌의정 조준이 태조를 독대하여 관리들
을 석방시켜달라고 주청했지만, 태조는 한술 더 떠 도승지 이직을 부르더니 하옥된 관리들 중 주요
인사들을 유배에 처하라 명했다.
사태의 발단은 세자빈 유씨가 내시 이만과 통정하다가 발각된 데서 비롯되었다. 세자빈은 한창 물오
른 18세, 이에 비해 11세의 세자 방석은 아직 고추도 잘 서지 않는 어린애였다. 엄마 곁에서 잔다며
동궁을 비우는 일이 잦아 몸이 뜨거운 세자빈으로서는 매일 밤이 너무나 길었다. 춘정을 이기지 못한
세자빈은 결국 양물이 멀쩡한 이만을 불러들여 운우지정을 즐기다가 궁녀에게 들키고 말았다. 보고
를 받은 태조는 신속하게 처리하고 덮어두려 했는데, 눈치 없는 양사와 형조에서 연명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것이다.
태조가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태조는 첫째 부인 한씨에게서 6남,
둘째 부인 강씨에게서 2남을 얻었다. 고려 왕실을 엎고 보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태조는 명문가인
강씨 집안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막내 방석을 더욱 편애하여 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한씨에게서 태어난 6남은 방석의 세자 책봉에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세자 책봉에는 개국공신
정도전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정도전은 그 일로 결국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때 가장 먼저 제거
된다. 이런 판국에 세자빈이 궐내에서 간통하다 발각되었으니, 가뜩이나 성정이 불같은 태조의 심기
가 편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세자빈이 친정으로 쫓겨 온 날 친정아버지가 목을
맸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 17년(1417) 8월 8일에는 상왕 정종이 거처하는 인덕궁의 궁녀 기매가 인덕궁 내 히침진 곳에서
내시 정사정과 통정하다 발각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기매는 상왕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신분이
미천하여 후궁 첩지를 받지 못한 비운의 여인이었다. 태종은 놀라 내시가 어떻게 통정을 하느냐고 하
문했는데, 사헌부 관리의 대답이 태종을 더욱 놀라게 했다.
“내시 정사정은 고려조부터 내시로 일해 온 자인데 양물이 매우 실하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는
기매 외에도 여러 궁녀와 상시 통정을 즐기고 있으며, 황송하오나 회안대군(태조의 4남 방간)의 첩과
도 통정한 후 데리고 살기도 했사옵니다.”
이어 사헌부 관리는 궁녀 기매는 순군옥에 갇혀 있고 내시 정사정은 도망쳤다고 보고했다.
그 무렵 태종은 전국 각지에서 궁녀들을 선발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조공하는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
었다. 황제를 떠받드는 일에는 신생 조선의 명운이 달려 있었다. 황실에 바친 궁녀 가운데는 명문가
인 한확의 동생 청주 한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에 명나라 황실의 궁녀로 뽑혀간 여
인들은 명문가를 포함한 양반 가문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한확의 동생 한씨는 훗날 황제의 후궁이 되
어 조선 왕실에 큰 은혜를 입히기도 했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이 명나라 황제의
인준을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태종은 모든 내시를 검사하여 양물이 달린 자는 즉각 출궁시키라고 명했다. 며칠 뒤 정사정이 잡혀오
자 태종은 궁녀 기매를 불러 함께 친국을 단행했다. 기매는 겁간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정사정은 기매
가 먼저 추파를 던졌다고 주장했다.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과 그의 비서 김지은의 치정 공방이 연상되
는 대목이다. 정사정은 고려조에서부터 내시로 있으면서 많은 재물을 모아 눈에 드는 여자는 모두 첩
실로 들어앉힌 희대의 난봉꾼이었다. 정사정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이 방원에게 패하여 유배를
떠나자 태종에게는 형수뻘이 되는 방간의 첩도 데리고 산 적이 있었다. 태종은 그날로 정사정을 참수
하라 명하고 기매는 하옥시켰다. 날이 밝으면 처형할 생각이었다. 그날 밤, 상왕 장종이 찾아와 기매
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한때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인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싶어 태종은 그길로 기
매를 방면했다.
정종은 태조의 첫째 부인 한씨 소생 6남 가운데 여성편력이 가장 화려했다. 재위 2년 2개월 사이에 정
안왕후 외에 6명의 후궁을 두었다. 4개월에 한 명씩 후궁을 들인 것이다. 시비(侍婢) 출신 기매를 비
롯하여 직첩을 받지 못한 여인도 여러 명이었다. 정안왕후는 소생이 없었고, 방과는 후궁과 기타 여
인들로부터 서자 17명, 서녀 8명을 두었다. 스물일곱 분의 조선왕 가운데 성종과 동수의 다산이었다.
정종의 서자들은 행실도 개차반이어서, 부녀자 겁탈에 백성들의 재물 갈취를 밥먹듯 했다. 세종은 그
때마다 이들을 유배형에 처하곤 했지만 죽는 날까지 개과천선하지 않았다. 세종은 정종이 죽었을 때
그 부도덕함에 노하여 묘호도 부여하지 않고 실록도 편찬하지 않았다. 방과가 정종이란 묘호를 받은
것은 사후 262년 후인 제19대 숙종 7년(1681)이었다. 그마저 단종의 묘호를 정하면서 덤으로 얻은 것
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어제 온종일 궂은 날씨 탓에 경기도 광주.이천의 도자기 축제와 물빛공원 나들이를 접고 롯테 아웃렛 실내 아이쇼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금요일이 주말이 된 요즈음 이지만 퇴근시간 무렵까지 한산한 쇼핑가가 요즈음 의 경기를 말하는듯 문을 닫은 상가도 있고 적적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저녁무렵까지 하나도 팔지를 못했다는 옷가게 점원 의 하소연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고 합니다. 소비진작 또한 시장의 원천 인데 활황이 되었으면 합니다. 날씨 쾌청한 주말 입니다. 즐거운 일상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