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18yong에 오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용화여고 한 학생이 서울시교육청 게시판에 '학교의 강압적인 태도, 강제적 야간자율학습, 0교시 자율학습, 지나친 학생지도, 청소용역비, 교사들의 수업에 대한 관리자의 지나친 억압, 교감이 자꾸 만진다'라는 요지의 학교 비판글을 올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한 여고생이 교감으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결국은 12월 26일 방학식에 퇴학을 당했습니다.
이 학생의 억울한 사연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용이 길더라도 관심있게 끝까지 읽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용화여고 사태의 당사자인 허성혜라고 합니다.
먼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며, 이번에 글을 쓰게된 동기는 이번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하여 무너진 제 명예와 권리를 찾기 위함뿐만 아니라, 제 모교인 용화여고가 진정한 교육의 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제 입장을 표명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이번 사건에 발단이 될 4월달의 글들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학기 학급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저기서 학생들의 불만사항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가 교감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저에게 자꾸 눈물로 호소를 하며 단지 교육청민원실이 신문고 기능을 한다는 생각만으로 12일, 20일, 21일, 24일에 걸쳐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글내용과 관련해 저는 거짓을 올리진 않았습니다. 강제야자에 대한 불만이나, 청소용역비등의 부담과 친구가 울며 호소했던 부분이나 투명창 사이로 감시받는 느낌등에 대해 제가 겪어온 것들을 느낀 그대로 올렸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교감선생님으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6월,7월에 걸쳐 경찰서, 검찰청 조사를 받았습니다. 교감선생님이 저를 고소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5월 24일, 도봉경찰서로부터 나와서 조사받으란 통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5월 25일 아버지께서 학교에 찾아오셨을 때, 교감선생님은 분명히 "학생인줄 알았으면 고소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시며 "학생은 피해가지 않을 것이니 조사만 받고오라, 학교처벌은 하지 않겠다. 넌 우리학교 학생이니까 피해없을거다, 내가 우리학교학생인줄 알았으면 고소도 안했을꺼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교감선생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5월 27일 아침 0교시에 저는 교감선생님께 반성문을 적어서 내려갔습니다. 글을 올리면 죄가 되는것인지 몰랐다는 내용이었고, 물론 교감선생님께서도 읽어보셨으나 "내가 이것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며 받지 않으셨습니다. 선도위원회측에서 12월에 학생들에게 나눠준 유인물을 받아보니 사실과 다른 부분이 눈에 띄였습니다. 그중 27일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다른 점이 있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도위원회에서 나눠준 유인물에는 교감선생님과 저, 그리고 담임선생님이 함께 동석한 자리에서 세 가지 물음에 제가 대답을 하거나, 또는 안한 것으로 나와있는데, 실은 그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저는 교감선생님께 반성문을 내밀었고, 받지 않으셨으며, 그러시면서 "내가 널 만졌냐?"라고 말하셨고 전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교감선생님이 "그럼 내가 니 친구를 만졌냐?"라고 말했으나, 저는 무서워서 대답하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감선생님은 그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누가 시켰니? 시킨거지? 배후가 누구니? ○○○선생님이 시켰지? ○○○선생님이 시켰다고 반성문 써와야지, 반성문은.." 제가 중간에 "제발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을 했더니 "그러니까 반성문을 사실대로 써와야 용서를 해주지.."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계속 울었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러자 교감선생님은 손수건을 꺼내서 쥐어주시며 담임선생님을 부르셨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오시자, 교감선생님은 제가 우는 사이에 담임선생님한테 교감선생님과 저 사이에 오갔던 대화들을 정리해 말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우느라 그 정리 내용은 기억할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저는 6월 5일 결국은 교감선생님이 고소 취하를 해주시지 않으셨기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3시간 여의 긴 조사의 중점은 제가 학교 비방글을 올린 사실의 인정과 누군가의 사주가 있었냐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조사 중간에 제가 교감선생님의 성추행사실에 대해 친구의 이야기를 언급하자 조사를 담당하시던 경찰분이 "딸처럼 예뻐서 그런 것" 이라며 넘겨버리셨습니다. 7월 5일, 저는 북부지청에 출두했습니다. 그곳에서 반성문을 작성하고 검사에게 내자, 검사가 "교감선생님이 네 처벌을 원하는데?" 라고 말했고 저는 그제서야 속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7월 8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자살기도를 했는데, 그 역시도 쉽지 않더군요. 정말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8월 개학 후에도 교감선생님은 여전하셨습니다. 8월 21일 학생회의 때는 교감선생님은 제가 바로 코앞에 앉아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바로 앞에서 "학생이 아니면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다." 는 등의 말씀을 하셨고, 저는 그때마다 소름끼치도록 교감선생님이 무서웠습니다. 제가 기소유예 처분 받은 내용이나, 어디어디 가서 조사받았던 내용들은 모든 학생회 간부들 앞에서 다 말씀해주셨고, 아버지가 오셔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려서 사죄했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온갖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시면서도 여전히 전교조선생님들이 배후에 있을 것이란 말씀을 하셨고, 전교조가 디스켓에 글을 작성해서 그 학생에게 주어서 올렸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용서를 하고 싶은데 학부모들이 용서하지 말라는 항의전화를 하고 7, 8월중에 보람아파트부터 임광아파트까지 돈 유인물 때문에 용서할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도 그 유인물은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문건입니다.
9월들어 선도위원회 이야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10월달들어 아예 학생부장대행선생님이 저를 계속 학생부로 불러서 진술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너무 무서운 분위기였고 정말 진술서를 쓸 엄두조차 나지 않았고 저는 첫 진술서는 작성했으나, 학교측에서는 계속 다른 진술서를 원하셨고, 그래서 진술서 쓰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월말 저는 내용증명을 받았습니다. 내용증명의 내용은 선도위원회를 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쯤 반친구 ○○이가 저의 딱한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안△△에게 전화를 걸어 화해를 시켰습니다. 물론 서로 싸우고 하는 화해는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다가가질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덕분에 저와 △△이는 다시 예전처럼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10월 15일 문화일보에 난 학교기사로 취재나온 KBS에 김○○기자에게 저희반 친구들이 "교감선생님께 고소당한 아이가 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고 김기자가 도와주겠다 하여 취재를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안△△역시 KBS 인터뷰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승낙해주었고 그래서 인터뷰를 했으나 방송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선도위에서 제출한 입장 내용을 보면 마치 제가 인터뷰를 위해 안△△을 협박한 것으로 나와있는데 저는 안△△과 단지 인터뷰를 위해 화해한척 한 것은 아닙니다.. 그후 김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진정서를 본인이 올리거나 피해자의 가족이 올리면 진상조사를 할것이라는 이야기를 알게 되어 안△△에게 부탁을 한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협박이라니요. 저는 정말 저를 폭력적인 사람으로 매도하는것에 대해 너무 속이 상합니다.
진정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자, △△이는 웃으면서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5일에 노원역 봉추찜닭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진정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과정에서 협박은 없었습니다. 찜닭집 아저씨는 제가 얼마전 억울하게 퇴학당한 사실을 말하며 속상하다 하자 흥분하시면서 그 애가 어떻게 그럴수 있냐고 까지 되물으셨습니다. 그리고 10월 27일 까페에서 다시만나 진정서를 또 작성하고, PC방에서 진정서를 썼습니다. 까페 주인 아주머니는 저와 안△△과 친구들을 예전부터 보셨었고, 그날 협박이라는게 없었다는건 아주머니가 증명해주실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안△△를 끝까지 믿었습니다. 다시 번복안하겠다는 그말도 믿었습니다. 제가 증인같은 것을 만들려면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를 믿기 때문에 △△이가 불편해 해서 오직 그 애를 위해 그애가 하자는대로 했던겁니다. 진정서를 올리고 다음날, SBS 서○○기자가 나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러던중 △△이의 어머니께서 밤늦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11시 30분이 넘은시간 만나서 마들역에 있는 까페에서 새벽 3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권자이신 작은아버지와 △△이 부모님, 그리고 제가 함께 만났습니다. △△이 어머님은 △△이가 당한 것을 인정하신다며, △△이 아버님은 교감을 고소해야겠다고 까지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중간에 누가 시켰냐고? 역시 그 물음도 빼놓지 않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끝까지 시킨 사람이나 배경은 없다고 했지만 △△이 부모님은 계속 못 미더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10월 31일 선도위원회는 열리고 말았습니다. 10월 30일 밤늦게까지 저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냥 오늘 집을 나가서 사라져 버릴까, 학교에 갔다가 조퇴할까, 별별 생각 끝에 저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선도위원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징계담당 이○○선생님이 올라오셔서 제게 4시 20분까지 교장실앞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분들이 들어오세요?"라고 묻는 제 질문에 징계담당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셨는데 덜컥 겁부터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래도 제 얘기에 귀기울여 주셨던 담임선생님을 요청했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제 요청에 징계담당선생님으로부터 1시간인가 2시간전에 갑작스럽게 통보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제 친권자인 작은아버지와 저, 그리고 담임선생님과 각 부장선생님들의 참여로 선도위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지하상담실에서 이루어진 선도위원회는 취조실 분위기였습니다. 절대로 제입장을 말할수 있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도 아니었고, 저를 혼자 앉히시고 빙둘러앉은 부장선생님들과 2시간정도의 선도위가 끝난후 저는 끝끝내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곳에서 나오면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간에 출장을 가셨다던 교감선생님은 살짝 문을 여시더니 "아직 안 끝났어요?"라고 물으시더니 다시 나가시더군요. 정말 너무 무서웠습니다. 옆에 작은아버지와 담임선생님이 앉아계셨지만 저는 정말 혼자 동떨어진 기분으로 정말 착잡하고 두렵기만 했습니다.
11월 1일, 저는 교육청 장학사들에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장학사들과는 2번 조사를 받았는데 학생을 위해서 조사하는 것이라고, 학생을 도와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시던 분들은 거짓이었나봅니다. 제가 번복했던 부분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교감선생님이 만진 것을 직접 본게 아니고 종아리와 어깨에 손대는 것은 보았고, 안△△이 나중에 얘기해 준게 허벅지에서 만졌다는 것과 가슴을 만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라는 부분을 안△△에게 들을 내용을 제가 본 것처럼 말했다는 그부분이겠지요. 저는 어쩔수 없었습니다. △△이는 제게 '혼자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것이니 확실하게 증인을 서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고요. 11월 6일에 SBS에서 8시뉴스에 이 내용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뉴스에는 누가 봐도 안△△이 피해자인것처럼 나왔습니다. △△이가 당당했거든요.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기를 믿으라고 말했었으니까요. 11월 14일, 다시 받은 교육청 조사에서 저는 다시 번복했던 부분들에 대해 △△이가 말을 맞추자고 한 것이었다고 진술하고 정말 교육청 분들을 믿고 사실대로 말했으나, 교육청분들이 여전히 교감선생님을 옹호한다고 느낀 판단아래, 중간에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교감선생님도 교사신데 어떻게 학생인 저를 고소하나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성폭력 상담소 직원인 이○○라는 분이 제게 "내가 교감이라도 고소하겠다!"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씀을 들으니 기운이 쫙 풀리더군요.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조사가 끝나고 저는 창동부터 상계동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생각이 없었습니다. 날씨가 엄청 추웠는데 저는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중간에 담임선생님과 아버지께서 오해를 하시고 걱정들을 하신 일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또다시 중간 중간 나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너무 힘들었으니까요.
그렇게 11월 27일, 기말고사 기간이었습니다. 계속적인 스트레스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이었는지라, 저는 기말고사기간에도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스럽게 교육청에 올라간 11월 24일자 안△△의 사과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육청 조사중에 △△이가 진술을 번복했다는 사실을 들었으나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1월 24일자 사과문은 △△이에 대한 제 믿음을 산산조각 내주었습니다. 사과문 내용은 항상 교감선생님이 말씀하시던 내용 그대로였고, 누군가가 제 뒤에 있다는 그 부분은 전교조선생님들을 잡자는 심보가 아니고서야 사과문에 굳이 넣을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사과문을 읽고 다음날 아침 학교에 등교할 때까지 내내 울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다음주 12월 2일, 저는 안△△의 반으로 친구 유○○, 정○○와 함께 사과문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러 갔습니다. 선도위 입장에 보니 협박한 것으로 되어있더군요. 저는 가서 폭력적이란 언어는 쓰지도 않았습니다. 찾아간 마음도 씁쓸했고, 제가 말하는데 듣지도 않고 딴 짓을 하며 무시하는 모습에 저는 사과문 내용에 대해 따질 마음도 버린 채 한마디를 하고 반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래도 1년 동안 너를 정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섭섭하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12월 둘째 주, 저는 너무 아팠습니다. 유행하던 독감 기운에 스트레스성 신경질환이 겹쳐 학교를 잘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러던 중에 이△△선생님의 문자와 전화를 받기는 무리였습니다. 선도위원회에 참석하라는 공문을 받지 못한 채, 심지어는 친권자인 아버지나 작은아버지께 한마디 연락도 없는 채, 저없이 선도위원회가 열렸고, 그곳에서 교감선생님이하 많은 선도위 선생님들은 한 분의 이의도 없이 10명 전원이 저를 퇴학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선도위 절차에 대해 저는 너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담임선생님도 들어가지 않으셨고, 보호자인 저의 아버지나 작은아버지도 들어가지 않으셨고, 또한 4월에 발생했던 사안을 이렇게까지 끈 것도 제 검정고시 기회마저 박탈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고, 계속 제 처분 결정 근거가 바뀌었던 부분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이 제가 제 입장에서 쓴 사건경위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용화여고를 사랑합니다. 학교가 싫어서 학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교가 싫어 비판했다면 처음부터 전학을 갔을것이고, 처음부터 자퇴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저는 용화여고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고 추방당하긴 했지만 여전히 용화여고는 제 모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힘든 1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힘들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게 힘을 주고 저를 위해 추운 겨울에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며 저는 이제는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너무 가슴이 아프고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리고 억울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싶고 친구들과 지내고 싶은 그저 평범한 여고생일 뿐입니다. 세상은 제게 너무 가혹합니다. 선도위의 입장 표명글을 읽으면서 너무 괴로웠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퇴학당했다며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며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제겐 없다고 생각됐을 때, 바보같지만 또다시 자살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퇴학처분은 제게는 너무 가혹합니다. 저도 꿈이 있고 집안을 세워야하는 막중한 책임도 있습니다. 저를 부디 학생으로 여기어 주십시오. 그리고 제게 더 이상 거짓 대답을 요구하지도 마십시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도 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조용히 학교로 돌아가 다시 즐겁게 친구들과 지내고 싶습니다.